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정권시절의 또 하나의 유물

백악산 구간

-창의문에서 혜화문까지-

군사정권시절의 또 하나의 유물

창의문길을 건너면 길가 한편에 1‧21 무장공비 침투사건 때 순직한 최규식 경무관의 동상이 서있다. 1‧21사태는 1968년 1월 12일 새벽 북한의 특수부대인 124군부대 소속 무장공비 31명이 청와대를 기습공격하기 위하여 서울로 침입한 사건을 말한다. 당시 종로경찰서장이었던 최규식 총경은 미확인부대가 이동 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지프차를 타고 창의문 앞까지 달려왔다. 그는 다른 무기는 소지하지 않았고 허리에 권총만 찼다. 거기서 정체불명의 부대원들을 만났다. 그들에게 정체를 밝히라고 심문했다. 그때 시내버스가 전조등을 켜고 고개를 올라왔다. 이 정체불명의 부대원들은 이 버스가 최 총경을 지원하러 오는 지원부대인 줄 알고 그에게 바로 총격을 가했다. 그의 충성심이 총알받이가 되어 청와대를 지켰다.

▲ 최규식 경무관의 동상

청계천의 발원지

최 경무관의 동상에서 창의문으로 올라가는 계단 옆에 청계천 발원지라는 표지석이 있다. “이곳에서 북동쪽 백악산 정상 방향으로 약 150m 지점에 항상 물이 흘러나오는 약수터가 있으므로 이를 청계천 발원지로 정하였다.”고 적혀있다. 영조 36년(1760) 개천 준설 역사를 기록한 「준천사실(濬川事實)」에는 청계천 발원지를 “백악산 서쪽과 인왕산 동쪽 골짜기에서 흐르는 물은 백운동으로 흘러오다가 원줄기는 구불구불 남쪽으로 흐른다.”고 썼다. 「도성대지도(都城大地圖)」등 옛 지도에도 백악산 서쪽 창의문 부근을 개천 발원지로 표시하고 있다.

▲ 18세기 도성도에서 창의문 부분

그곳은 조선시대 청풍계(淸風溪)라고 부르던 곳으로 인조 때 우의정을 지낸 김상용이 살았던 집터 주변이다. 그 집터에는 「백세청풍(百世靑風)」이라는 글씨를 새긴 바위가 있다. 속기 떨친 자연 속에서 지조를 지키며 맑은 바람과 같은 삶을 누리고 싶다는 표현일 것이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 척화파의 주역이었던 김상헌(金尙憲)의 맏형이었던 그는 병자호란 때 인조의 비빈들과 왕자들(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을 모시고 강화도로 피난했으나 강화도가 청군에 함락되자 그곳에서 자살했다.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세도가문인 안동김씨는 장남인 김상용(金尙容)의 넷째 아우인 김상헌(金尙憲)으로부터 실질적으로 시작되었다. 인조 때 좌의정까지 지낸 김상헌의 후손에서 13명의 재상과 수십 명의 판서, 참판이 배출되었고, 순조에서 철종까지 3명의 왕비와 숙종의 후궁 영빈 김씨가 그의 후손이었다. 그들 형제의 거주지가 서촌이었으므로 서촌은 조선후기 세도정치의 주무대였다고 말할 수 있으나, 조선후기 세도정치의 폐해는 국운을 좌우할 정도로 컸던 것도 사실이다.

이제 창의문(彰義門)에서 백악산 정상을 올라 혜화문까지 내려가는 여정을 일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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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허창무 주주통신원, 사진 : 이동구 에디터

편집 : 박효삼 편집위원

 

허창무 주주통신원  sdm347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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