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문제연구소와 한국작가회의 자유실천위원회 공동으로 열어
10월 6일 오후 1시부터 6시까지 세종문화회관 예인홀에서 한국작가회의 자유실천위원회와 민족문제연구소 공동 주최로 '친일문인기념문학상 이대로 둘 것인가'라는 주제로 세미나를 열었다. 이 자리에 70여 명의 문인들과 문학평론가 등이 참석해 열띤 토론을 벌였다.
문학평론가인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은 기조 발제를 통하여 동인문학상이 왜 폐지되어야 하는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발표를 하였다.
"분단 한국 문단은 조연현-김동리가 주류를 형성했고, 그 중핵은 예술원으로 염상섭, 박종화, 유치진, 서정주 등 주로 남한 출신이었다. 그 후에 황순원, 모윤숙 등 북한 출신들도 추가되었다. 예술원에 대한 반감으로 김광섭, 백철 등이 '한국자유문학자협회'를 창립하고 기관지로 <자유문학>을 발간했는데, 1963년 8월호를 마지막으로 통권 71호로 종간되었다.
역시 비주류파인 <문학예술>은 1954년에 창간되었는데, 장준하의 호의로 <사상계>가 있던 한청빌딩 3층 사무실을 빌려 사용한다. 이들은 외국문학에 많은 지면을 할애했다. 그러나 <문학예술>은 1957년 33호로 종간을 한다. 이런 비주류 문인들은 사상계로 흡수되고 함석헌, 신상초, 안병욱 등의 북한 출신 문사철 지식인들도 합류를 한다. <사상계>가 문예 중간호나 문학 특집 등을 빈번하게 발간하여 인기를 끈 것도 이런 배경이 있다.
장준하는 문학상을 제정하겠다는 결심을 굳히고, 백철의 권유로 '동인문학상'을 제정하게 된다. <사상계>는 조연현 주도의 <현대문학>은 이승만 독재를 지지하면서도 순수문학이라고 주장하는 미학관 때문에 <현대문학>에 비판적이었다. 특히 장준하는 같은 평안도 출신의 김동인으로 낙착이 되었는데, 장준하는 김동인의 친일 행적을 소상히 알지는 못했을 것이다.
60년대 중반까지는 <사상계>의 전성기였으나 5.16이후 장준하는 박정희의 사상을 혹독하게 비판하거나 한일굴욕외교 반대, 월남파병 반대 등 박정희 정권을 비판하자 혹독한 세무사찰을 통하여 <사상계>는 부완혁에게 넘겼고, 동인문학상도 끝났어야 한다."
친일문학상은 폐지가 답이다
이어서 경희대 교수인 문학평론가 이명원은 '김동인의 대일협력과 동인문학상 문제'라는 주제로 발제를 해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였다.
"김동인은 '내선일체' 이데올로기를 고양시키기 위하여 장편 역사소설 <백마강>을 썼고, 1944년에는 <상암의 길>이라는 장편 소설을 써서 막부 말엽 양이근황론자인 '아나가와 세이강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문필보국 역설하였다."
며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의 자료를 인용하여 김동인이 일제말기의 친일 논설들을 소개하기도 하였다.
이어서 이명원은 다음과 같은 발표도 이었다.
김동인은 "일제 초창기 때는 조선인들이 징병에 제외된 것은 국민으로서의 권리와 책임을 배제 당했는데, 중일전쟁 이후 조선인들의 징병으로 인하여 비로소 조선인들도 일본인과 같은 대접을 받게 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였다.
"김동인은 친일문학상의 시초이다. <사상계>가 수여한 1956년 제1회 '동인문학상' 9인의 심사위원들 중 <민족문학작가회의> 등이 발표한 42인의 친일 문인인 김팔봉, 백철, 최정희, 이무영, 정비석, 이헌구 등이 포함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이는 한국의 학계에서 친일문학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에도 기인한다며 그 답은 동인문학상 폐지다."
문학평론가인 중앙대 오창은 교수는 "1918년 김동인, 주요한, 전영택 등이 모여 재일본동경조선유학생학우회가 발간하는 <학지광>에 투고를 거부당하면서 <창조> 동인을 결성하면서 순수문예지를 지향했던 것이 시작이 되었다. 주요한의 <불노리>, 김동인의 <약한 자의 슬픔>, 전영택의 <해선의 사> 등이 실리면서 문학사적 위치를 점했다. 백낙청, 최원식, 황석영, 공선옥, 송경동 등의 친일문학상 거부도 훌륭한 몸짓이지만 개별적인 결단만으로는 되지 않고, 독자와 작가를 포함한 조직적 거부 운동 차원으로 전환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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