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오른 생각들로 순서도 정오(正誤)도 없다. 오호(惡好)와 시비(是非)를 논할 수는 있지만 대상은 아니다. 중복도 있으므로 고려하면 좋겠다. 여러 차례에 걸쳐 싣는다.
1.
삶의 본질인 만물의 상호관계를 생각한다. 그들 사이에 애초부터 애증(愛憎)과 친소(親疏)가 있었을까? 만약 있었다면 어떤 연유이고, 없었다면 무엇 때문일까?
2.
物과 物, 物과 人, 人과 人의 관계는 어떨까? 처음 서로의 존재를 전혀 인식하지 못하거나 인식할 필요도 없었을 때, 그들 관계는 어땠을까? 무관하면 무관하게 지내지 않았을까? 구태여 서로의 관계를 설정할 필요가 없었을 테니까.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무관하게 살면 그만이었을 것이다. 또 상관(相關)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살면 되니까.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데 무슨 관계 설정이 더 필요하겠는가? 그렇게 지냄이 편하고 좋았으리라. 지금도 가능하다면 그렇게 사는 게 삶의 참모습이 아닐까?
3.
하지만 달라진다. 특히 인간의 욕심과 욕망, 이해관계가 개재하게 되면 그렇다. 자기중심에서 좋아하고 싫어하며, 예뻐하고 미워하게 된다. 질투와 시기가 시야를 가리고, 경쟁과 다툼이 일상이 된다. 짧은 인생살이가 이래야 하겠는가? 이렇게 살다가 죽는다면 생이 너무 아깝고 억울하지 않겠는가?
4.
삶답게 살기 위해서는 욕심과 욕망을 버려야 한다. 누구나 알지만 어렵다. 어려우므로 자꾸 말하고 강조한다. 성장과 발전의 근본이란 말도 일리는 있지만, 부작용에 비하면 조족지혈(鳥足之血)이다. 큰 삶은 가급적 이해관계와 손익관계를 떠나야 한다. 그래야 세상살이에 평화가 깃들지 않겠는가? 쉽지는 않겠지만 노력은 할 수 있다. 그게 삶의 주류가 될 때 인생은 참다워지지 않을까 한다. 어떻게 살다 가기를 원하는가? 진중하게 생각해 보자. 최소의 욕망 충족으로 즉, 생명 유지선의 물질만으로 만족하는 삶이 그에 근접하지 않을까 한다. 그러자면 물질과 명예 등의 허상에 인생을 낭비하지 말아야 한다.
5.
삶은 생활 방식과 가치 기준에 따라 극과 극이다. 놀랍고 아름다운 삶을 그르치는 것은 외부 요인이 아니라 바로 자신이리라. 욕망만 줄이고 버리면 삶의 주변엔 따뜻한 이웃이 이웃하리라. 애증과 친소라는 단어는 없어지거나 의미를 잃을 것이다.
편집: 김태평 객원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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