남소문 터
반얀트리클럽&스파호텔 뒷문으로 나와 오른쪽 오르막길로 올라가면 오른쪽 길가에 남소문 터의 표지석이 있다. 성곽이 끊겼다는 표지판이 있는 곳의 계곡 아래쪽, 장충단 길에서는 가장 높은 언덕 위에 남소문(南小門)이 있었다. 이 언덕을 버티고개라고 부른다. 그런데 약수역에서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다산로 언덕도 버티고개라고 부른다. 그러니까 ‘버티고개’란 어느 특정한 곳이라기보다는 신당동에서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언덕을 통틀어 부르던 명칭이다. 버티고개의 옛날 이름은 부어치(扶於峙)였다. 세월이 흘러 ‘부어’는 ‘버’가 되고, ‘언덕 치(峙)’는 언덕이라는 우리말 ‘티’로 변해 ‘버티’가 됐을 것이다. ‘부어’란 밝다는 뜻이므로 부어치는 밝은 고개, 햇빛이 잘 드는 고개란 뜻이다. 그러나 이름과는 달리 고갯길이 좁고 인적도 드물어 산적이나 불량배가 자주 출몰하는 음침한 고개였다고 한다. 예종 1년(1469) 8월 25일 임금이 형조에 명해 이 고개의 도둑들을 잡아 징치하라고 했다는 기록을 보면 당시 사정이 심각했음을 알 수 있다.

도둑들은 지방에서 뽑혀 한양의 군영으로 올라와 수비대로 복무하던 군인들을 활로 쏘고 소지품을 빼앗는가 하면, 남소문을 지키던 선전관(宣傳官: 임금을 호위하고 임금의 명령을 전달하는 선전관청의 무관)까지도 위협해 쫓아낼 정도로 행패가 심했다. 혐의자 20여 명을 잡아 심문하는 과정에서 4명이 곤장에 맞아 죽었다. 같은 해 9월 11일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러한 불상사로 인해 9월 14일 남소문에 대한 좋지 않은 풍수지리설과 음양설이 논의됐다. 이를테면 이 문이 경복궁의 남동쪽에 위치하고 있어 한양의 남동쪽을 개방하면 화가 미친다는 설이다. 음양설 외에도 수레가 다릴 수 없을 만큼 도로 폭이 좁아 문을 열 실익이 없다는 등 이러저러한 의견이 있어 문을 막자는 결론이 났다. 폐문 논의를 제기한 지 5일 만인 9월 19일 드디어 남소문을 폐쇄하게 됐다. 추정컨대 세조 3년(1457)에 건립된 남소문은 약 12년 만에 그 역할을 마치고 말았다.

이후 남소문을 개통하자는 주장이 명종과 숙종 때 여러 차례 제기됐으나 다시 음양설 등으로 인해 문을 열지 못했다. 이 문은 폐쇄된 상태로 조선말까지 존속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1913년 일제가 도로를 개설하면서 철거했다고 한다. 이때 고개를 5m 정도 낮추었으므로 이 문의 주초마저 없어졌다.

세조가 남소문을 건립한 이유는 이렇다. 조선 초기 남쪽 지방에서 한강진을 통해 도성으로 들어오려면 광희문을 이용해야 했다. 그런데 한강진에서 광희문을 이용하려면 현재의 약수동 고개를 넘어 돌아서 와야 하므로 불편했다. 한강진 강남 쪽에서 한강을 건너 지금 전철 6호선 한강진역이 있는 곳까지 개천을 따라 배가 올라올 수 있었으므로 버티고개만 넘으면 바로 도성에 닿는 남소문 쪽이 훨씬 가까운 지름길이었다. 이와 같이 남소문이 건립된 주된 이유는 한강진에서 도성에 이르는 지름길이란 점이었다. 남소문은 강남과 도성의 동쪽을 잇는 중요한 통로가 됐다. 남소문이 있었으므로 지금의 장충동 일대를 예전에는 남소동이라고 했고, 이곳에 남소영이라는 병영이 있었다.

▲ 남소문터 표지석

국립극장사거리에서 남산성곽탐방로까지
남소문터에서 지하철 동대입구역 방향으로 내려간다. 반얀트리클럽&스파 정문과 만난다. 정문 앞은 이 호텔로 들어가는 길과 남산공원으로 올라가는 길이 왕복4차선 장충단길과 만나서 국립극장4거리가 된다. 서울성곽을 살펴보기 위해서 국립극장 쪽으로 길을 건넌다.

국립극장은 동쪽 언덕에 있다. 1973년 10월 17일, 국립극장 남산시대의 문을 열었다. 국립 공연‧예술의 종합극장으로, 단지에는 해오름극장(대극장), 달오름극장(소극장), 별오름극장, 하늘극장(원형야외무대) 등이 있다. 1974년 광복절 경축식 행사 도중 육영수여사가 문세광에게 저격당한 장소기도 하다.

국립극장사거리로 올라가면 남산공원순환도로와 만난다. 남산매표소에서 9시 방향으로 꺾이는 도로를 따라 100m쯤 걸으면 갈림길이 나오는데, 성곽길을 찾기 위해서는 왼쪽 길로 가야한다. 오른쪽 길은 남산 북사면에 놓인 순환도로이므로 그길로 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갈림길에서 왼쪽 길로 50m 쯤 가면 성곽이 보인다. 이 성곽은 남산순환도로와 만나 다시 끊겼다가 길 건너 가파른 능선을 따라 이어져 올라간다. 도로에는 성곽이 지나간 흔적과 중구 및 용산구의 행정구역 경계 표시가 있다. 도로 위쪽은 용산구고, 아래쪽은 중구에 속한다. 이 또한 한양도성성곽이 행정구역과 일치함을 보여준다.

▲ 남산 순환도로 바닥에 있는 중구와 용산구의 경계 표지, 이 성곽은 이 자리에서 끊겼으나 성곽이 지나간 자리에 돌을 박아 표시했다.

나무계단 성곽탐방로를 따라 올라 구름다리를 건너다
성곽 옆으로 남산 정상을 향해 올라가는 나무계단이 놓여있다. 성곽탐방로다. 성곽을 따라 올라가면서 성곽을 바라본다. 자연석을 다듬지 않고 그대로 쌓아올린 것을 보면 태조 때 쌓은 성곽임을 알 수 있다. 겉으로는 엉성해 보이지만 600여년간 무너지지 않고 튼튼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 긴 세월풍우에 깎인 성벽의 시커먼 외관이 의연하고 자랑스럽다.

나무계단은 250m나 이어진다. 남산의 높이가 265m로 낮은 산이라지만 끝까지 오르자면 가을인데도 땀이 비 오듯 흐른다. 오르기 전에 생각했던 것보다 계곡이 깊고 아기자기하다. 특이한 것은 나무계단에 50m 단위로 거리 표시가 돼 있고, 신기하게도 대체로 50m, 100m, 150m 지점 등에 세종 때와 태조 때와 숙종 때 것으로 보이는 각자성석이 있다.

▲ 남산 성곽탐방로 나무계단을 오르는 필자

나무계단 성곽탐방로와 각자성석
처음에 보이는 것은 ‘禁/二所 五百七十步(금/ 이소 오백 칠십 보)’인데, 숙종37년(1711) 각자다. 禁(금)은 광희문에서 돈의문 구간을 관할했던 금위영(禁衛營)을 말하고, 二所(이소)는 두 구간, 오백 칠십 보는 성곽을 쌓은 거리가 570보라는 의미다. 다음은 태조 때의 巨字終闕百尺(거자종궐백척) 각자다. 巨(거)는 천자문 51번째 글자이고, 闕(궐)은 52번째 글자다. 따라서 거자 육백 척 구간이 끝나고, 궐자 육백 척 구간 중 첫 백 척이 시작되는 지점을 뜻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세 번째는 ‘第五?/一百/判官/陳(原)吉(제오? 일백 판관 진원길)’ 각자다. 5 다음에 십자가 지워졌다고 본다면, 50번째 소구간 100척을 판관 진원길이 감독했다는 각자다. 이 밖에도 한두 곳에 더 보이는데, 여기서는 설명을 생략하겠다.  

나무계단으로 된 성곽탐방로는 250m 지점에서 초소처럼 보이는 구름다리에 닿는다. 구름다리를 건너 도성 안으로 들어간다. 도성 안에서는 성벽이 시야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정상에 가까운 탐방로는 경사가 완만해 도성 밖 가파른 계단을 걷기보다는 훨씬 편안하다. 남산 정산이 가까워진다. 다시 힘이 솟는다.

▲ 禁/二所 五百七十步 (금/이소 오백칠십보) 각자성석

글 허창무 주주통신원/ 사진 이동구 에디터

허창무 주주통신원  sdm347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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