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 정상 버스정류장 앞 광장에서 끊어진 성곽은 정상을 향해 이어졌다가 남산타워에서 다시 끊어졌다. 팔각정을 둘러싸고 내려가며 숭례문 방향으로 이어진다. 이 성곽을 따라 계단 길을 내려간다. 조금 내려가면 케이블카 정류장이 나온다. 자연경관이며 예스러운 정취에 거슬리는 건물이다. 볼썽사나운 건물을 뒤로 하고 내려간다. 잠두(蠶頭)봉이 얌전히 엎드려 있다. 봉우리가 ‘에머리를 닮았다고 해 부르는 이름이다. 그곳에 ‘남산 포토아일랜드’가 있다. ‘사진 찍기 좋은 곳’이라고 하지 않고 왜 외래어를 사용해 지점 표시를 하는가? 외국 관광객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인지 모르지만 유구한 역사가 숨 쉬는 현장에 달갑지 않은 외래어 표기는 몹시 거북하다. 이러다가는 민족의 주체성까지 훼손되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그곳에서는 서울 도심을 가깝고도 넓게 조망할 수 있다. 가까이는 회현동 자락 우리은행 본점이 보이고, 그 옆 필동 금호빌딩도 눈에 들어온다. 남산골 한옥마을, 남대문로 한국은행과 남대문 시장도 보인다. 경복궁, 창덕궁, 덕수궁도 보인다. 한마디로 내사산으로 둘러싸인 도심의 빌딩 숲이 한눈에 들어온다.

▲ 잠두봉 포토 아일랜드

남산골 한옥마을
1998년에 중건한 한옥마을은 서울 각지에 흩어져있던 한옥을 이전해 중건한 도시공원이다. 일제강점기에는 헌병대사령부가 있었고, 해방 후에는 수도방위사령부가 있었던 부지를 1989년 서울시가 매입해 공원으로 단장했다. 공원 전체 면적은 24,180평이고 한옥마을 구역은 2,400평이다. 이곳 한옥마을의 전통정원에는 그동안 훼손됐던 지형을 원형대로 복원해 정자와 연못 등을 짓고, 남산의 자연 식생인 소나무 등의 수종을 심었다. 계곡도 만들어 물이 자연스럽게 흐르도록 했다.

필동에서 들어가는 북동쪽 입구에는 조선의 마지막 왕비인 순정효 황후 윤 씨 친가, 순정효 황후의 부친인 해풍부원군 윤택영 재실, 도편수 이승업 가옥, 오위장 김춘영 가옥, 철종의 부마도위 박영효 가옥 등 조선 후기와 개화기에 건축된 가옥을 모아뒀다. 5채 모두가 민속자료 한옥이다. 한옥 지구 남쪽에는 서울 정도 600년을 기념해 타임캡슐을 묻었는데, 정도 1000년이 되는 2394년에 개봉할 예정이다.

▲ 남산에서 내려다본 서울 중심부. 왼쪽으로 서대문구 안산이 보이고, 오른쪽으로 종로구 인왕산이 보인다.

남산 딸깍발이
조선 시대 남산의 주거지는 청학동(靑鶴洞)이라고 하는 경치가 수려한 주택지였다. 지금의 필동과 묵동, 예장동 일대다. 일상을 지필묵과 함께하는 선비들이 사는 동네라는 의미로 붙여진 이름일 것이다. 일제강점기에는 그 범위가 점점 넓어져 회현동과 진고개까지를 일컫게 됐다.

지금의 가회동, 재동, 계동, 삼청동, 사간동 등을 이루는 도성 안의 북촌에는 현직에 있는 권세가들이 모여 살았다. 인조반정 후로는 주로 서인 계열의 대신들이 많이 살았다. 그중에서도 노론 세력이 주축을 이뤘다. 그러나 남산골에는 과거에는 합격했으나 보직을 얻지 못한 생원·진사들이 모여 살았다. 하급관리들도 그곳에 살았다. 또한 권좌에서 물러났거나 몰락한 남인 계열의 선비들이 주로 살았다. 남산골 선비들은 학문과 기개는 높았으나, 돈벌이가 없었으니 생활이 궁핍했다. 여러 번 꿰맨 헌 망건과 좌우가 뒤틀린 헌 갓을 쓰고 옷자락은 해져서 땟국이 꾀죄죄하게 흐르는 도포를 입은 핏기 없는 행색의 선비를 상상해보자. 그래서 가난한 선비들을 일컬어 ‘남산골샌님’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비가 오면 나막신을 신고 딸깍거리면서 돌아다닌다고 해 ‘남산 딸깍발이’라고도 불렀다. 일제강점기에 진고개라고 불렀던 곳은 포장되기 전에는 흙이 질퍽해서 선비들은 나막신을 신고 다녔다.

‘남산골샌님’이란 점차 비록 관직은 없지만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돈이나 출세에 연연하지 않는 고지식한 선비들을 일컫는 용어가 됐다. 그러다 보니 조정의 잘못된 정책을 비판하는 선비들을 지칭하는 말이 됐다. 요즘으로 말하면 시민단체나 재야세력과 같은 역할을 하는 선비들이었다. 그들은 청렴과 예의, 염치와 의리를 삶의 지표로 삼았으며 자존심과 지조가 생활신조였다. 글만 읽는 딸깍발이가 무능한 생활인이었을지라도 대의에는 강직하고 불의를 멀리했던 정신은 목전의 이익을 추구하는 데만 급급한 현대인들이 본받아야 할 덕목이 아니겠는가.

세월은 바뀌어 일제강점기엔 남촌의 시대가 찾아왔고 북촌은 몰락했다. 북촌 사람들은 화려한 남촌을 부러워하게 됐다. 세월의 무상함을 거기서도 느낄 수 있었다. 

포토아일랜드를 뒤로하고 계단 길을 내려오다 보면 성곽이 왼쪽으로 급격하게 꺾이는 지점이 나온다. 그곳에서 성곽과 길은 멀어진다. 구불구불 도는 길은 중간에 성곽과 잠시 만났다가 계단이 끝나기 전에 성곽과 이별한다. 계단이 끝나는 지점에서 성곽도 사라진다. 일제가 그곳에 조선신궁을 지으며 성곽을 훼손했기 때문이다.

▲ 남산 서남쪽 중턱에서 끊긴 성곽

조선신궁(朝鮮神宮)과 남산의 수난사
일제강점기 신사 건립은 전국적으로 행해져 1945년 8월, 해방 당시의 조선 신사는 조선 전역에 무려 1,141개가 세워졌다. 신사는 일본 신민화정책의 주 무대였기에 일제는 조선인의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그중에서도 일제가 가장 역점을 둔 것은 조선 식민지배의 상징으로 남산 중턱에 세운 신사다. 설립 위치는 남산의 한양공원. 즉 철거된 남산 식물원과 안중근 의사 기념관, 남산 도서관을 아우르는 자리로 정했다. 부지 확보가 끝나자 1920년 5월 27일 지진제(地鎭祭)라는 기공식을 하고 건립에 착수했다. 일본의 성지를 만들기 위해 조선의 영산인 남산은 무참하게 파괴됐다. 숭례문에서 조선신궁 앞까지 참배로를 내고, 숭례문에서 남산으로 이어지는 성곽을 허물어 찻길을 냈다. 지금의 소월길의 모태다. 시내에서도 전차가 신궁 밑을 지나갈 때는 모든 승객이 일어나서 묵념을 올려야 했다. 신궁 입구에서 정전이 있는 광장까지 오르기 위해 돌계단 384개를 놓았다. 이 계단의 흔적 중 하나가 2005년 방영한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에 나오는 삼순이 계단이다. 서울시 교육정보연구원(옛 어린이회관) 옆에서 백범광장으로 내려가는 긴 계단 역시 그 흔적이다. 그러므로 옛 어린이회관은 조선신궁 상광장 북쪽 끝에서 중광장으로 내려가는 가파른 계단을 따라 지어진 건물이다. 그 후 어린이회관은 능동 어린이대공원 내 한쪽으로 옮겨졌다.

127,900평에 달하는 총 부지에 일본 신사의 건축양식에 따라 정전(正殿), 배전(拜殿), 신고(神庫), 참배소(參拜所) 등 15개의 건물을 배치하고, 여기에 오르는 돌계단과 참도(參道)를 조성했다. 1925년 6월 27일 준공을 앞두고 신사의 명칭을 신궁으로 개칭했다. 신궁이라는 명칭은 조선에서 가장 높은 사격(社格)을 가진 신사(神社)라는 뜻이다. 여기에 그들의 건국신화의 주신인 아마데라스 오미가미(天照大神)와 조선을 병합하고 1912년에 죽은 메이지 왕의 신위를 안치했다.

그러나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자 조선신궁은 이튿날 오후에 승신식(昇神式)이라는 폐쇄행사를 하고, 9월 7일부터 해체작업에 들어가 10월 6일까지 마무리 지었다. 그때 신궁에 신물(神物)로 둔 거울만 비행기에 실어 일본으로 옮겼다. 그러니까 다른 곳의 신사는 한국 사람들의 손으로 파괴했으나, 남산 조선신궁은 일본인들 스스로 해체한 것이다.

이와 관련해 남산의 수난사를 돌아보며 한일 간의 역사인식을 새롭게 해보자. 남산의 수난은 일본과 관계가 깊다. 조선 초기부터 남산 동쪽 기슭에는 왜의 사신이 유숙하는 동평관(東平館)이 있었다. 임진왜란 때는 왜군이 남산에 진을 치기도 했다. 마시타 나가모리(增田長盛) 등 왜장이 살았다고 해 ‘왜 장터’라고 불렀는데, 그들의 진지가 지금의 정동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조일 수교(1882)이후 1884년에는 남산 기슭에 영사관을 지었고, 그 이후 일본공사관과 통감부, 총독부가 속속 들어섰다. 지금의 서울유스호스텔 자리는 일본 공사관과 통감관저였고, 서울애니메이션센터는 통감부와 총독관저가 있던 자리다. 총독부와 총독관저가 경복궁 안으로 들어가기 전까지 남산은 일본 식민통치의 중심지였다.

그와 동시에 지금의 예장동, 주자동, 충무로1가를 포함하는 진고개 일원이 일본인 거주지가 됐다. 그곳을 거점으로 일본인 거주지는 숭례문과 회현동, 명동, 을지로 쪽으로 확장됐다. 그 이전까지는 떵떵거렸던 북촌의 조선인들은 남촌의 화려한 일본인 상가를 보고 격세지감을 느꼈을 것이다.

남산 소나무의 수난사도 왜군의 침략과 궤를 같이한다. 임진왜란 때 예장동 일원에 왜군이 주둔하면서 남산의 소나무를 벌목하기 시작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이곳의 소나무를 베어내 신궁과 신사를 지었다. 일제는 그 대신 벚나무를 심었다. 조선 태조 이래 목멱산의 소나무가 무성해야 왕조의 정기가 산다고 하여 왕들은 남산의 소나무를 보호하고 관리했다. ‘남산 위에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바람 서리 불변함은 우리 기상일세’라는 애국가의 가사가 허언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남산에 소나무 숲을 복원해야겠다.

▲ 서울시교육정보연구원(옛 어린이회관) 옆으로 난 돌계단. 옛 조선신궁의 유물이다.

 

글 허창무 주주통신원/ 사진 이동구 에디터

허창무 주주통신원  sdm347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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