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대신리 신우회사건

1933년 완도면 대신리 김병규 중심의 비밀결사 ‘신우회’ 사건이 터졌다.

이 비밀결사는 조직하여 그간 꾸준히 활동하여 왔다.

이 비밀결사대는 대신리 사는 이응길, 허치성, 장명재, 이정인, 이일봉 등이 김병규를 중심으로 조직하였다.

이 조직의 수장은 김병규로서 김병규는 소안의 배달청년회 사건에 연루되어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 6월을 받은 바 있고 수의위친계의 구성원으로서도 활약했던 맹장이다. 김병규는 스스로 설립한 대신학원과 유치원에서 경제학 강좌를 개설하고 이 조직 구성원들에게 사회경제제도의 변천사를 강의했다.

“인류역사의 발전법칙으로 보아 일본제국주의는 필연적으로 망한다“는 소신을 가지고 항일운동을 지도했다. 또 15세 아동을 대상으로 국어교육을 시켜 민족혼을 심어주었다. 1928년 1월 5일 위 유치원에 모여 비밀결사 대신리 신우회를 조직하던 날은, 첫째 농민 본위의 신사회를 건설하자, 둘째, 약자를 원조하고 강자를 배척하자. 셋째, 빈자를 친애하고 부자를 부인하자는 등 강령을 작성하였다.

이런 활동을 한 이유로 치안유지법, 보안법 위반의 혐의로 검거 된 이들은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김병규 징역 5년, 이명래(일명 응길) 2년, 정명재 징역 2년, 이정인(일명 정석) 징역 1년 6월, 허치성 1년, 이일봉 1년의 징역형을 받았으나 이에 불복하고 대구복심법원에 상소하였다.

1933년 5월 22일 대구복심법원은 김병규(44) 징역 2년, 이명래(26) 징역 1년 6월에 집행유예 3년, 호치성(25), 이정인(21), 이일봉(24)는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 소안도 여객선 사진은 만세호다. 대한호. 민국호, 만세호란 이름의 세척에 배가 다니고 있다.

13. 완도청년동맹과 완도노농총동맹의 활동

1919년 3.1운동 후 국내에 들어오기 시작한 사회주의 각파의 움직임은 항일운동 노선에 일정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1920년 고려공산당이, 1921년 서울청년회가, 1922년 무산자청년회가, 1923년 일본 유학생 중심의 북성회가 조직되어 각 파간에 파장이 일어나자 이 파쟁을 지양하고자 1924년 단일한 조직으로서 조선청년총동맹이 결성되었다. 군 단위 조직으로 완도청년동맹이 있었다. 그리고 이 조직과 같이 1924년 중앙에 조선노동총연맹이 조직되는데, 이 조직은 1920년에 조직된 조선 최초의 노동자조직인 조선노농공제회의와 조선노동대회의 두 단체를 합쳐 조직하였다.

이 조직은 회원의 노동문제만 다루어오다가 뒤에 농민문제를 다루게 되었다.

조선노농총동맹의 계통조직으로서 도 단위에 전남노농연맹이, 군단위에 완도노농총동맹이 조직되었다. 중앙의 이 두 조직을 중심으로 한 움직임은 완도의 항일운동 조직에 큰 영향을 주었다.

1923년 3월 24일~31일 사이에 서울청년회 주도로 개회되었던 전 조선청년당대회에는 전국 94개 단체 150명의 대표가 참석하였는데 완도에서는 소안의 배달청년회 소속인 강사원, 신동희, 신우승이 참가하였고, 금일도에서는 금일청년회 소속의 임홍기가, 완도공제회에서는 이광우, 정인주가 각각 참가하였다.

또 강사원은 이 조직의 기관지 <청년당> 창간 발기인으로도 참가하였다.

1923년 4월 20일 완도에서는 완도청년연합회와 완도무산청년회가 동시에 조직되었다. 완도청년연합회는 심만희가 중심이었고 완도무산청년회는 김병규가 중심이었다. 그런데 같은 날 두 단체가 따로 조직되었던 것은 분열이 아니라 역할의 분담이었다.

신만희나 김병규는 청년노동운동에서 항상 송내호의 지도노선에 따르고 있었으며, 그 후 활동과정에서 행동을 같이하고 있었다. 이 두 단체는 열렬한 항일운동을 전개해나갔다.

가령 1925년 2월에 개최한 완도무산청년회 임시대회에서는 다음과 같이 결의한다.

1, 해방에 필요한 의식을 갖기 위하여 강연회, 독서회, 토론회를 실시한다.

2, 타협적 민족운동을 박멸하자.

이러한 결의는 소안노농대성회사건의 재판이 진행 중에 있었음에도 그전보다 더욱 강경한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또 이 두 단체는 1927년 완도청년동맹(위원장 신광희)으로 통합된다.

이제 조선노농총동맹 쪽을 보기로 하자. 이 조직의 창립대회가 있던 1924년 4월 18일 서울에 167단체 대표 204명이 출석하였다.

이 대회에서는 노동문제, 동척이민문제 등이 의결되었고 계급해방을 위한 반제운동을 실천 할 것 등 3개항의 강령을 체택하였다.

이 운동은 전남지방의 암태도(신안군) 소작쟁위, 무안농민투쟁을 몰고 왔었다.

이 창립총회에서 중앙집행위원 50명을 선출하였는데 완도에서는 최형천(소안도)이 선출되었다. 그런데 이 조직은 1925년 11월 19일 노동총동맹과 농민총동맹으로 분립할 것을 결의하였고 1927년 9월 7일 그 실행에 들어갔다.

노농총연맹이 결성 될 때 그 강령에서 ‘노농계급의 해방과 신사회 실현’을 표방한 것이 일제의 탄압을 불러드리게 되었으므로 이를 피하기 위해 다시 노.농을 분리 시켰던 것이다.

그런데 분리된 조선농민총동맹의 중앙위원 20명 중 완도의 신준희(소안도)가 뽑혀 활약을 하였다. 이 두 단체를 뿌리로 한 계통조직과 또는 변형된 여러 단체의 이름으로 조직된 항일단체들은 그때그때 격렬한 항일운동을 계속하였다.

1927년 9월 10일에는 완도청년동맹 주최의 강연회를 금지하고 위원장 신광희를 검속하였으며, 9월 12일에는 신간회 주최 강연회를 금지하였다.

이에 신간회 군 지부 정무간사 정학균이 서장을 상대로 전말을 따진 일이 있었다. 한편 나봉균, 신준희, 임재갑 중심의 완도노농조합운동과 김영현 중심의 소비조합운동, 송내호 중심의 재경완산학우회 등은 종횡 간의 연대로 이어지고 있었다.

편집 : 김태평 객원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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