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 양달섭 선생님 지키기와 전교조 참교육 지지 투쟁 5

구로고 학생들의 항의시위와 집회는 6/16일 교내 집회, 6/17일 연세대 민주광장에서 열린 서울지역 10개교 연합집회로 이어졌다. 급기야 7/14일 구로고 학생들 1,000여명이 교내 항의집회를 마친 뒤 거리 진출을 시도하였다.

교문 밖으로 거리 시위에 나선 800여 학생들은 '전교조 가입교사 징계철회'를 촉구하며 영림중학교와 구로고 도로공원 사이 도로에서 전경부대 병력 400명과 맞닥뜨렸다. 전투경찰은 곤봉과 쇠파이프를 휘두르며 선두에 선 구로고 학생들을 무자비하게 구타했다. 교문 밖 도로상에서 경찰의 곤봉에 가격당한 구로고 학생들은 구로동 큰길가 가두시위로 진출하는 데 실패했다. 무차별적인 구타와 폭행으로 구로고 학생 20여 명이 크고 작은 부상을 당했다.

▲ 1989년 7/14일 구로고 학생 800여 명이 '전교조 가입교사 징계철회'를 촉구하며 교문 밖으로 일부 진출했다.  영림중학교와 구로5동 도로공원 사이 도로에서 거리시위를 벌이고 있는 장면.(출처 : 시사인,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날 거리 시위는 전경부대 400명과 맞닥뜨리면서 전경들이 휘두른 경찰봉에 맞아 20여 명 학생들이 크고 작은 부상을 당했다.

문교당국은 전교조 탈퇴시한 전날인 7/14일 현재, 전교조 가입교사 8,500명 가운데 3,431명이 탈퇴해 5,135명이 남아 있다고 발표했다. 반면에 전교조는 7/14일에도 전교조 탄압에 항의하는 철야 농성과 단식 수업에 전국적으로 590개교 4,950명 교사들이 참여했다고 발표했다.

서울에서는 7/15일 구로고, 성동고, 인헌고, 동북고가 조기방학에 들어갔다. 학생들 움직임이나 집회 자체를 원천적으로 차단하기 위한 학교당국의 꼼수였다. 7/15일 구로고 학생들은 '교사, 학생에 대한 징계 철회'와 '조기 방학 철회'를 촉구하며 밤샘 공부를 결의하였다.

조기방학과 함께 학교당국은 구로고 학생시위를 주도하거나 열정적으로 참여한 학생들, 그리고 구로경찰서에 연행된 학생들을 가차 없이 징계 위협을 가했고 협박했다. 나아가 6-7월 분노한 학생대중의 열기에 주춤거리며 눈치를 보던 학교당국은 조기방학을 이용해 학생조직을 침탈해 들어갔다.

6/3일 전교조 구로고 분회 결성 지지투쟁으로부터 7/14일 거리로 진출한 가두시위에 이르기까지 두드러지게 활동의 중심에 섰던 학생들을 그림자처럼 감시하고 탄압했다. 등교정지나 징계 등 일상적인 위협을 가했고 리스트에 올라간 학생들을 감시하며 집요하게 괴롭혔다.

그 결과 6/3~7/14까지 한 달 동안 전국 최초로 가장 앞서서 견결하게 투쟁했던 구로고 학생들은 적지 않게 학생 역량이 위축되었다. 방학 기간 공안당국-문교부-서울시 교위-학교당국으로 이어진 전 방위적인 탄압이 광풍처럼 휘몰아친 탓이다.

6/17일 연세대에서 개최된 서울지역 10개교 고등학생 결의대회 연합집회에 참가한 구로고 학생들 20여 명에 대해서도 방학을 이용해 징계 위협의 칼날을 망나니처럼 휘둘렀다.

방학 기간 무려 100명이 넘는 구로고 학생들이 징계 위협과 함께 각서를 강요받았다. 일부 학생들은 구로경찰서로 소환돼 조사를 받기도 했으며 형사의 감시를 받았다. 방학 중 3학년 보충수업은 두 차례 연기된 끝에 시행되지 못했다.

그렇게 학교당국은 학생대중의 분노 앞에 불안해했고 그런 만큼 잔인하고 교활하게 대응하며 진압했다. 전교조 교사를 지지한 학생을 구타하거나 학생부실로 끌고 가서 손을 뒤로 하여 무릎을 꿇린 채, 머리를 콘크리트 바닥에 박게 했고 구둣발로 짓밟기도 했다. 이 사실을 전해준 관련 학생들은 눈물을 흘리며 증언했고 가슴에 깊은 상처로 남았다.

실제로 구로고 학생들은 참교육을 지지했다는 이유만으로 교장, 교감, 주임교사, 반(反)전교조 교사들에 의해 일상적인 폭언과 협박, 그리고 회유와 폭행에 시달렸다.

학생주임은 툭하면 "학생회실을 폐쇄해버리겠다"며 학생회 간부들을 위협했다. 2학년 주임 이00 교사는 "우리학교에서 3명만 없애면 학교가 조용해진다. 내 손으로 학생회장, 부학생회장을 잘라버리겠다"고 협박했다.

어떤 교사는 스탠드빠에서 술을 마시면서 자기 손으로 학생회장, 부학생회장을 잘라버리겠다고 호언장담한 교사도 있었다. 그 자는 학생회 간부의 뺨을 때리고 교실 문을 열고서 학생들을 향해 '죽여버리겠다'고 협박까지 하였다. 심지어 항의하려 온 학부모들에게 일당 얼마 받고 왔냐며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교감은 풍물반 학생들을 유기정학 시켜버리겠다고 큰소리쳤다. 교장은 4・19 기념식 행사 때 학생회장이 준비한 원고 내용 절반을 삭제했고 학생회에서 발간한 학교신문 기사도 삭제했다. 그리고 풍물반을 향토반으로 명칭을 강제로 바꿔버렸다.

교장과 학생주임은 1990년 5/15 학생집회가 무산된 후, 학생회장과 부학생회장에게 징계 전단계인 자술서를 강요하기도 했다. 그들은 4월 혁명기념 행사와 관련된 학생들을 조사하는 과정에서도 징계 위협으로 교묘히 회유하거나 지키지도 않을 언사를 내뱉으며 각서를 강요했다. 또한 1989년에 이어 1990년에도 학생총회와 5・18 기념행사를 원천봉쇄하는 반교육적인 작태를 버젓이 저질렀다.

그러나 구로고 학생들은 해직교사들이 학교현장을 떠난 이후에도 여전히 분노하였고 저항하였다. 89년 11월 학생회장 선거에서도 분노의 열기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학생대중의 저항은 11월 학생회장 선거와 해를 넘겨서도 계속되었다.

학교당국의 극심한 탄압에 학생회와 동아리 핵심 활동가들이 움츠러들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학생 대중은 '누가 선이고 누가 악인지', '누가 진실이고 누가 거짓인지' 온 몸으로 이미 체득한 상태였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구로고에서만 벌어진 현상은 아니었다. 전국의 상당수 학교에서 학생들의 분노에 찬 항의는 '선생님 사랑해요'를 넘어서서 적극적인 저항과 투쟁의 불꽃이 되어 들불처럼 번져갔다.

'전교조 선생님 지키기'와 '참교육 지지 투쟁' 과정에서 구로고 학생들이 89년 6-7월에 저항하면서 받았던 고난처럼 8-9월로 접어들면서 전국의 중고교 학생들도 똑같은 고난을 겪었다.

학생들이 받은 탄압 양상은 군부정권만큼이나 일선 학교당국은 잔인하고 교활했으며 그에 따라 학생들의 저항과 투쟁 또한 극한으로 치달았다. 여기에는 당시 문교당국이 89년 6/29일 전국의 시도교위 생활지도담당 장학관회의를 열어 전교조 사안에 대해 공격적으로 대응할 것을 주문한 결과였다.

실제로 6/29일 문교당국은 "고교생들의 집단행동 및 의식화서클 결성 학생들을 적극 선도하고 선도가 안 되는 학생들은 제적, 무기정학 등 중징계하라"고 지시했다. 게다가 관계기관 대책회의처럼 문교당국은 "검찰, 경찰과 유기적인 협조체제를 갖춰 고교생들의 집단행동과 의식화서클 결성을 방지하라"고 학교현장에 지침을 시달했다.

그렇듯 강공책으로 치달은 탄압의 결과, 학교현장에서 학생대중의 저항과 분노는 일반인의 상상을 초월했다. 여기에 극히 일부의 사례를 소개해 보려 한다.

전남 순천 효성고등학교에서는 7/7일 2천명이 넘는 전교생이 참여하여 '우리는 참 스승을 사랑한다.', '스승을 절대 내줄 수 없다'는 현수막을 게시한 뒤 항의농성을 전개했다.

경북 하양여고에서는 7/13일 조기방학 철회를 요구하며 단식농성을 벌였다. 경북 경주 신라고등학교 학생 1천여 명은 거리시위 도중 전경과 1시간 동안 몸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빛고을 광주에서는 7/21일 전남대 5・18광장에서 10여 개 고교생 1,000여명이 연합집회를 갖고 전교조 지지와 징계 철회, 그리고 방학 중 등교투쟁과 대체교사 수업 거부를 결의하였다.

7/30일 전북 익산시 남성고등학교 3학년 학생 전원은 폭우 속에서도 운동장에 무릎을 꿇고 농성 끝에 징계위 회의를 저지시켰다.

광주 광덕고등학교에서는 8/22일 '참교육을 받게 해달라', '전교사는 전교조에 가입하라', '부당징계 철회하라'를 외치며 요구가 관철되지 않으면 조회와 종례, 수업을 거부하기로 결의하였다.

▲ 1989년 8/22일 전교조 교사들에 대한 부당징계 철회를 촉구하며 신목고 학생들 400여 명이 수업을 거부한 채, 운동장에서 항의농성을 벌이자 교실에 남아 있던 학생들이 교실 창문 바깥으로 <선생님, 사랑해요> 펼침막을 내걸며 농성을 지지하는 모습.(출처 : 한겨레 자료사진)

서울 신목고등학교 학생들도 8/22일 2학년 12개 학급, 1학년 6개 학급 학생들이 오전 9시부터 오후 2시 15분까지 운동장에서 항의 농성을 전개했다. 신목고 학생들은 전교조 교사 징계 철회와 주동학생 징계 반대, 그리고 학생회 직선제 선거와 학교 예산 공개를 요구했다.

8/24일 대전 신일여상 3학년 학생 전체와 2학년 학생 일부는 가슴에 리본을 달았다. 그리고 '우리는 인형이 아니다', '자주적으로 선생님을 되찾자'는 글귀가 적힌 8절지 크기 유인물 수십 장을 교실유리창에 부착했다.

서울 대방여중 3개 학급 180명은 시험을 거부하여 학생회장이 정학 7일, 주동학생 5명은 정학 5일, 4명은 근신 징계를 받았다. 당일 서울 성보고등학교 학생 1,500여명이 운동장에서 연좌농성을 벌이며 항의했다.

서울 당곡고 학생들 수백 명이 파면당한 교사와의 면담을 요구하며 운동장에서 항의시위를 하였다. 또한 수도여고에서는 김00 학생 투신자살을 가족에게 사고사로 해줄 것을 강요하기도 했다.

8/29 경남 하동종합고등학교에서는 수업거부 과정에서 학교당국의 제지를 받았고 8/30일 주동자 색출과정에서 학생을 구타하였다. 8/31일 부산시 부산진고등학교에서는 시위 관련 학생 3명을 교감, 체육주임, 교사들이 폭행했다.

9/5일엔 전남대 5・18 광장에 광주시내 17개교 5,000여 명 학생들이 오전수업을 거부하고 '참교육 실현 및 전교조 지지와 학원 탄압 분쇄'를 외치며 경찰의 원천봉쇄를 뚫고 모여 결의대회를 개최했다.

9/8일 강원도 정선여고에서는 해직교사 징계에 항의하여 학생 100여 명이 대체교사 수업을 거부하자 교무주임은 계속 거부하면 휴교령 내리겠다고 협박했다. 9/16일에 광주고등학생연합(광고협) 의장 강위원 군(서석고 3년)과 기획부장 김일수 군(대동고 3년)이 구속되었다.

9/19일 경기도 일산 종합고등학교에선 교실에서 시험을 치르던 유민수 군(부학생회장)을 고양경찰서 형사가 학교에 들어와 수갑을 채운 채 연행해 갔다. 당일엔 광주 대동고 학생 1,000여명이 김일수 군 구속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다.

9/25일 전남 곡성군 옥과고등학교에서는 9/12일 수업시간 전교조 관련 질문을 했던 유00 군을 온 몸에 멍이 들 정도로 구타한 사건에 대해 수업을 거부하고 남녀학생 50여 명이 '선생님 사랑해요'라는 혈서를 썼다.

1989년 7/18-11/16까지 4개월에 걸친 옥과고등학교 학생들의 투쟁은 경찰의 무차별 연행과 6명 불구속 입건, 그리고 학생시위를 지도한 3학년 4명을 퇴학시켰던 불의에 맞서 부당징계를 철회시킴으로써 일정 부분 승리한 사건이었다.

전교조 교사 징계저지 투쟁과 참교육 요구 투쟁은 1989년 12월 말까지 계속되었다. 전국적으로 250개 학교 연인원 47만 명이 넘는 중고교 학생들이 전교조 선생님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권력에 맞서 싸웠다. 학생들은 선생님을 지켜내고 참교육을 요구하는 투쟁과정에서 불행하게도 구속되거나 퇴학을 당했다. 유기・무기정학을 비롯한 징계 위협은 다반사로 자행되었다.

결국 학생들은 불의에 항거해 혈서를 쓰면서 저항하기도 했고 심지어 권력의 탄압에 맞서 투신이라는 극단적인 참극을 빚기도 했다. 그만큼 참교육을 향한 학생들의투쟁은 뜨거웠고 희생 또한 너무도 컸다. 이 모든 것은 89년 시대의 모순 속에 참교육 원년세대가 고스란히 감당해갔던 교육계 고난의 역사이자 희망의 역사였다.

다시 구로고 학생들의 '전교조 교사 지키기'와 '참교육지지 투쟁'으로 돌아가자. 구로고 학생들은 여름방학 동안 학교당국과 경찰의 공안탄압으로 학생 조직이 크게 위축되었다.

89년 1학기 6-7월에 보여준 학생대중의 자발적인 자주역량은 상당 부분 소진해가는 상태였다. 그런 상황을 읽은 학교당국은 학생회장 선거를 계속 연기하고 제2회 상록제(구로고 축제)도 차일피일 미루었다.

학생역량이 심대하게 침탈당한 상태에서도 선진적인 일부 학생들은 학교의 강압적인 분위기를 뚫고 학생회장 선거를 촉구하면서 축제를 준비해 나갔다. 당시 학교당국은 어렵게 일궈낸 면학분위기(?)를 해칠 수 없다며 어떠한 학교행사도 들어줄 수 없다며 학생들의 정당한 요구를 거부했다.

결국 학교당국과 협상 끝에 축제는 해를 넘겨 1990학년도 1학기에 열기로 합의했다. 문제는 연기된 학생회장 선거에서 문제가 불거졌다. 학생대중의 절대적 지지를 받던 학생회장 후보 이윤창 군(2-1반)이 1989년 11/1일 국민정신교육관에서 열린 축제 관련 동아리대표회의에 참석한 사실을 학교 측에서 문제 삼았다.

학생부 이00 교사는 이윤창 군을 학생부 교무실로 불러 동아리 대표들 누구와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았는지 추궁하면서 구타했다. 11/2일 학생회장 후보 폭행 사건을 접한 선진적인 학생들 일부가 유인물을 배포하며 학교당국의 처사에 항의했다. 그러자 학생부 교사 오00 교사(교련), 이00 교사(교련), 김00 교사(수학)가 관련학생들을 학생부실에서 폭언과 함께 폭행했다.

학교당국은 징계를 하지 않겠다는 애초의 약속을 어기고 학생회장 유력 후보인 이윤창 군에게 유기정학 10일을 때렸다. 본래 10월 초 학생들 자체 행사로 참교육을 지지하는 리본달기를 주도한 이윤창 군을 학교당국이 정학 3일 징계를 결정하려다 구로고 분회 해직교사들의 항의를 받고 유보시켰다가 다시 11/1 동아리 대표회의에 참석한 사건을 트집 잡아 징계를 내린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학생회장 선거 4일 전에 자행한 탄압으로 징계의도가 너무도 명명백백했다. 학생대중의 압도적 지지를 받는 후보의 자격을 박탈하려는 꼼수였다. 학교당국은 어용후보를 내세웠고 코앞에 닥친 선거를 밀어붙였다.

학생들의 비난을 받던 어용후보는 스스로 학생부실에 찾아가 후보를 사퇴하겠다고 자발적으로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학교당국은 후보사퇴를 받아주질 않고 선거를 강행했다.

학생들은 학생자치활동을 위축시키며 어용후보를 내세운 학교당국의 음모를 간파했다. 학생회를 장악하려는 의도였다. 이에 학생들은 학교가 옛날로 돌아가고 있다며 격분했다. 동아리 활동에 열성적인 선진적인 학생들이 학교당국의 반교육적인 횡포를 비난하는 유인물을 수차례 돌렸다.

1989년 11/10일 학교당국이 밀어붙인 7기 학생회장 선거는 70% 이상 반대표가 쏟아져 나오면서 학생회를 장악하려던 학교의 의도는 철저히 무산되었다. 대입학력고사가 코앞이라 3학년 학생들은 투표에 거의 관심이 없었다. 1, 2학년 전체 24개 학급에서 투표한 결과, 학교 측이 내세운 어용후보는 50표를 채 얻질 못했다.

학교당국은 부득이하게 12/1일에 재선거를 치르는 초유의 사태를 맞았다. 두 명의 민주후보가 다시 출마해 경쟁하는 속에서 1, 2, 3학년 2,100여명이 투표에 참여하였다. 선거 결과 60%(1,290표)를 획득한 전원근 군이 7기 학생회장, 이기현 군이 부학생회장으로 당선되면서 구로고 학생들의 선거투쟁은 학생들의 자주의식이 빛을 발하면서 승리의 열매를 맺었다.

편집 :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hsh703@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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