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장과 위장의 계절, 12월!

실로 12월은 변장과 위장의 계절이다. 세상의 경기가 완전히 전만 못하다고 하나 11월 말경이 되면서부터 도시는 반짝이기 시작한다. 빌딩 숲 사이로 멋진 장식의 크리스마스 트리가 군데군데 눈에 뜨이는가 하면, 경기가 죽어 얼마 가지 않아 나라가 망하고 말 것이라는 패거리들에게 불화살을 날리듯 도심의 빌딩 정원수들은 색색의 알전구를 뒤집어쓰고 마법의 성을 탄생시키고 있다.

12월에는 산타가 굴뚝으로 오는 날이어서 어린아이들 또한 설레는 달이고 산타의 정체를 알아버린 큰 아이들에게는 확실한 위장술을 발휘라는 짜릿한 달이다. 오며 가며 어른들 귓결에 자신이 갖고 싶은 세목을 읊조리며 들며 난다.

송년회가 가까워지면서 지하철 또한 더불어 만원이다. 확실히 음주 가무가 있을 예정인 관계로 마이카는 주차장에 세우고 이날만은 반드시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때문이다. 늦게는 막걸리를 걸친 중, 노년 남녀들이 막걸리 혹은 소주에 취한 벌건 얼굴을 들고 삼삼오오 지하철을 타는가 하면 한쪽 구석에선 혼자 된 중늙은이들이 술김에 푹 쳐져 코를 불며 자고 있다. 계절은 춥고 시절은 수상하나 그래서 더욱 주변을 둘러보고 일 년 동안 낙오하지 않았음을 확인하는 달 12월이다.

▲ 시청 앞 크리스마스트리

일년 내내, 툭하면 동창회라고, 툭하면 친목계라고 혹은 조합원 모임이라고, 등산 모임이라고 마을에서 벚꽃놀이 간다고 산더미 같은 일은 쌓아놓고 나 몰라라 줄행랑치다가 년 말이면 송년회라고 단 한 번 마누라 초청이다. 봄이야 여름이네 가을이다, 꽃 피고 새 울고 울긋불긋한 좋은 날들은, 제 맘에 드는 어떤 연놈들과 끼질러 다니다가 벼룩이도 낯짝이 있는지 한 해의 마침표는 마누라하고 찍고 싶은 모양인가.

에잇, 아니꼽고 더러워서 안갈까 하다가도 반평생 친구가 되어버린 얼굴들이 그리워 단장을 한다. 이걸 입을까 저걸 걸쳐볼까, 가꾸지 않았던 몸매엔 몸빼만이 제격인데 무엇을 입어 남루와 천격을 가리랴! 그럴싸한 옷 한 벌을 사 입지 못한 주변머리를 탓하며 중얼거릴 때 밖에서 지루하기 짝이 없는 구랑의 얼굴엔 짜증이 슬슬 이끼처럼 끼기 시작한 지 이미 오래! 봄부터 가을까지 뙤약볕에 그을러 장독 같이 탄 얼굴에 뽀얘지라고 크림을 덕지덕지 바르지만 항아리 뚜껑에 분 바른 것 같은 낯색이다.

이만하면 위장일까 변장일까. 더구나 남편의 위신을 세워줘야 한다는 간절한 지어미의 충정으로 흐릿해진 눈썹까지 시커멓게 그린 마누라는 제 사내의 표정을 연신 살피지만 갑자기 찍어다 붙인 그녀의 변장이 도통 겸연쩍고 어색하여 사내는 찡그린 얼굴을 자꾸 먼 산으로 돌린다.

밥 좀 고만 먹으라고 누누히 일렀건만, 식구들이 남긴 것까지 아깝다고 먹어 쌓더니만 산더미만한 배를 내밀고 터질 것 같은 코트는 벌어져 언제 단추가 떨어져 나갈지 아슬아슬하다. 에잇, 이럴 줄 알았더라면 혼자 올 것을, 쪽 팔려 어디로 돌아다닐 것인가. 이러니 젊고 이쁜 남의 여자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니야! 그간 한눈팔던 제 비위를 애써 합리화한다. 친구들 보기 그래서 마누라와 동반했더니 에잇- 슬그머니 올라오는 부아를 꾹-누른다.

▲ 시청 앞 스케이트장 개장

아는 사람 만날까 겁나 마누라와는 거리를 두려는데 마누라는 그새 섭섭과 야속을 다 잊고 낭만적인 기분에 잠기는지 자꾸 팔짱을 끼려 한다. 허긴 한가한 둘만의 외출이 언제 있었던가. 팔짱을 끼고 낭만을 구가하던 날들이 언제였는지 까마득하다. 부부싸움이라도 한 것 같은 얼굴로 약속장소에 들어서서는 언제 그랬냐는 듯 반갑게 친구들과 악수하며 얼굴을 그제야 푼다.

12월은 일 년을 결산하는 달이기도 하고 회개의 달이다. 반드시 만선하여 돌아 오리라! 1월은 오만한 기대와 허욕으로 잔뜩 부풀은 돛폭을 세우고 출항하는 달이다. 그러나 작심은 한 달을 못가 바닥이 나고 7월의 방심, 8월의 안도, 9월의 기대, 시월의 회한, 11월의 초조를 거쳐 12월은 서명된 포기각서 휘날리는 체념의 달이라서 차라리 마음에 안정을 찾는다.

열심히 일하여 추수한 것이 많은 사람은 더 말할 것 없이 주위로부터 받는 감사와 찬사가 늘어지니 보는 사람도 흐뭇하다. 문제는 빈손을 들고 빈 들에 선 사람이다. 미국의 전원시인 <로버트 프로스트>는 “가지 않은 길 The road not taken”에서 두 개의 길을 얘기하고 있지만 갈래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많은 것이 세상의 길이다. 하지만 늘 선택은 자유이고 이 자유가 함정이다.

나를 돌아보고, 차근차근 준비하고 한길로 가야 했던 것을. 방황과 허욕은 착각의 마차를 부를 뿐이다. 일 년은 한 일생의 상징이며, 하루하루의 은유를 묶은 것이 일 년이다. 엉킨 것들을 풀어야 하고 공연히 넘성대며 여기저기 집적거리던 자국을 회개로써 추슬러야 한다.

방황과 허장성세로 보낸 한 해일망정 일 년의 마침표는 누룽지처럼 세월의 더께때 너덕너덕한 제 마누라와 보내려고 하니 되었지, 그만하면 되었지 무엇을 더 바라! 늙어 대추처럼 쪼그라진 닭똥집 같은 입술에 연지를 바르고 그래도 등짝 펑퍼짐한 내 사내가 있어서 든든한 얼굴을 들고 “세월이 가면...”을 열창하는 변장과 위장의 달인, 내 마누라가 있으니 뭘 더 바라!!   (필명 김 자현)

▲ 가난하나 따뜻했던 불빛들

 

 

 

 

 

 

 

편집 : 객원편집위원 김혜성(cherljuk13@nate.com), 심창식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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