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도성 탐방기 9] 허창무 주주통신원


왕산로 건너 흥인지문에 도착했다. 속칭 동대문이라는 별칭은 태조 때(태조 5년 9월 24일의 기사)부터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동대문’이란 표현은 174건이나 기록돼 있어 195건 쓰인 ‘흥인문’ 또는 ‘흥인지문’이란 표현과 빈도수가 비슷하다.

흥인지문은 청계천변에 있다. 인왕산과 백악산에서 흘러내린 물은 도심을 서에서 동으로 가로질러 청계천을 이룬다. 동대문 일대는 도성에서 가장 낮은 습지여서 성을 처음 쌓을 때부터 많은 애를 먹었다. 하천 양쪽에 홍수로 인한 퇴적층이 쌓여 범람원(氾濫原, flood plain)이 되었는데, 그 토양은 배수가 잘 되지 않는 점토질이다. 흥인문은 이 무른 점토질 토지 안에 돌과 나무때기를 넣고 세웠으나, 지반이 몹시 취약해 1398년 완공 후에도 여러 번 보수해야 했다. 건국 초기 세종, 문종, 단종 연간에 대대적인 보수공사가 있었고, 조선 시대의 마지막 대대적인 보수는 고종 때(고종 5년 1868~고종 6년 1869) 이뤄졌다. 이때는 성문 대부분을 해체하고 새로 짓다시피 했으므로 흥인지문을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목조건물이라 한다. 숭례문이 조선 초기의 대표적인 건축물이어서 국보 1호로 지정됐다면, 흥인지문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목조건축물로 인정받아 1963년 보물 1호로 지정됐던 것이다. 보수공사는 2005년부터 2007년까지도 계속됐다. 2013년 현재 옹성의 보수공사가 진행 중이다. 그러니 오늘날에도 조심스러운 눈길로 바라보게 된다.

태조 5년부터 7년까지 이 성문을 세웠을 때는 흥인문(興仁門)이라고 불렀다. 그러다가 세조실록에 흥인지문이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고종 때 만든 현판은 정사각형에 2줄의 세로글씨로 쓰여 지금까지 전한다. 흥인문의 이름에 ‘갈 지(之)’를 넣어 흥인지문이 된 이유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흥인지문 부근의 취약한 지반을 보강하기 위하여 용의 모양을 닮은 ‘갈 지(之)’를 넣었다는 속설이 전해질 뿐이다.

흥인지문의 문루는 숭례문과 같이 2층으로 돼 있다. 4대문과 4소문 중에서 다른 문들은 문루가 모두 단층인데, 남대문과 동대문 두 대문만 문루를 2층으로 지은 것을 보면, 그만큼 두 대문이 중요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문루는 숭례문과 같이 정면 5칸, 측면 2칸이고, 우진각 지붕에 다포식 공포를 조성한 건물이다. 두 문의 유사점은 또 있다. 흥인지문 홍예 천정에는 쌍용이 그려져 있다. 왕을 상징하는 것은 청룡이고, 왕세자를 상징하는 것은 황룡이다. 숭례문 홍예의 천정화도 쌍룡이다. 

흥인지문에는 다른 대문이나 소문에는 없는 옹성(甕城)이 있다. 옹성이란 성문을 공격하는 적을 방어하기 위한 시설로서 성 밖에서 성문이 보이지 않게 항아리 모양으로 성문을 에워싼 작은 성이다. 옹성을 쌓은 이유 또한 이  곳의 지대가 낮아 다른 성문보다 적의 공격을 방어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 문은 2중으로 쌓은 견고한 성문인데도 그 역할은 제대로 하지 못했다. 이를테면 임진왜란 때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 문으로 입성할 때 성문은 활짝 열려있었고, 방어하는 군사도 보이지 않았다. 왜군은 매복 작전이 아닌가 알아보려고 여러 번 정찰병을 보낸 다음에야 별 이상이 없자 당당히 입성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그때 ‘선조가 이렇게 튼튼한 성곽을 버리고 도대체 무엇이 무서워 북쪽으로 도망했는가?’ 하고 비웃으며 성문을 통과했다.

전차 도입과 서울 성곽 철거
처음 전차가 들어오게 된 것은 조선 황실의 자체적인 결정에 따른 것이었다. 고종은 민비가 묻힌 홍릉에 자주 다녔다. 참배행차 때마다 너무 많은 비용과 시간이 들어 이를 절약하려고 전차를 도입했다. 최초의 전차 도입은 이와 같이 외세의 강압이 아니라 조선황실과 미국 전차회사와의 공동투자로 이뤄졌다. 고종 36년(1899) 5월 전차가 개통되었을 때만 해도 성벽을 지키려는 계획이었기 때문에 흥인지문의 성벽은 헐리지 않았다. 돈의문에서 청량리까지 최초의 단선 선로였던 전차는 동대문 홍예 안으로 드나들었다.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을 계기로 고종이 일제의 강압에 의해 퇴위하고, 일본인들이 대한제국 각 부처의 차관으로 임명됐다. 그 조치는 완전한 국권상실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이를 기화로 순종 즉위년(1907) 내부차관에 임명된 기노우치 주시로(木內重四郞)가 성벽처리위원회 위원장이 됐다. 성벽처리위원회는 1907년 9월부터 숭례문 북쪽 성벽을 헐기 시작했고, 숭례문 밖 남지 연못도 매립했다. 때마침 그해 10월 16일 일본 다이쇼(大正) 황태자의 한양 방문이 숭례문 성벽 철거의 직접적인 이유가 되기도 했다. 일본 황태자의 체면상 홍예 안으로 머리를 숙이고 들어올 수가 없고, 대로로 당당하게 입성하겠다는 이유였다.

또 동대문 홍예 안으로 운행하던 전차가 접촉사고가 많으므로 좌우 성벽을 헐어 우회하도록 1908년 3월부터 동대문 성벽도 헐기 시작했다. 같은 해 9월에는 소의문의 성벽도 헐렸다. 광희문 양쪽의 성벽은 왕십리선 전차가 개설되면서 헐렸을 것이고, 혜화문의 성벽이 헐린 것은 앞에서 보았듯이 혜화동에서 돈암동까지의 전차길 개설 때문이었다.

이와 관련해 사적 하나가 있다. 흥인지문 광장 바로 옆 동대문호텔 앞에  가면 「경성궤도회사 터」표지석이 있다. 거기에는 ‘1930년부터 1961년까지 뚝섬과 광나루까지 경성궤도회사가 경영하던 궤도전차의 시발지. 이 협궤전차는 승객 및 물자수송, 교외나들이의 중요한 교통시설이었다’고 적혀있다. 지금의 지하철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을 금할 수 없다.

흥인지문이 숭례문과 함께 보존된 이유는?
‘한성신보’ 사장 겸 일본인 거류민 단장 나카이 기타로(中井喜太郞)는 숭례문과 흥인지문이 철거된다는 소식을 듣고 몹시 애석하고 마음이 산란했다. 조선의 대표적인 성문을 없앤다는 것은 너무나 큰 문화적 손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조선의 찬란한 문화유산인 두 성문을 지켜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인맥을 총동원하고 직접 찾아가기도 했으나, 철거론자인 하세가와 요세미치 사령관과 하야시 콘스케 일본공사의 마음을 돌릴 수 없었다. 그들은 막무가내로 두 성문을 보존해야할 근거를 대라고 다그치기만 했다. 그러나 그들을 설득할 묘안이 떠오르지 않아 애만 태우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갑자기 기발한 착상이 떠올랐다. ‘그래, 바로 이거야.’ 그는 다음 날 아침 그 두 사람을 다시 찾아갔다.

“숭례문은 임진년 조선 정벌 때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입성한 문입니다. 흥인지문으로는 고니시 유키나카(小西行長)가 쳐들어왔지요. 일본 승전의 관문이 아닙니까! 이것만으로도 숭례문과 흥인지문이 남아야 할 가치는 충분합니다.” 그의 말을 듣고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설득이 주효한 순간이었다. “그런 이유라면 숭례문과 흥인지문을 남길만하군요. 이 두 문을 없애면 조선 정벌의 이야기가 사라지겠어요.”

흥인지문과 숭례문은 그렇게 보존됐다. 광희문은 왜의 사신들이 동평관으로 드나들었던 문이어서 보존됐을 것이다. 그러나 일제와 아무 인연이 없었던 돈의문과 소의문, 혜화문 등은 별수 없이 철거되고 말았다. 일본의 장군들이 지나갔다는 이유로 보존된 것이 역사의 희극이지만, 어쨌든 국적을 초월하여 문화재를 보호하겠다는 한 문화인의 집념은 높이 평가할만한 일이다.

글 허창무 주주통신원/ 사진 이동구 에디터

허창무 주주통신원  sdm347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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