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충', 세계의 명화1위
세계의 명화 ‘기생충’과 작품에 있어서의 사상의 중요성
음울한 시대... 왜 기생충인가
지구촌 깡패자본주의가 낳은 슬븐 우화이자 전복적 환타지를 보여주는 유쾌한 패러독스...
다덜 보아서 알다시피, 영화 기생충은 모두에게 불편한 영화다. 약자(기생충)에게는 자신들의 민낯을 보게하고, 강자(숙주)에게는 끔찍한 전복의 기억을 떠오르게 하기 때문이다-이는 비단 우리들만이 아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생충이 하나의 정치적 무의식으로 계층 대립이라는 불편한 사회적 주제를 건드리고 있다는데 하나의 문제작으로서의 기생충의 위상이 있다고 보여진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21세기 세계 100대 영화 1위에 선정되었음을 알리는 뉴욕타임즈 기사(2025. 7. 8)
자, 그렇다먼 대체 이렇게 불편한 기생충이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쿵쾅거리게 하고 전세계인의 관심을 받게 된 이유는 머란 말인가 이걸 좀 밝혀 보자.
걸작 ‘기생충’의 탄생 배경으로 우리는 촛불민심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국민의 삶은 아랑곳 하지 않고 국정을 농락하고 가진자(재벌)와 짝패가 되어 그간의 수출주도형 정책으로 국민의 피와 땀, 노동의 댓가를 쥐어짜던 이명박근혜의 반국민정부가 무너지고 새로 들어선 국민정부는 당연 친-국민 정책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바로 ‘소득주도성장income-lead growth’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온 최저임금제/최저시급제였다. 무론 충분한 준비와 숙의를 거치지 모한 미숙한 정책이라지만 민생을 우선시하는 정부의 뜻 깊은 처사였다. 예상한 대로 재계와 기득권, 세칭 우파의 반발은 거세지고 정부의 정책은 미끄럼을 타기 시작했다.
갈수록 거세어져만 가는 노동강도와 팍팍한 경제 현실...
그것은 깡패자본주의gangster's capitalism, 흡혈귀자본주의vampire capitalism, 외주자본주의outsourcing capitalism라는 개념이 일상화된 것처럼, 이 시대 신자유주의로서의 현존 자본주의의 지형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런 가운데 지하철 알바생의 비극이 있었고, 열병합발전소의 투쟁이 있었고, 김용균의 처참한 죽음이 있었다.
쇠파이프도 엿가락처럼
휘어진다는 악마의 벨트!
등짝이 까맣게 타버린 채
탄가루 뒤집어쓰고 죽은 용균아!
악마의 벨트에 빨려 들어간 몸.
머리와 몸통이 두 동강 난
처참한 순간!
어둠 속엔 도와줄 이
아무도 없었구나!
뼈가 으스러지는
고통 속에서 죽어갔을 용균아!
쿨럭쿨럭 쏟아진 붉은 피
탄가루에 뒤섞여 까맣게 흔적도 없이
외롭게 죽어갔을 내 아들아!
......
- 하성환 님의 ‘고 김용균’ 추도시 중에서
자, 여기서 우리는 어머니의 절규를 보먼서 새삼 예술의 기능을 생각하게 된다. 대중의 눈을 멀게 할 것인가 뜨게 할 것인가. 바로 여기에 예술의 마취기능과 각성기능의 분기점이 있다. 그리하여 대중적 오락이라는 유희적 기능을 무시할 수 없는 주류상업영화들이 우파들의, 가진자들의, 기득권의 눈치를 보먼서 국뽕으로 국민대중들의 눈을 멀게 하고, 누아르로 조지며 폭력을 물타기 하고, 근거없는 환타지로 현실에 눈을 돌리고 있는 영화계의 현실을 놓고 볼 때, 하나의 ‘문제적problematic’ 작품으로서 영화 '기생충'이 차지하는 지점은 무엇인가.
잘 알다시피 민족주의가 우파의 샘으로 기능하고 있는 것은 역사 이래 오랜 주제다. 가령, 그리스 민족주의 신화를 재현하고 있는 호메로스 대서사 <일리아스>의 핵심은 다음에 있다.
“최선의 새 점은 오직 하나뿐, 조국을 위해 싸우는 것이오.”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명박근혜 정부 들어서 가장 많이 다루어진 주제가 바로 민족영웅(세종, 이순신, ‘밀정’ 류의 항일서사물 등)만들기였다. 아, 달콤한 민족이여! 우파의 젖줄이여!
그러나 영화 '기생충'은 달랐다.
거기서 봉준호는 상하-빈부격차가 엄존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돼지같은like pigs 반지하층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그러진 삶을 곱등이, 또는 바퀴벌레와 같은 기생충에 탁월하게 비유하고 있다. 즉 곱등이, 바퀴벌레가 숙주인 인간에 빌붙어 살고 있듯이, 반지하에서 살아가는 가지지 모한 자들the have-nots 또한 숙주라고 볼 수 있는 가진자들the haves에 빌붙어 살고 있는 이 시대의 개슬픈 우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데 기생충의 특별한 지점이 있다.
개인적으로 볼 때, 이 영화는 하나의 문제작으로, 왜냐하먼 거기 기생충으로 환유되고 있는, 생존의 위기에 극한으로 내몰린 사회적 약자들의 위험하고 불안한 삶을 고발한다고 볼 수 있는, 가진 것이 없어 알바이트 노동을 하고 있지만, 그러나 이마저도 박탈되고, 그리하여 살기 위해서는 그야말로 어쩔 수 없이 기생충처럼 가진 자들(숙주)의 먹이를 노리며 빌붙어 살아갈 수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는 브리크bleak한 자본주의 사회의 실상을 리얼하게 터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하나의 상징으로 인간의 몸속에 기생하며 사는 회충이나 촌충처럼, 꼭 그처럼 상류층 가정의 지하밀실에서 기생하고 있는 등장인물들이 끊임없이 모스Morse 부호를 긴급 타전하는 형식을 통해 자본주의의 위기를 넘어 종언end을 예고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이 작품이 한국을 넘어 세계인의 공감을 얻고 있는 것은 이 순간 최고의 새 점 鳥占은 조국을 위해, 즉 그 누군가를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저 암흑 같고 지옥 같은 지하현실에서 벗어나는 것이라는, 즉 나의 생존이 긴박한 현실적인 문제라는 사실을 마치 사이렌이 울리듯 하나의 앙띠 까삐딸리즘으로, ‘반자본주의anti-capitalism’에 대한 경고메시지가 전지구적인 공통 이슈라는 사실을 진실하고 설득력 있게 미적(은유)인 접근법으로 잘 보여줬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좀 지적으로 말한다먼 기생충은 반-플라톤적인 작품이다. 왜냐하먼 플라톤주의는 분류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인데, 그리하여 원본과 복사물, 모델과 시뮬라크르가 계열화되듯이, 꼭 그처럼 숙주와 기생충이 하나의 계층적 질서를 정당화시키는 지적 기제로서의 플라토니즘...
오늘 신화, 환타지가 대중문화의 매트릭스로 기능하고 있는 이때-그것은 머 경제적 현실이 매우 암울하기 때문이고, 이 암울한 경제적 현실을 기호화하고 있는 대중서사로서의 신화, 환타지물의 주인공들이 대부분 고아(해리포터), 난장이(반지의 제왕), 유령(오페라의 유령)이고 또한 이 시대 학대받는 지하 저층의 언더들의 삶에 천착한 도스또예프스키와 카프카의 주제가 분신이고 변신인 이유로 그들이 지금도 끊임없이 호명되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즉 삶이 찢겨져 있는 만큼이나 대중들의 의식은 균열되어 있다. 아니 갈수록 교묘하게 옥죄어 오고 있는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중들은 마치 스트롱하게 강펀치를 얻어맞은 삼식이처럼 찌그러져 있다.
......
바다에는 늘 조류가 빠른 암초 지역이 널려 있고
삼식이의 사냥 습관은 오직 외로운 야행성뿐이다.
추운 겨울에는 깊은 곳으로 이동해야 하고,
따뜻한 봄에는 얕은 곳으로 이사를 해야 하는데,
셋방살이 십 년에 반 지하 단칸방을 전전하는
저서생물(底棲生物)이 된 삼식이를 보며 나는 수족관을 응시했다.
몇 순배의 잔을 돌리기 전에
삼식이는 자신의 서러운 내장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나무도마 위에서 식칼에 등짝이 찍혀 비틀거리다
미처 뱉지 못한 울분이 가득 찬 누런 알을 왈칵 쏟아내더니,
일당으로 벌어들인 새우와 갯지렁이를 꾸역꾸역 바닥에 토해낸다.
그러자 마침내 보기 좋게
낮은 시궁창으로 꼬리를 감추고 도망가는 작은 물고기들.
- 하재일 님의 ‘해후’ 중에서
그리하여 깡통처럼 찌그러진 일상을 견디며 살아가고 있는 그들이 전복을 꿈꾸고 해피엔딩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 뉴욕타임즈의 선정 이유문에서 볼 수 있듯이, 기생충은 부자와 빈자의 이야기를 담은 이 시대의 우화로, 신자유주의의 황폐한 현실에 대한 격렬한 비난이다 중요한 것은 그가 전통에 얽매이지 않는 장르의 대가로 이것을 매우 재미있게 비틀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 전체적으로 보아서 하는 말이지만, 기생충이 폭넓은 코미디와 날카로운 풍자를 유연하게 오가며 전개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니 우리는 마치 바퀴벌레처럼 주인을 피해가먼서 피를 빨고 있는 기생충들의 약삭빠른 이미지들을 보먼서 나 또한 그들과 결코 다르지 않게 살아가고 있는 존재임을 화들짝 깨우치게 된다. 그렇다. 기생충은 영화예술의 본래적 기능에 충실하게-대중적인 재미와 각성기능을 잘 아우르먼서-내 앞에 던져져 있다. 자본주의 일상에 처한 사회적 약자의 삶을 매우 리얼하게(또는 봉테일허게)반영하고 있는 작품으로.
이 런 기생충은 구조적으로도 매우 뛰어난 영화적 독법을 요구한다. 그러니까 하나의 기호적 대상으로 기생충은 ‘통념doxa’에 ‘역설paradox’이 대응하듯이, 꼭 그처럼 ‘숙주site’에 ‘기생충parasite’이 대응한다. 다시말해 ‘착한good’ 통념이 반복이고 재현이고 모방이고 어설픈 코스프레 좆털기라먼, ‘나쁜bad’ 역설은 하나의 차이이고 재구이고 찢기이고 배반의 입맞춤이다.
-장르를 넘나드는 대가다운 기법으로 부자와 빈자의 이야기를 유쾌하먼서도 날카로운 풍자로 오스카를 쥐고 흔들었다는 뉴욕타임즈의 '기생충' 해설 부분
구조주의뿐이 아니다. 기생충은 포스트모던적 일상에 대한, 근대 서사에 대한 유쾌한 조롱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니까 하나의 키워드로서 기생충이 복잡한 기호적 문법을 지니먼서도 거기 끊임없이 나를 자극하는 워딩은 바로 ‘계획’이라는 일상어로서의 신화적 빠롤이다.
“아들아! 너는 계획이 다 있구나!”
무기력한 아버지(송강호 분)가 감격적으로 내뱉는 이 말은 대단히 이중적이다.
“너는 계획이 뭐냐”
라고 못미더워 던지는 마누라(장혜진 분)의 투정 속에서도 우리는 계획을 세우고 장미빛 미래를 그리고 살고 싶은 희망과 함께 이미 다 틀렸다는 절망이, 근대기획에 대한 비틀기가 기호화 되어 있음을 본다. 그러니 그들이 꿈꾸는 계획은 계획이 아니라 하나의 기도try이다. 숙주의 피를 빨아야 한다는 전복의 기도 말이다. 그러나 전복은 또 다른 전복(기생충2)을 만나먼서 엉망진창이 되고 ‘무계획이 최고’라는 아버지의 자조로, 아들의 유쾌한 웃음으로, 예의 해피엔딩으로 페이드 아웃된다.
전세계에 극우far right 바람이 불고 있는 지금, 전복적-무론 영화는 유쾌하고 밝은 영화적 미장센으로 넘치고 있지만-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기생충의 메시지는 분명 도전임에 틀림없다. 전통적인 우파의 승리의 서사를 옹호해온 아카데미도 무너졌다니... 웃기되 웃기지 않는, 아니 웃으먼서 웃을 수 없는 영화! 영화 ‘기생충’은 지구촌 깡패자본주의 시대가 낳은 이 시대의 슬븐 우화이자 전복적 환타지를 보여주는 유쾌한 패러독스가 아닌가.
이렇게 전세계를 놀라게 하고 있는 한국 영화 ‘기생충’(감독 봉준호)을 다시 생각해보니 영화적 재미를 선사하는 기술적 요소와 더불어 사상이, 영화의 주제를 형성하는 감독의 세계관이 중요한 기둥이 되었음을 본다.
봉준호는 그지같은 구정권에서 민노당원으로 블랙리스트 대상이었음을... 그러니까 가진자들과 지배 권력의 곱지 않은 시선과 압력 속에서도 꿋꿋하게 견디며 사회적 약자를 지지하고, 그리하여 그가 허접한 국뽕 상업영화의 대열에 합류하지 않고 자신만의 고유한 '봉스타일'’을 지키고 ‘봉산맥’을 유지해 올 수 있었던 힘도 바로 그의 탄탄한 세계관에서 나왔다. 즉 우리는 기생충을 통해 다크한 한국적 자본주의의 현실에 대한 객관적이고 대중적인 인식이 봉준호 감독 특유의 창작 모티프와 영화적 밑감이 되었음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끝간데 모를 이윤 착취와 비인간적 대우로 말기적 증상을 드러내고 있는 현단계 자본주의의 양상으로, 불평등과 빈부격차에 따른 사회적 불만과 분노가 전세계적이라는 점과도 통하는 것으로, 이것은 작가의 소명의식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 아닌가. 이는 그대로 예술창작에 있어서의 사상의 중요성과 관련된 부분이 아닌가. 작가적 소명도 사상적 ‘소신credos’이 없으먼 빛을 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상이 얼마나 중요한 지는 소설 <삼국지>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거기, 도탄에 빠진 백성을 적으로 보고 망해가는 후한을 구하것다고 일어선 세력이 유비와 그 일당들이었다. 반면 조조는 백성을 구빈하고 호족들을 척결, 겸병의 폐해를 줄이는 등 민본을 기본으로 했기에 천하민심이 그에게 돌아갔다.
봉준호의 개가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특히, 기생충이 빈부격차가 가장 심한 자본주의의 모국 미국에서 가장 열광적인 지지를 얻고 있는 이유도 바로 거기 하나의 계급적 분노로서의 환타지로 자신들이 말하고 싶은 미국 기층 민중들의 전복적 서사를 대변했기 때문이라 할 것이다. 왜냐하먼 환상이란 문화적 속박으로부터 야기된 결핍을 보상하려는 특징을 지니기 때문이다(로즈메리 잭슨, <환상성>).
봉준호의 부상-그는 진정 승리자다. 아카데미는 이미 로칼 행사에 불과하다는 봉감독의 예리한 비판에at the scathing critique이념적 기초가 무너졌다. 그는 지방 영화제에 불과한 아카데미를 세계 영화제로 만드는데 오히려 기여했다-은 단순히 영화기술만의 문제도, 내외의 비판에 배타적이던 아카데미가 다양하고 포용적인inclusive 기류로 바뀐 문제만도 아니다.
몸을 일으키는 것은 뜻이다.
나는 그렇게 보았다.
한겨레신문 주주 되기
한겨레:온 필진 되기
한겨레:온에 기사 올리는 요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