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산로(旺山路)와 그 입구의 각자성석

[한양도성 탐방기 7] 허창무 주주통신원 허창무 주주통신원l승인2015.03.15l수정2015.07.14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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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산로의 유래
동대문 북쪽 왕산로 건너 창신동 입구 성곽에 각자성석이 모여 있다. 먼저 왕산로에 대해 말해야겠다. 흥인지문에서 청량리역 교차로까지의 도로를 왕산로라 한다. 경북 선산이 고향인 왕산 허위(旺山 許蔿) 선생은 1895년 민비시해사건 후부터 의병을 일으켰으나, 고종의 밀지를 받고 의병부대를 자진 해산했다. 그 후 관직을 맡아 성균관 박사, 중추원 의관 등을 거쳐 1904년에는 오늘날 대법원장서리에 해당하는 평리원서리재판장이 되었다. 재판장 시절에는 불의와 권세에 타협하지 않고 공명정대하게 소송을 처리해 많은 칭찬과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1907년 헤이그밀사사건으로 고종이 강제로 퇴위되고, 8월에는 군대도 강제 해산되는 등 국권이 완전히 일제의 수중으로 떨어졌다. 군대해산은 의봉봉기의 도화선이 됐다. 왕산 선생은 1907년 9월 경기도 연천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 전국의 48개 의병부대의 집결체인 13도 창의군(十三道 倡義軍)이 조직되자 왕산은 이인영을 총대장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진동창의대장이 되었다. 1908년 1월 말, 그는 300명의 선발대를 이끌고 동대문 밖 30리 지점, 지금의 청량리 부근까지 진격했다. 그러나 본대가 도착하기 전 미리 대기 중이던 왜군의 공격을 받고 패퇴했다. 그 후에도 경기도 북부를 거점으로 활발한 의병활동을 벌였으나, 1908년 6월 일제가 그의 은신처를 탐지해 양평에서 체포했다. 그해 10월 21일 오전 10시, 왕산은 경성감옥(서대문형무소) 교수대에서 처형됐는데, 그곳에서 처형된 맨 처음의 사형수였다. 처형될 때의 모습은 당당했다. 죄를 심문하는 취조관도 의연한 선생의 모습에 감동해 함부로 대하지 못하고 존대했다고 한다. 후손들은 그의 유지를 받들어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계속했으나 거의 희생됐다.

국가에서는 그의 국권 회복과 독립운동을 기려 동대문에서 청량리까지의 길을 ‘왕산로’로 이름 짓고,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1호를 추서했다. 그렇다고 비명에 간 선생과 이국땅에서 처절한 삶을 살다간 그 후손들에게 얼마나 위로가 되고 보답이 될 수 있을까? 선열의 고귀한 얼을 되새길 뿐이다.

왕산로 입구의 각자성석
다시 각자성석으로 돌아가자. 정사각형의 반듯한 돌로 질서정연하게 쌓은 것으로 보아 한눈에도 이 구간의 축성은 숙종 때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른쪽 맨 위에 「一牌頭(일패두)」라는 각자가 보인다. 패(牌)는 오군영의 상급부대 단위고, 일패두는 그 부대의 부대장을 말한다. 그 옆의 「訓局(훈국)」은 훈련도감의 별칭이다.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태조와 세종 때는 군현으로 나누어 성을 쌓았으나, 숙종 때는 오군영에서 쌓았는데, 이 구간은 오군영 중에서도 훈련도감에 소속된 군인들이 보수공사를 했다는 표지다. 훈국 옆 「策應兼督役將十人(책응 겸 독역장 십인)」의 각자가 보인다. 책응은 공사를 기획하는 일을 말하고, 독역은 공사를 감독하는 일을 말한다. 그러므로 「책응 겸 독역장 십인」이란 공사를 기획하고 감독했던 장수가 10이란 뜻이다.

상단부에 각자는 이어진다. 一牌將(일패장) 折衝(절충) 成世班(성세반), 二牌將(이패장) 折衝(절충) 金守善(김수선), 三牌將(삼패장) 司果(사과) 劉濟漢(유제한)이다. 일패장, 이패장, 삼패장은 각각 1패 2패 3패 부대의 우두머리를 말하고, 절충과 사과는 무관의 직위로서 각각 정3품과 정6품 벼슬이다.

하단부 각자를 보자. 石手(석수) 都邊手(도변수) 吳有善(오유선), 一牌邊手(일패변수) 梁六吳(양육오), 二牌邊手(이패변수) 黃承善(황승선), 邊手(변수) 金廷立(김정립)이다. 변수는 목수나 석수 등 기술자들의 우두머리를 말하고, 도변수는 변수들의 우두머리를 말한다. 일패변수, 이패변수는 각각 일패 이패에 소속된 변수를 말한다.

끝으로 왼쪽 끝 위아래에 있는 「康熙(강희) 四十五年(사십오 년) 四月 日(사월일) 改築(개축)」이란 각자는, 그 당시 조선이 받들었던 청나라 연호인 강희 45년 4월에 개축했다는 것이다. 강희 45년을 조선 왕의 집권연도로 환산하면 숙종 32년(1706)에 해당된다. 사월 일에서 날짜가 빠진 것은 날짜를 쓰지 않는 당시의 관행 때문이었다.

글 허창무 주주통신원/ 사진 이동구 에디터

허창무 주주통신원  sdm347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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