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김태갑’. 한겨레에서 그의 이름을 모르는 이는 별로 없습니다. 하지만 그에 대해 부드럽고 밝은 인상보다 강하고 전투적이며 거칠다는 이미지를 떠올리는 이가 훨씬 더 많습니다. 그는 그의 방식으로 한겨레를 사랑했습니다. 그런 그의 모습이 부담스러운 건 어쩔 수 없습니다. “한겨레 주주사랑방을 연다”는 그를 만나러 28일 서울 노원구 상계동 수락산 자락 별채를 찾았습니다.

서울에 이런 곳이 있던가 할 정도로 시골스런 동네 골목을 돌아 올라간 길 끝에는 그의 별채가 푸르름과 수줍게 핀 꽃들에 둘러싸여 앉아있었습니다. 봄비가 운치있게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막걸리 몇 병 준비하고 벌써부터 큰길로 나와 우리를 기다렸습니다. 몇 시간, 그와의 만남은 지난 10여 년의 그에 대한 고정관념을 바꾸는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그의 환한 미소와 로맨틱한 가슴의 온기를 느꼈고, 작별을 고하는 우리에게 그는 애절한 사랑노래도 들려주었습니다.

 

-간단히 살아온 이야기를 해주세요.

=올해로 66살입니다. 원래 고향은 충청도지만 서울에서 사업을 했습니다. 해외여행중 아이템을 눈여겨 본 것 중 1회용위생물수건을 만들어 팔았습니다. 지금이야 어디가든 1회용 물수건을 볼 수 있지만 그땐 어디에도 없었고 내가 국내에선 처음 선보였습니다. 한동안 불티나게 팔렸고 서울에서 내가 만든 제품을 안 쓰는 음식점은 거의 없다시피 했답니다. 그래서 돈도 많이 벌었지요.

▲ 김태갑 주주

-지금은 충남 보령에 계시는 걸로 아는데요.

=사는 곳은 서울 강변역 근처입니다만 13년 전 새로운 사업을 벌렸습니다. 발리 여행중 힌트를 얻어 보령 해수욕장에서 해상레저 사업을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때 벌어놓은 돈을 많이 까먹었습니다. 그래도 애착이 있어 사업을 계속 끌어갔으나 결국 더 이상 유지하지 못 하고 정리했습니다. 지금은 관광마차 2대만 운영하고 있습니다.


-사업 말고도 다양한 사회 참여활동을 하시는 것으로 압니다. 이런 활동을 적극적으로 하시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저 나름 사회적 강자들이 저지르는 ‘불의’와 싸워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잘 아시다시피 기득권을 가진 자들, 거기다가 의롭지 못한 삶을 사는 이들의 힘은 생각보다 크고 강력합니다. 그러다보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불의를 보고도 두려워서 참여하지 못 하지만 저는 참여할뿐입니다. 혼자 싸우는 것이 쉽지 않지만 그래도 가끔 주변의 소위 ‘또라이’들이 제게 힘이 되기도 합니다. 이들은 앞뒤 안 가리고 앞으로만 가려는 성향이 있지만 어쨌든 옳은 주장과 그에 대한 실천을 하는 이들입니다.

▲ 김태갑 주주

 

-생활 속에서 불의와 싸우며 살아온 삶에 대해 만족하시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 심하게 말하면 저의 삶은 ‘가짜’였습니다. 불의에 맞섰다곤 하나 힘에 부칠 땐 타협도 했고, 때론 두려워 겁을 내 주춤하기도 했습니다. 내가 ‘진짜’려면 안중근 의사, 체 게바라, 카스트로가 보여준 것 같은 결단과 용기 있는 실행을 했어야 합니다. 물론 제가 그랬다면 아마 이미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난 그냥 평범한 삶 속에서 적당히 타협하며 흉내를 내온 것입니다. 사실 불의에 맞서는 것은 ‘상식’을 지키려는 노력입니다. 상식을 지키려는 노력은 앞으로도 계속 할 생각입니다.


-누구나 불의에 맞서는 일에 쉽게 인생의 많은 시간을 보내지는 않습니다. 특별히 그런 삶을 살게 된 계기가 있었는지요.

=1972년 동부전선 최전방에서 군복무를 시작한 저는 가장 졸병인 일병 시절 군 간부들이 조직적으로 쌀을 빼돌린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첫 휴가를 나오자 국방부에 전화 제보하였고 군 헌병대에도 편지를 보냈습니다. 휴가를 마치고 복귀하니 부대는 발칵 뒤집어져있었고 헌병대는 오히려 저를 불러서 조사하기 시작했습니다. 조사관들의 말은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너의 행동은 옳았다. 하지만 너는 통신기밀과 서신위반으로 처벌받아야 한다.”라고 말하더군요. 그리곤 바로 영창 신세를 졌습니다. 아! 세상이 이런 건가 했습니다. 당시는 군 의문사도 많은 때라 소위 ‘양심선언’한 제 목숨을 부지하고 온전히 제대한 것만으로도 사실 큰 행운이었습니다. 그때 그 경험은 제 인생관을 바꿔놨습니다. 그때부터 ‘불의’는 제게 ‘비상식’이었습니다.


-한겨레와의 인연을 소개해주세요.

=1987년 전두환 독재정권을 막내릴 기회는 김대중.김영삼 단일화 실패로 물건너 가고 노태우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전국민은 실의에 빠져있었습니다. 비상식이 판을 치고 죄없는 대학생들이 연이어 잡혀가던 그해 겨울 저의 마음을 움직인 광고가 있었습니다. 정확한 카피 문구는 기억이 안 나지만 아마도 ‘해직기자들이 밤거리를 헤매고 있습니다. 시린 소주를 가슴에 붇고 있습니다. 올바른 언론을 만들어야 하나 저희에겐 힘이 없습니다.~’. 새신문을 만들자는 발전기금 모집 광고였습니다. 전 그때 상식의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믿고 부끄럽지만 당시 25만원을 냈습니다.


-한겨레 주주로서 애정이 크지만 회사의 이러저러한 문제에 대해 과도하게 간여하신다는 의견이 있습니다.

=한겨레가 잘못한 거 이외에는 관여하면 안 된다는 게 주주로서의 제 소신입니다. 다른 언론들은 종편 진출, 병원, 학교, 생명관련 사업 등 민첩하고 적극적인 노력이 많이 보이는 데 한겨레는 그렇지 못한 것 같아 매우 안타깝습니다. 종이신문 하나 믿고 있는 건지, 사무실에 가보면 한겨레 직원들이 활력이 넘치고 뭔가 팍팍 돌아가는 역동성이 보여야 하는데 그런게 안 보입니다. 거기에 이런 저런 사업실패와 직원 감독 부실로 큰 손실을 보는 등 주주로서 그냥 박수만 치는 것은 아니라고 판단했습니다.

사실 말이 나왔으니 쓴소리 좀 하겠습니다. 한겨레가 창간이후 끊임없이 가시밭길을 걸어온 걸 잘 압니다. 정말 잘 한 일입니다. 이 세상이 그나마 이만큼이라도 나아진 건 한겨레 덕입니다. 하지만 어느순간부턴가 한겨레도 기득권 안에 들어선 느낌입니다. 한겨레는 매맞고, 배우지 못하고, 굶주린 이들과 함께 호흡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그저 좋은 언론사에 입사한(선택된) 직장인이거나 스스로 기득권에 안주해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제가 그동안 줄기차게 한겨레에 요구한 것은 하나입니다. 잘못한 것에 대해 책임지는 모습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한겨레를 사랑하기에 이런 비판도 하지만 한겨레가 어렵다면 언제든 나설 준비가 되어있는 진성 주주입니다.

 

-한겨레가 주주님들의 주장과 바람을 모두 실현해드리지 못 하는 현실적인 어려움도 있습니다. 한겨레가 현실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 있을까요?

=언론은 남의 일에 숙명적으로 ‘간섭’합니다. 그 간섭은 제대로 된 간섭이어야 합니다. 약한 사람과 무식한 사람들이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고 당했더라도 이들을 보호할 책임이 한겨레에겐 있습니다. 한겨레 주주들이 창간 때 돈이 많아 기금을 낸 것이 아닙니다. 대부분 어렵게 사는 이들이 기꺼이 한겨레 창간에 동참했습니다. 한겨레는 지난 27년 간 이들을 위해 무엇을 했는지 묻습니다. 그분들 중에는 불의에 맞서 지리한 법정 싸움 끝에 가산을 탕진한 분도 계시고, 사업에 실패하여 노숙자 신세가 된 분, 암과 각종 질병, 사고로 궁핍한 생활 속에 하루하루를 보내는 분들도 많습니다. 한겨레가 이제 이런 분들도 돌보아야 합니다. 그게 도리입니다. 도움을 호소하는 한겨레 주주들을 외면하면 안 됩니다. 각종 법률상담과 문제해법 제시, 관련 상식 제공 관련 전문가 연결 지원 등 조금만 신경 쓰면 당장 할 수 있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거부터 하면 됩니다. 이제 상생의 시대입니다. 내가 왜 당신을 도와주어야 하나? 일방적인 시대는 갔습니다. 함께 잘 되어야 합니다.

 

-수락산 아래에 아담한 별채가 있고 이곳을 한겨레 주주들의 사랑방으로 내놓으셨습니다. 그 취지를 말씀해주십시오.

=그 집을 마련한 건 25년 전이었습니다. 전 생긴 거와 다르게 문학을 좋아합니다. 책 읽고, 쓰고, 사람들과 교류하고 싶었습니다. 수락산 자락 한적한 곳, 오대산 못지 않은 맑은 공기와 마당 앞으로 지나는 졸졸 계곡물, 지붕 뒤로 보이는 까치집 세 개, 가끔 마당앞에 내려와 눈을 마주치는 꿩과 청설모와 함께 있으면 저절로 문학을 사랑하게 됩니다. 한겨레 주주들을 여기로 초대하고 싶습니다. 가볍게 언제든 오시면 좋겠습니다. 호텔은 아니어도 사랑방 정도는 됩니다. (연락처: 010-2714-7834)

▲ 김태갑 주주의 수락산 별채
▲ 수락산 별채
▲ 별채 앞에는 계곡물이 졸졸 흐른다
▲ 한겨레 주주들을 초대할 넓은 방. 20명은 자겠다.
▲ 야외 주막집이라고나 할까
▲ 수락산 숲길

 

-기억에 남는 작가나 작품이 있다면

=저는 일본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 작품 <설국>의 가와바다 야스나리와 그의 제자 미시마 유키오를 좋아합니다. 그들의 작품은 가식 없는 인간의 영적 (시공)초월의 경험을 담고 있습니다.

 

-본인이 직접 쓴 작품이 있나요?

(동영상 보기: http://youtu.be/fU_QbtxdghE)

=제가 만든 시 한 편 소개합니다. 경험담이냐고 묻지 마세요. 제목은 <빈방>입니다. ‘고은 옷 차려입고/ 응석부려도/ 그녀는 천덕꾸러기/ 왜 따뜻한 말 한마디 못 했던가/ 내가 결혼 하던 날 뒤로 숨어 울었지/ 아 벌써 반백년 지났네/ 시장 어귀 어느 부인 보았다기에/ 둘러 둘러 찾아간 집/ 담 넘어 환히 불켜진 빈 방/ 벽에 걸린 허름한 양복 한 벌/ 내가 벗어놓은 젊은 날’
 

▲ 인터뷰가 끝나고 서기철 한겨레 주주센터 부장과 기념 촬영

[덧붙이는 말] 인터뷰 중 그가 예전에 유망한 복싱선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흥미로운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전해드리겠습니다.
 

인터뷰어: 서기철 한겨레 주주센터 부장, 정리/사진 이동구 한겨레:온 에디터

한겨레:온  donggu@hani.co.kr

한겨레신문 주주 되기
한겨레:온 필진 되기
한겨레:온에 기사 올리는 요령

저작권자 © 한겨레:온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