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암동 산기슭을 산책하다

부암동의 관할 법정동은 부암동(付巖洞), 신영동(新營洞), 홍지동(弘智洞) 등 3개 동으로 이루어져있다. 이 중에서 백악산자락에 해당되는 곳은 부암동 일부와 창의문, 백석동천 인근이다.

부암동의 동명은 인왕산의 부침바위(付岩)에서 유래되었다. 이 바위에 다른 돌을 자기 나이만큼 문지르다 손을 뗐는데도 돌이 붙어서 떨어지지 않으면 사내아이를 낳는다는 전설이 있다. 이 때문에 많은 부인들이 작은 돌을 붙이려고 애쓴 탓에 그 표면에 벌집이 송송 뚫어진 것처럼 오목오목한 자국이 생겨서 부침바위라는 이름이 붙었다.

부암동은 안평대군이 꿈에서 본 이곳이 중국의 무릉도원(武陵桃源)처럼 생겼다고 하여 무계동(武溪洞)이 되었는데, 그가 쓴 ‘武溪洞(무계동)’이라는 각자가 지금도 남아있다. 그는 이곳을 무계정사(武溪精舍)라 하여 학문을 닦고 무예를 기르는 곳으로 삼았다.

▲ 부암동의 ‘武溪洞(무계동)’ 석각

이곳의 문화재로는 무계정사(서울시 유형문화재 제22호) 외에도 석파정(서울시 유형문화재 제26호), 윤웅렬 별장(서울시 민속자료 제12호)등이 있고, 325-2번지에 현진건 집터가 있다.

▲ 석파정
▲ 석파정 별당 안내문
▲ 현진건 집터 표지석

창의문을 보고 곧장 백악산 성곽길로 오르기 전에 창의문 밖 부암동을 둘러보는 것도 재미나는 일이다. 부암동은 몇 년 전까지는 소도시의 변두리 동네처럼 조용한 산골동네였다. 고개 하나 사이인데도 청운동과 부암동의 마을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지금은 여기에도 군데군데 개발의 바람이 불고 있다. ‘북촌’에 이어 ‘서촌’이 뜨더니 이젠 부암동까지 들먹거리는 것은 대중들에게 소구력이 강한 텔레비전 덕분이다. ‘커피프린스 1호점’이라는 텔레비전 드라마 촬영지가 여기 ‘전망 좋은 집’이었기 때문일까? ‘전망 좋은 집’에서는 창의문에서 백악산마루로 올라가는 성곽길을 가장 잘 조망할 수 있다.

▲ 커피프린스 1호점 TV드라마 촬영장 카페 ‘산모퉁이’

창의문 고개를 넘으면 커피 미식가들에게 잘 알려진 ‘클럽 에스프레소’라는 커피점이 이 동네 손님을 반기듯 얼굴을 내민다. 거기서 조금 더 올라가면 ‘자하손만두’라는 소문난 맛집이 있다. 그러나 우리들의 목적지는 다른 곳에 있다. 바로 ‘환기미술관’이다. 그곳에 가려면 ‘동양방앗간’ 옆을 지나야한다. 방앗간, 요즘에도 이런 방앗간이 있다니, 감회에 젖는다. 방앗간 벽돌에 붙은 친절한 이정표를 따라 환기미술관을 찾아간다.

▲ 부암동 입구의 ‘클럽 에스프레소’
▲ 동양방아간

김환기의 미술세계

환기미술관과 김향안

환기미술관은 화가 김환기(金煥基, 1913-1974)를 기념하기 위한 미술관이다. 그가 죽은 후 재미 건축가 우규승이 설계하여 그의 아내 김향안이 세우고, 1992년 11월 5일 개관했다. 이 미술관은 본관과 별관으로 나뉘어있다. 본관은 지상 3층 건물로 3개의 전시실과 사무실, 수장고, 도서실 등으로 되어있다. 본관 1층과 3층 전시실은 김환기 기획전 및 기타 기획전시에 사용되고, 2층 전시실은 김환기 작품 중 100호 이상 대작의 상설전시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별관은 지하 1층, 지상 2층 건물로 1층은 카페테리아와 아트샵을 겸하여 사용하고, 2층은 기획전 전용전시실로 사용한다.

▲ 환기미술관

김향안(金鄕岸, 1916~2000. 2. 29)은 김환기와 결혼하기 전 시인이며 소설가인 이상의 아내였다. 그러니까 그녀는 현대문학과 현대미술에 큰 획을 그은 두 사람의 예술가와 부부의 연을 맺었던 것이다. 그녀와 결혼한 이상이 결혼 후 3개월 만에 일본으로 건너가 이듬해(1937) 뇌출혈로 사망하자 7년 뒤 김환기와 재혼했다. 본명은 변동림(卞東琳)으로 이상의 한평생 친구 구본웅의 이모이다.

김환기 생애와 미술의 시대별 고찰

수화(樹話) 김환기는 전라남도 신안군 안좌면 읍동리 출신으로 1936년 일본대학 미술과를 졸업했다. 대학시절인 1934년 아방가르드 미술연구소를 만들고 추상미술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1952년에 홍익대학교 교수로 취임하여 미술학부장과 학장을 지내면서,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심사위원, 대한미술협회 회장, 한국미술협회 이사장 등을 맡기도 했다. 1965년에 상파울루비엔날레의 커미셔너로 출국한 뒤 미국에 정착하여 뉴욕에서 작품 활동을 했다.

그의 작품경향을 시대별로 살펴보면, 일본에서의 수업시대는 추상미술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1937년 작품 ‘향(響)’과 1938년 작품 ‘론도’ 등에서 시도된 기계의 찬미 등에서 미래파적 요소와 구성주의적 색채를 보여준다.

광복 이후 부산 피난시절을 거쳐 파리로 건너가기까지의 시기는 한국적 소재로 일관되었는데, 달과 구름과 학 그리고 나목(裸木) 등을 통하여 한국적 풍류와 시적 정서를 표출하려고 했다.

셋째 시기인 파리에서 돌아와 미국으로 건너가기까지의 서울시대는 파리시대의 지속으로 구성이 단순해지면서 상징적 요소가 더욱 짙게 내포되기 시작했다. 하나의 긴 수평선으로 상징되는 강이라든지, 중첩으로 상징되는 산, 그리고 몇 개의 사각점획들로 대변되는 풍경가운데의 점경(點景) 등이 상징적이면서 풍부한 공간해석으로 이끌어갔다.

미국으로 건너가 사망할 때까지 약 10년간의 뉴욕시대는 지금까지의 경향에 비하여 커다란 변모를 보였다. 점과 선이 무수히 반복되어 찍혀진 점묘는 추상공간의 무한대의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이 시기의 대표작은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리’가 있다.

작품세계 요약

그의 그림은 민족을 상징하는 근원적인 표상을 지니고 있다. 또한 그의 예술은 현재의 것과 전통미를 동시에 표현하고 있다. 말하자면 고대동양예술과 현대서구예술을 조화시킬 줄 하는 안목을 가졌던 것이다. 순수한 백자항아리에 매화나무 가지가 가로 세로 화면을 가득채운 그림들이며, 푸른 바탕에 새들과 꽃들로 구성된 소품들은 상징과 기호의 가치를 갖는다는 점에서 서양예술과 공통점을 보이면서도 그가 얼마나 한국의 자연과 한국의 옛 문물을 사랑하고 그리워했는지를 여지없이 보여준다. 이런 성향은 파리에 있을 때나 뉴욕에 있을 때도 변화는 있었지만, 그 근본동기와 사상은 변함없었다.

달, 산, 항아리, 학, 매화 등의 소재로 한국적 정서를 양식화한 점에서 그는 진정 한국화가이다.

글 : 허창무 주주통신원, 사진 : 이동구 에디터

편집 : 박효삼 편집위원

허창무 주주통신원  sdm347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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