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적 가치가 충분히 확산된 상태”임을 전제한 임재성의 비현실적 ‘희망 고문’
상고 각하(심리불속행)가 70~80%에 달하는 것은 2심으로 끝난다는 것
2심이 없는 현실에서 재판소원은 애초에 4심이 될 수 없어
독일 등에서는 헌법재판소 업무 80~90%가 재판소원
한국같이 헌법재판소가 정치적 기능(탄핵심판권, 정당해산권) 가진 곳 세상에 없어

조희대 대법원의 퇴행, 대선후보 이재명에 대한 적나라한 ‘졸속 선고’와 초유의 전합 판결(사진출처: 한겨레, 2025.11.14. https://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1195968.html?utm_source=copy&utm_medium=copy&utm_campaign=btn_share&utm_content=20251121)
조희대 대법원의 퇴행, 대선후보 이재명에 대한 적나라한 ‘졸속 선고’와 초유의 전합 판결(사진출처: 한겨레, 2025.11.14. https://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1195968.html?utm_source=copy&utm_medium=copy&utm_campaign=btn_share&utm_content=20251121)

 

재판소원 도입을 둘러싸고, 대법원과 헌법재판소가 충돌했다. 재판소원이란 헌법재판소가 법원 재판을 심판대상으로 삼는 제도로서, 이 제도 도입으로 대법원 확정 판결이 헌재 결정에 따라 취소될 수 있다. 재판소원에 반대하는 대법원의 천대엽(법원행정처장)은, 이는 곧 “4심제 도입으로 업무폭증의 소송지옥에 빠질 것”, “분쟁 해결(소송)의 장기화와 서민의 비용 부담 증가를 불러올 것”이라는 의견을, 그리고 재판소원 도입에 찬성하는 헌법재판소는 “법원 재판 역시 공권력으로서 국민기본권을 침해할 수 있고, 그에 대해 헌재에서 헌법적 판단을 받는 헌법심으로서, 4심제가 아니다”, “재판소원도 헌법소원의 한 유형이고, 행정적 부담을 이유로 제도의 도입을 거부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취지의 의견을 각기 개진했다.

여기에 임재성(변호사)이 재판소원 제도 도입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에서, “‘헌법재판소 4심제’라는 희망 고문”이라는 기사를 한겨레에 싣고, “헌법재판소 판단은 기본권을 더욱 보장하는 쪽이기만 할까? 조희대가 헌법재판소장이었을 수도 있다. 헌법재판소가 더 나을 것이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예상되는 효능은 추상적이지만, 부작용은 분명하다.... 헌법적 가치가 국가 전체적으로 충분히 확산되어 있는 상태라면, 이런 비용을 지출하고서까지 재판소원 제도를 도입할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등 취지의 의견을 개진했다.(한겨레, 2025.11.14.)

임재성은 두 가지 점에서 오류를 범했다. 첫째, 재판소원 제도 도입의 효능이 추상적(불분명)이고 오히려 그 부작용이 분명하다고 한 점이다. 그 주요 근거가 대법원이나 헌법재판소가 도긴개긴이라는 것이고, 조희대 같은 이가 대법원뿐 아니라 헌법재판소에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임재성이 깨닫지 못한 것은 공기관 간 권력의 견제라는 제도적 측면이다. 재판소원 도입을 거부하는 이들은 공권력 간의 견제 장치 자체를 없애고자 하는 것이고, 이것은 공권력의 독주를 조장, 가중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현재 조희대 대법원의 독주는 바로 이 같은 견제장치의 부재로부터 기인하는 바가 크다.

독일의 경우, 16개 주(란트)에서 최고법원은 물론 헌법재판소가 각기 존재한다. 연방헌법재판소는 각 주의 최고법원은 물론 각 주의 헌법재판소와 법리 다툼을 하게 된다. 공기관끼리 서로 견제하는 이 같은 분권적 구도에서는 조희대같이 독주하는 대법원장이나 헌법재판소장은 존재할 수가 없게 된다. 조희대의 존재는, 그 개인의 자질, 경향성을 논하기 전에, 한국의 획일적 사법조직과 대법원장에게 집중된 전제적 권력에서 비롯된 것이다.

조희대 같은 이가 헌법재판소에도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재판소원 제도의 효용성이 없다고 지레 예단하고 배척할 것이 아니다. 임재성이 헌법재판소도 공정하게 판단하리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지레 재판소원을 도입하는 것이 불필요하다고 하는 것은,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는 격이다. 구더기가 있으면, 구더기를 걷어내고, 장은 담궈서 먹어야 하는 것이다. 조희대 같은 이가 있을 것이므로, 제도 자체를 불필요하다 할 것이 아니라, 그런 이를 없애면 된다. 헌법재판소에서 뻘짓하는 경우를 대비하여, 그런 헌법재판관을 벌하는 법도 만들어야 하는 것이겠다.

일단 제도를 도입한 다음 그 제도가 올바르고 공정하고 객관적이게 운영될 수 있도록 매진하는 것이 순리이다. 또 헌법재판소에 조희대 같은 이가 있을 수도 있지만, 반드시 조희대 같은 이만 있을 것도 아니고, 또 그 같은 이가 있을 것이라고 지레 겁을 먹고, 제도를 포기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는 윤석열 같은 이가 나올 것이라고 겁을 먹고 정부 권력 자체를 없애자는 말은 아무도 하지 않는 것과 같다. 다만, 윤석열이나 조희대 같은 이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여, 정부 혹은 사법 권력의 독주를 막는 장치를 진작(振作)시킬 필요는 있는 것이겠다. 독주의 방지는 당연히 권력의 분산 및 공적 기관 간의 상호 견제 장치를 통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이 경우, 대법원의 독주를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당연히 헌법재판소의 재판소원 제도는 도입되어야 한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임재성같이 조희대가 헌법재판소장이 될 것이므로 재판소원 할 필요가 없다고 할 것이 아니라, 조희대의 재출현을 방지하기 위해서 재판소원 제도는 도입되어야 하는 것이다. 윤석열 독주의 재발 방지는, 중앙집권의 구도를 탈피하고 지역분권을 도모하는 것으로서, 또 행정, 입법 권력의 견제는 국민의 정치적 발언권(국민발안, 국민소환, 국민투표) 제도화를 통한 것이 되어야 하는 것이겠다.

임재성의 두 번째 오류는, 재판소원 제도를 도입할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고 한 근거로서, “헌법적 가치가 국가 전체적으로 충분히 확산되어 있는 상태라면”이라는 가정법을 쓴 것이다. 이 말을 바꾸면, “헌법적 가치가 국가 전체적으로 충분히 확산되어 있지 않은 상태라면, 재판소원을 도입해야 한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지금 한국의 실태는 전자가 아니라 후자인 것이 분명하다. 헌법적 가치가 국가 전체적으로 충분히 확산되어 있는 상태가 아닌 것이다.

임재성 자신이 말하고 있듯이, 조희대 같은 이가 대법원장으로 있다는 사실이 그 같은 현실을 반증한다. 그런데 어떻게 그가, “헌법적 가치가 국가 전체적으로 충분히 확산되어 있는 상태라면”이라는 전제를 깔고서, 제판소원 제도가 부작용을 낳는 것이 확실하다고 하는 것인지, 오리무중이다.

임재성은 “헌법적 가치가 국가 전체적으로 충분히 확산되어 있는 상태”라는 가정하에, 재판소원 제도가 불필요한 ‘희망 고문’이라고 규정했다. 그러나 그 같은 가정 자체가 비현실적이라는 점을 직시한다면, 희망 고문은, 거꾸로, 그 같은 가정을 현실로 여기고 싶어 하는 임재성에게로 환원되는 것이고, “헌법적 가치가 국가 전체적으로 충분히 확산되어 있지 않은” 상태의 한국에는 재판소원 제도가 필히 도입되어야 하는 것이겠다.

최근 발간된 재판소원 관련 (한국)국회입법조사처 보고서에 근거하여, 임재성은 재판소원에서 ”위헌성이 인정되는 비율은 1% 정도에 불과하다“는 점을 들었다. 이 같은 수치의 인용과 해석에서도 오류가 있다.

첫째, 임재성 자신의 말에 따르면, 한국과 같은 관료주의 풍토에서 헌법재판소 판결 자체가 오염되었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 조희대 같은 이가 대법원뿐 아니라 헌법재판소에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재판소원 인용 1%에 불과하다는 것이 그 자체로서 객관적 잣대가 되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현재로서 한국 헌법재판소는 1987년에 제정된 헌법재판소법(헌법 자체가 아니라)에 의해 재판소원을 원칙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 그 후 여러 가지 곤혹스런 상황의 발생으로 예외적으로 재판소원을 인정하게 되었다. 극도로 제한된 이 같은 상황에서 인용 비율 1%라는 것을 기준으로 어떤 단정적 결론을 도출하는 것이 타당성이 있는 것이라 하기 어렵다.

독일의 경우, 연방헌법재판소의 재판소원 인용비율은 훨씬 더 높고, 판사가 잘못된 판결로 유죄가 되어 처벌받은 비율이 13%에 달하는 것으로 필자는 알고 있다. 사법 행정이 한국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갖추져 있는 독일에서도 재판소원으로 13%가 오판으로 인용되는 상황을 감안하면, 사법부가 뒤죽박죽 제자리를 찾지 못한 한국에서, 그 인용 비율은 훨씬 더 높아질 것으로 전망하는 것이 당연하다.

사실 인용비율이 1%라 하더라도, 그것은, 위 임재성이 폄훼한 바와 같이 무의미한 것이 아니다. 1%의 제도적 견제장치가 존재하기 때문에, 판사들이 다소간 조심을 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1%의 인용이 도출되었다는 사실은 그 100배에 달하는 재판소원 제기가 있었다는 뜻이고, 그런 견제, 항의 절차의 존재 자체가 의미를 갖는다.

둘째, 임재성은 헌법재판소의 원래 기능이 무엇인지에 대해 몰지각함을 드러냈다. 헌법재판소는 정부 권력이 헌법에 반하여 개인의 기본권을 침해하는지를 심사하는 곳이다. 독일 헌법재판소는 나치 독재 하에서 왜곡된 재판을 경험한 독일인들이 사법권력의 판사들을 통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창설했다. 지금도 그 업무의 80~90%가 재판소원이다.

그러나 한국 헌법재판소는, 애초에 재판소원을 금지하고(헌법재판소법 제68조 제1항), 헌법의 수호가 아니라 정치적 기능을 행사하며, 9명의 임명직 관료(헌법재판관)가 국민이 뽑은 300명 국회의원 위에 군림한다. 한국 헌법재판소는 한국이 민주체제가 아니라 과두체제임을 명확하게 증명하는 것이다.

임재성은 각국의 사례를 소개하면서, 한국 헌법재판소가, 다른 나라 헌법재판소가 갖지 않은 정치적 기능, 즉 정당해산권과 탄핵심사권(헌법 제111조)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았다. 세계 어떤 나라에서도 국회에서 정치적으로 결정한 탄핵을 헌법재판소에서 다시 심사하여 무효로 돌리는 곳이 없다.

임재성은 재판소원 제도를 도입할 것인가 여부를 논하기 전에, 한국 헌법재판소가 왜 필요한 것인지부터 논할 필요가 있다. 헌법재판소가 재판소원을 통해 공권력에 의한 개인 기본권 침해를 구제하는 기능을 가질 것이 아니라면, 아예 헌법재판소 자체가 불필요한 것이다.

지금같이 월권하는 헌법재판소를 가만 두고 거기에 재판소원 제도를 도입할 것인가 여부를 논하고, 그것이 불필요하다고 하고 있을 계제가 아닌 것이다. 정작 헌법수호의 기능은 포기하고, 국회 위에 군림하려고 하는 헌법재판소는 본래의 기능을 망각한 월권의 독재 기관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재판소원 관련하여 임재성이 제공하는 정보를 간추리자면, ”미국, 영국, 일본 등은 헌법재판소가 별도로 분리되어 있지 않다. 헌법재판소가 있는 국가 중 프랑스와 아틸리아에는 재판소원이 없다. 독일과 스페인, 대만 정도가 재판소원 관련하여 참고할 수 있는 사례이다. 독일 사례가 한국에 과잉 유통되며 재판소원이 보편적 제도처럼 비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판사가 신이냐?’라며 ‘법원 견제를 위해 재판소원이 필요하다’고 하지만, 대부분 국가는 ‘다른 방식’으로 법원을 견제한다”는 것이다.

임재성은 대부분 다른 국가가 법원을 ‘다른 방식’으로 견제한다고 운을 띄웠으나, 그 ‘다른 방식’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았다. 한국 헌법재판소가 재판소원을 받지 않으려 한다면, 그 ‘다른 방식’의 견제가 존재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한국은 법원을 견제할 수 있는 제도가 속수무책으로 갖추어져 있지 않다. 현재 눈앞에 전개되는 법원의 독주가 그런 사실을 반증한다. 이것은 조희대 개인의 문제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그 ‘다른 방법’도 없이 재판소원 제도도 도입하지 않겠다는 임재성은 무책임하다.

헌법재판소가 없는 미국, 영국, 일본은 일반 재판소에서 법률의 위헌성, 혹은 기본권 침해 등을 판단한다. 이들 나라의 공통적 특징은 아예 재판 자체를 관료 법관들이 독점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미국과 영국(영미법)은, 많은 경미한 사건들은 비직업 판사(치안판사)가 판결한다. 일본도 법원의 문을 두드리기 전에 사인(私人)간 조정제도가 활성화되어 있고, 정부 공권력은 보충적으로만 개입한다.

헌법재판소가 없는 나라들에서는 이같이 공권력에 의한 기본권 침해가 최소화되고, 또 헌법재판소가 (연방)의회 위에 군림하는 일도 없다. 헌법재판소가 있는 프랑스에서 헌법재판소는 일정 사안에 한하여 의회의 입법 사항을 감독하는 것으로 그 기능이 명확하게 규정, 제한되어 있다. 헌법재판소와 의회는 서로 견제의 구도를 갖추고 있으며, 그 헌법재판소는 한국과 같은 정치적 기능(탄핵심판권, 정당해산권)을 가지고 의회를 통제하는 기관이 아니다. 더구나 프랑스 국회(양원제)는 유권자 1/10에 해당하는 의원의 서명을 통해 국민투표 회부권을 가지고 있다.

임재성에 따르면, “독일연방헌법재판소 접수 사건 중 재판소원 비율은 80% 안팎, 스페인은 95% 안팎, 대만은 2022년부터 재판소원 등 헌법소원 대상 범위를 늘렸는데, 제도 시행 이후 3년 동안(2022~2024), 그 직전 3년 동안과 비교하여 3배 이상 사건수가 증가했다. 한국의 경우, 재판소원으로 헌법재판소에 접수되는 사건은 3배~5배 정도 증가될 것으로 예상된다”고 한다.

임재성은 “헌법적 가치가 전체적으로 충분히 확산되어 있는 상태라면, 이러한 비용을 지출하고서까지 재판소원 제도를 도입할 필요는 없을지 모른다”고 했다. 임재성의 관심은, 재판의 공정성 이전에, 재판소원이 쇄도했을 때 치루어야 할 비용에 대한 염려로 환원된다. 한편에, 비용에 촛점을 맞추면서, 다른 한편으로, “헌법적 가치가 전체적으로 충분히 확산되어 있는 상태”라는 비현실적 전제를 기정 사실처럼 오도하는 궤변을 펴고 있다.

임재성의 말을 바꾸면, “헌법적 가치가 충분히 확산되어 있지 않는 상황”이라 하더라도, 비용이 많이 들어갈 것이 “부풀리기 없이 예상되니, 재판소원은 도입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뜻이 된다. 그러나, 다시 강조하건대, 헌법적 가치는 충분히 확산된 상태가 아니라, 현실은 정반대이다.

헌법에 보장된 3심조차 누리지 못하고, 80% 정도의 대법원 상고는 이유도 없이 기각되고, 부실하기 짝이 없는 2심으로 끝나는 실정의 한국은, 임재성이 배척하는 바의 ‘희망 고문’(헌법재판소 재판소원의 공정성)을 염려해야 할 만큼 “헌법적 가치가 충분히 확산되어 있는 상태”가 아니다. 헌법재판소에 재판소원이 도입되어도, 그것은 애초에 4심이 될 수가 없다. 실제로 2심으로 마감되는 사법 현실을 고려하면 그러하다.

 

편집: 최자영 객원편집위원.  조형식 편집위원  

최자영 객원편집위원  paparuna999@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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