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례문의 수난과 중수
숭례문은 2008년 2월 10일에 화재가 발생하기 전까지는 임진왜란, 병자호란, 한국동란 등 전란이 있을 때마다 부분적으로 훼손되기는 했어도 전면적으로 파괴되지는 않았다. 다만 1907년 10월 26일 일본 황태자 요시히토(嘉仁, 1879-1926)가 한양을 방문할 때 북쪽 성벽을 헐었다. 이를테면 실권을 장악한 일제의 통감부가 한성의 얼굴을 상징하는 남대문을 훼손함으로써 명목뿐인 대한제국의 위신을 뿌리째 도려냈던 것이다.

태조 7년(1398)에 완공된 숭례문은 35년이 지난 세종 15년(1433)에 풍수지리설에 따라 문제가 있다는 얘기가 돌았다.

‘남대문 지대가 낮은 이유는 이곳의 땅을 파서 평평하게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땅을 높이 쌓아올려서 산맥을 잇게 하고, 그 위에 성문을 만드는 것이 어떻겠는가?’
세종은 숭례문 주변의 지대가 낮아 우백호의 기능이 약하다는 판단에 따라 인왕산과 남산의 지맥을 연결해 그 위에 성문을 다시 지으려고 했다. 그러나 당시에 수많은 공사로 물자가 달려 그 공사는 14년 후인 세종 29년(1447)이 돼서야 착공됐고 그 이듬해인 세종 30년(1448) 3월 17일에 완공됐다.

그 후 30년이 지난 성종 9년(1478)에는 성문이 기울어졌다는 판단 아래 숭례문 수리의 필요성이 제기됐다. 결국 다음 해인 성종 10년(1479) 4월 2일에 완공됐다. 두 차례의 중수 사실은 1962년 해체 수리 때 발견된 상량문에서 확인됐다. 불타기 전의 남대문은 태조 때 지은 것이 아니라 세종 때 지은 것을 성종 때 보수공사를 마친 건물이다.

제1구간 숭례문에서 소의문 옛터까지
이 구간은 어림잡아 600m 정도에 이른다. 1907년 숭례문 북쪽으로 맨 처음 성곽이 헐린 구간이다. 왕복 10차선 넓은 남대문로를 건너 대한상공회의소로 가다 보면 인도에 성곽이 지나간 자리를 표시한 판석이 있다. 그런 판석은 대개 복원이 불가능한 구간에 깔아놓는다.

지금 대한상공회의소 본관 자리는 일제강점기에 남대문소학교가 있던 자리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 이후 남대문 주변은 대체로 일본인 거주지가 됐고, 일본인 거류민단이 조직돼 그들을 위한 소학교를 건립한 것이 남대문소학교다.

▲ 대한상공회의소 앞 인도에 성곽이 지나간 자리를 판석을 깔아 표시했다.

남지(南池) 다시 보기
대한상공회의소 경계에 도착하기 전 우남빌딩 앞 보도에서 ‘남지(南池)’라는 표지석이 눈에 띈다. 조선 시대 관악산의 불기운을 끄기 위하여 팠다는 연못이다. 그런데 이 연못은 당쟁이 심할 때 남인(南人)을 상징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조선 중기 남인의 집권을 막기 위해 반대파 세력이 남지를 메운 일도 있었다고 한다. 그 못을 다시 복원하자 현종 때 남인 허목(許穆)이 득세했고, 정조 때는 남인 영수 채제공(蔡濟恭)이 집권했다는 이야기가 역사적 사실과 연관돼 전해진다.

▲ 남대문 밖에 있었던 남지 터(南池址) 표지석

편집: 정지은 편집담당

글 허창무 주주통신원/ 사진 이동구 에디터

허창무 주주통신원  sdm347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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