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처중과 박치우

▲ 윤동주와 어린 시절, 그리고 청소년 시절 학교동창이었던 문익환 목사.(출처 : 한겨레 자료사진)

윤동주가 생체실험을 당해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순국했을 때 북간도 용정에서 장례를 치러준 인물이 문익환 목사의 아버지 문재린 목사였다.

윤동주와 인연을 맺은 사람들을 꼽자면 명동소학교와 은진중학교, 숭실중학교를 함께 다닌 문익환 목사를 들 수 있다. 문익환 목사는 윤동주를 회상하는 것만으로도 “언제나 넋이 맑아지는 느낌을 받는다”고 했다.

은진중학교 시절 윤동주는 명희조 선생에게 역사와 한문을 배웠다. 명희조 선생은 도쿄제국대학 사학과를 졸업한 수재로 항일민족의식이 투철한 분이었다. 도쿄 유학시절 일제가 운영하는 전철을 타지 않았고 방학 때 고향으로 갈 때도 기차 대신 자전거를 타고 갈 정도였다. 일제가 운영하는 시설에 돈을 한 푼도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윤동주의 고종사촌인 송몽규는 명희조 선생의 주선으로 은진중학교 3학년을 마치고 1935년 낙양육군군관학교 한인반 2기생으로 입학했다. 18살에 송몽규는 직접 항일무장투쟁에 뛰어들었다.

송몽규는 2016년 1월에 개봉한 영화 『동주』를 통해 대중에게 처음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송몽규는 다섯 살이 될 때까지 윤동주와 북간도 명동촌 같은 집에 살았다. 윤동주 못지않은 문학청년으로 은진중학 시절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꽁트 ‘술가락’이 당선될 정도로 재능이 출중했다.

윤동주가 내면을 성찰하는 조용한 성품이라면 송몽규는 활동적이고 리더십이 뛰어났다. 명석할 뿐만 아니라 현실문제에 항상 도전적이고 진취적이었다. 그런 송몽규에게 윤동주는 나름 열등감을 지니면서도 적지 않은 자극을 받기도 했다.

송몽규는 일본 유학 시절 요시찰 인물이었다. 중국에서 육군군관학교를 다니고 중국관내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일제에 피검된 때문이었다. 송몽규와 윤동주는 1943년 7월  ‘재교토 조선인학생 민족주의그룹사건’ 으로 투옥돼 1945년 옥사했다. 일명 치안유지법 5조 위반인데 항일투사들을 표적으로 삼았던 악법이었다.

해방 6개월을 앞두고 윤동주가 2월 16일에, 그리고 송몽규가 3월 7일에 피골이 상접한 상태로 숨을 거뒀다. 윤동주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 죽어갔고 송몽규는 눈을 부릅뜬 채 죽어갔다. 순국 당시 윤동주와 송몽규의 나이 28살이었다.

윤동주와 인연을 맺은 사람들 가운데 연희전문학교 시절 최현배, 이양하, 손진태를 꼽지 않을 수 없다. 윤동주는 최현배 선생이 강의하는 조선어 시간엔 강의실 맨 앞자리에 앉아 경청할 정도로 우리말을 사랑했다. 손진태 선생에겐 역사의식을, 그리고 이양하 선생에겐 문학청년으로서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다.

4학년 졸업 당시 윤동주는 ‘서시’ 를 맨 앞으로 배치해 19편으로 구성된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를 졸업 기념으로 발간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양하 선생은 시국을 탓하며 만류했다. 그러자 윤동주는 필사본 3부를 만들어 그 중 1부를 이양하 선생에게 드렸다. 나머지 한 부는 자신이, 그리고 다른 한 부는 연희전문 후배인 정병욱에게 주었다.

윤동주가 졸업 기념으로 발간하려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1948년 1월 연희전문학교 동기생 강처중과 후배 정병욱에 의해 처음으로 세상에 빛을 보았다. 필사본 3부 가운데 유일하게 간직한 정병욱이 강처중과 의기투합해 만든 결실이었다. 정병욱은 윤동주보다 5살 어리지만 연희전문 2년 후배였다. 윤동주와 정병욱은 연희전문 기숙사 생활과 이후 종로구 누상동 하숙생활을 함께할 정도로 우애가 깊었다.

▲ 연희전문학교 시절 윤동주와 정병욱(출처 : 한겨레 신문)

정병욱(서울대 교수)은 한국 국문학계 거장으로 청년 시절 윤동주와 종로구 누상동에서 하숙생활을 같이 할 정도로 우애가 깊었다.

정병욱은 1944년 1월 학병으로 강제 징집돼 끌려가기 직전, 윤동주가 건넨 필사본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를 숨겼다. 전라남도 광양에서 양조장을 하던 어머니께 잘 보관해 달라고 신신당부했다. 어머니는 필사본 시집을 명주보자기로 여러 겹을 싸서 작은 항아리에 담았다.

항아리 속에 마른 짚풀을 넣어 시집이 상하지 않도록 정성을 다했다. 그리고 일제 당국에 발각되지 않도록 마룻바닥을 뜯고 그 밑에 항아리를 묻어두었다. 일제가 패망하고 정병욱이 징병에서 돌아왔을 때 어머니는 한없이 기뻐했다. 그러면서 애지중지 묻어두었던 필사본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를 자랑스럽게 건네주었다.

윤동주가 직접 손으로 쓴 필사본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는 그렇게 살아 남았다. 1948년 1월 최현배 선생의 큰아들이 운영하던 정음사에서 초간본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가 발간되었다. 윤동주의 시집이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지고 빛을 본 것이다. 거기에는 윤동주의 절친, 강처중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그동안 강처중이 대중의 기억 속에 사라진 이유는 분단이 낳은 비극 때문이었다.

강처중은 윤동주, 송몽규와 함께 연희전문 입학 동기생으로 기숙사 핀슨홀 3층 룸메이트였다. 윤동주의 시작(詩作) 비평뿐만 아니라 기숙사 ‘3총사‘ 로 불릴 정도로 절친이었다. 더구나 윤동주의 유고시집이자 최초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발간하는 데 주도적으로 역할을 수행한 인물이 바로 강처중이었다.

대중의 기억에서 망각된 이유는 간단했다. 강처중은 해방공간 남로당 언론계 비선책임자이자 이원조(이육사의 동생), 박치우와 함께 좌파언론의 거물급 인사였다. 1950년대 ‘정국은 간첩사건’ 의 배후 주범으로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된 금기의 인물이었다.

1947년 당시 강처중은 경향신문 창립멤버이자 경향신문 조사부 주임기자였다. 1947년 2월 16일 윤동주, 송몽규 2주기 추도식 행사에서 강처중은 정병욱과 함께 시집 발간을 기획했다.

그리하여 강처중은 정병욱이 고이 간직하고 있던 필사본에 실린 19편시를 근간으로 유고시집을 구상했다. 그리고 일본 유학 시절 윤동주가 강처중에게 편지로 보낸 ‘쉽게 씌여진 시’ 등 5편과 윤동주가 일본 유학을 떠날 당시 강처중에게 맡겼던 작품들 가운데 ‘팔복’, ‘참회록’ 등 7편을 더해 모두 31편으로 편찬했다. 시를 선정하고 편집 구성하는 작업과 발간 사업을 강처중이 주도하였다.

‘참회록’은 일본 유학차 부득이 도항증을 발급받기 위해 창씨개명을 한 것에 대한 부끄러움을 고백한 시이다. 1942년 1월 19일 개명된 창씨명 히라누마 도오쥬우(平沼東柱)를 연희전문학교 학적계에 제출하고 5일이 지나 윤동주는 “만 24년 1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 라고 부끄러워했다. 그러면서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자”고 참회했다. 창씨개명계를 제출하고 5일 만에 쓴 ‘참회록’ 은 내면에서 울려나오는 통회의 시이자 일제에 대한 저항적 성격의 시였다.

강처중은 윤동주가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면서 남겼던 40권이 넘는 책과 시작 유품, 앉은뱅이 책상, 연희전문 졸업앨범 등을 목숨처럼 소중히 간직하였다. 그러다가 1946년 월남한 윤동주의 친동생 윤일주에게 동주의 유품을 건넸다. 강처중은 해방 공간 남로당 지하활동으로 항시 체포될 위험에 직면해 있었다. 

1947년 윤동주, 송몽규 2주기 추도식 행사가 열리기 전에 당시 경향신문 기자였던 강처중은 정지용을 찾아갔다. 윤동주가 쓴 ‛쉽게 씌여진 시‛ 를 비롯해 10여 편의 시를 세상에 알리고 싶다며 경향신문 주간이었던 정지용에게 건넸다. 정지용은 몇 날 며칠 검토한 뒤에 1947년 2월 13일자 경향신문에 ‛쉽게 씌여진 시‛ 를 게재했다. ‛쉽게 씌여진 시‛ 는 윤동주가 마지막으로 쓴 작품이다. 

글쓴이를  ‘故 尹東柱’ 로 소개하며 1942년 6월 3일에 쓴 것임을 밝혔다. 그리고 정지용은 윤동주를 소개하면서 “윤동주의 유골이 북간도 용정에 묻혀 있으며 그의 비통한 시 10여 편이 자신에게 있다” 고 밝혔다. 그러면서 “지면이 있는 대로 소개할 것” 이라며 시인 “윤 군보다 내가 자랑스럽다” 고 소개 글에 덧붙였다.

무명(無名)시인 윤동주가 당대 최고의 시인 정지용에 의해서 세상에 처음 소개되는 순간이었다. 모두 강처중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3일 후 1947년 2월 16일 서울 소공동 ‘플라워 회관’ 에서 2주기 추도식이 열렸다.

강처중은 정지용(경향신문 주간), 정병욱(서울대 국문학과 4학년, 윤동주 연희전문 후배), 유영(연희전문 동기), 윤일주(윤동주 친동생) 등 30여 명이 참석한 자리에서 내년 3주기 추도식 이전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출간하기로 정병욱과 기약했다.

1947년을 전후한 당시 시대상은 엄중했다. 미군정의 탄압이 본격화하면서 남로당은 지하화해 극심하게 탄압 받던 시절이었다. 따라서 남로당 언론계 거물 강처중은 매일매일 살얼음을 걷는 기분으로 살아갔을 것이다. 1946년 9월 체포를 피해 박헌영이 북으로 넘어갔다. 남로당 책임자는 김삼룡이었는데 김삼룡, 이주하는 1950년 3월 체포된다. 그 당시 강처중도 피검되었다. 남쪽 사회에서 남로당 조직이 사실상 와해된 것이다.

이주하, 김삼룡은 6·25 전쟁 직후 서대문형무소에서 끌려나와 한강 백사장에서 처형되었다. 반면에, 강처중은 사형선고를 받고 서대문형무소에 갇혀 있다 석방되었다. 석방 직후 강처중은 서울 집에서 두 달을 요양하다 1950년 9월 4일 소련으로 공부하러 간다며 아내 이강자 여사에게 말하고 집을 나섰다. 그리곤 소식이 두절된 것이다.

그런 살얼음판 같은 시대상황 속에서 초간본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가 1948년 1월 최초로 세상에 선을 보였다. 무명시인 윤동주가 일약 항일 민족시인, 저항시인으로 첫발자국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이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1955년 2월 윤일주(윤동주의 동생)와 정병욱에 의해 증보판이 나왔고 오늘날은 일본, 독일, 프랑스, 스페인 등 8개 국어로 변역돼 세계인이 애송하는 불후의 시집이 되었다.

강처중은 초간본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발행 당시 경향신문 주간을 맡았던 정지용에게 서문을 부탁했다. 정지용(문성근 분)은 영화 『동주』(2016, 이준익 감독)에도 등장하는데 윤동주가 가장 흠모했던 시인이었다. 일제강점기 시절 우리말로 쉽게 시를 쓰면서도 많은 이들에게 서정적으로 울림을 주는 시인 정지용을 윤동주는 무척 좋아했다. 그리나 윤동주는 영화 『동주』의 장면과 달리, 실제로 정지용을 만난 적이 없었다.

윤동주의 존재를 몰랐던 정지용에게 윤동주의 동생 윤일주를 소개해 준 인물이 바로 강처중이었다. 정지용이 쓴 서문에는 윤일주와 묻고 답하는 과정에서 윤동주를 알아가는 장면이 나온다. 내성적이고 온유한 성품을 간직한 윤동주를 정지용은 ‘뼈가 강했던’ 청년이자 “일적(日賊)에게 살을 내던지고 뼈를 차지한” 시인이라며 감탄했다.

정지용은 윤동주를 “동지섣달에 피는 꽃과 같은” 존재로 보았다. 그럼에도 차디찬 “얼음 아래 한 마리 잉어와 같은 조선 청년 시인을 죽였다” 며 격한 감정을 서문에 썼다. 그리곤 “뼈가 강한 죄로 죽은 윤동주의 백골은 이제 고토(故土) 간도에 누워 있다” 며 애달파했다. 정지용은 윤동주가 쓴 유고시를 읽으며 “29세가 되도록 시도 발표해 본 적도 없이 무시무시한 고독 속에서 죽어갔다” 고 장탄식했다.

시인 정지용은 서문에서 일제강점기 “날뛰던 부일문사(附日文士) 놈들의 글을 다시 보면 침을 뱉을 뿐”이라고 일갈했다. 실제로 시인 정지용은  ‛조선시의 반성’ 이란 글을 통해 일제강점기 “친일도 배일도 못한 자신은 산수에 숨지 못하고 들에서 호미도 잡지 못했다” 며 절필을 선언했다. 이광수, 최남선, 서정주, 모윤숙, 노천명 등 부일문인들이 저지른 친일행적과 달리, 우리말을 서정성 짙은 시어로 아름답게 빚어낸 윤동주에게 너무도 부끄러웠던 것이다.

정지용은 서문에 이렇게 적었다. 무명(無名)시인 윤동주가 있어 “부끄럽지 않고” 시인 윤동주야말로 “슬프고 아름답기 한이 없는 시를 남겼다” 며 “시와 시인은 원래 그런 것”이라고 토로했다. 일제 말기로 치달을수록 수많은 시인과 작가들이 일본어로 작품을 발표하며 지조를 버리고 제국주의 일본을 찬양하며 훼절하던 시절! 아름다운 우리말로 시를 쓰고 내면을 깊이 성찰했던 윤동주야말로 참된 시인임을 정지용은 고백한 것이다.

경향신문 창립멤버이자 주간으로 재직했던 정지용에게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서문을 부탁했던 이도 바로 윤동주의 절친 강처중이었다. 1948년 1월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간본에 실린 작품 선별과 시집 편집은 오롯이 강처중이 도맡아 처리했다.

그리고 강처중은 이역 땅에서 원통하게 숨져간 절친 윤동주와 송몽규를 회상하며 애틋한 그리움을 담아 초간본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발문을 썼다. 강처중이 썼던 발문 가운데엔 시인 윤동주의 온화한 성품과 휴머니즘 가득한 인간적인 면모, 그리고 젊은 나이에 숨져간 친구들에 대한 그리움이 물씬 담겨 있다. 발문 몇 구절을 읽어보자.

“ 동주는 별로 말주변도 사귐성도 없었건만 그의 방에는 언제나 친구들로 가득 차 있었다. 아무리 바쁜 일이 있더라도 ‘ 동주 있나?’하고 찾으면 하던 일을 모두 내던지고 빙그레 웃으며 반가이 마주 앉아 주는 것이었다. ‘동주 좀 걸어보자구!’ 이렇게 산책을 청하면 싫다는 적이 없었다...(중략)...

‘동주 돈 좀 있나?’ 옹색한 친구들은 곧잘 그의 넉넉지 못한 주머니를 노리었다. 그는 있고서 안 주는 법이 없었고 없으면 대신 외투든 시계든 내 주고야 마음을 놓았다. 그래서 그의 외투나 시계는 친구들의 손을 거쳐 전당포 나들기를 부지런히 하였다...(중략) 그는 간도에서 나고 일본 복강에서 죽었다. 이역에서 나고 갔건만 무던히 조국을 사랑하고 우리말을 좋아하더니!

그는 나의 친구이기도 하려니와 그의 아잇적 동무 송몽규와 함께 독립운동의 죄명으로 2년형을 받아 감옥에 들어간 채, 마침내 모진 악형에 스러지고 말았다...(중략)...그들의 유골은 지금 간도에서 길이 잠들었고 이제 그 친구들의 손을 빌어 동주의 시는 한 책이 되어 길이 세상에 전하여지려 한다. 불러도 대답 없을 동주, 몽규였건만 헛되나마 다시 부르고 싶은 동주! 몽규!”

20대 젊은 나이에 먼저 간 친구들 이름을 다시 부르며 강처중은 발문에서 애틋하고 간절한 마음을 담아 그리움을 드러냈다. 실로 강처중 없는 윤동주 문학은 상상할 수가 없다. 윤동주의 시작 활동에 비평을 아끼지 않았던 삼총사였다. 윤동주의 유품을 고스란히 간직했다가 월남한 동생 윤일주에게 넘겨준 이도 강처중이었다. 그리고 남로당 지하활동 속에서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간본을 편집해 펴냄으로써 친구의 나라사랑과 우리말 사랑을 세상에 처음 알렸던 인물도 강처중이었다.

강처중은 윤동주 문학을 언급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윤동주가 연희전문 시절 절친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무명시인 윤동주를 항일민족시인으로 그 존재를 부각시키고 세상에 최초로 알린 인물이 강처중이기 때문이다.

시인 윤동주를 발굴한 친구 강처중을 이념의 잣대를 들이대 문학사 서술에서 배제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아쉬운 일이지만 1955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개정증보판이 나왔을 때 정지용의 서문과 강처중의 발문은 삭제된 상태로 출간되었다. 1950년대 무시무시한 이승만 철권통치를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1987년 6월 민주화운동 이후 그동안 월북작가(?)로 낙인된 ‘향수’ 의 시인 정지용이 언급되고 1988년 작품이 해금되었다. 그러나 강처중의 존재는 그 이후로도 금기시되었다. 송몽규의 조카이자 역사학자 송우혜 작가가 『윤동주 평전』 2차 개정증보판을 2004년에 펴내면서 강처중의 존재를 최초로 세상에 널리 알렸다.

그러나 2016년 영화 『동주』에 나오는 장면처럼 강처중은 아직도 세상 사람들 기억 속에 낯설기 그지없다. 영화 속엔 강처중(민진웅 분)이 나오지만 2016년 영화 『동주』는 겨우 송몽규(박정민 분)의 존재를 세상에 처음으로 알렸을 뿐이다.

송몽규를 열연한 배우 박정민은 20대 그 젊은 나이에 치열하게 살다간 송몽규라는 망각의 청년을 생각하며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고 하지 않았던가! 하물며 좌익인사 강처중은 영화 속에서라도 여전히 존재를 드러내기 더 어려웠을 것이다.

적어도 이젠 윤동주를 ‘민족시인’ 이라는 틀에 가두지 말고 ‘민족주의’ 를 넘어서서 인류 보편적 가치를 지향하며 세계 모든 사람들에게 울림과 감동을 주는 세계적인 시인으로 자리매김해야 한다.

좌우 낡은 이념에 갇혀 세인들 기억 속에 강처중을 배제시키고 망각의 인물로 거리두기를 시도하는 것은 시대에 뒤떨어진 낡은 사고이자 21세기 오늘의 시점에서 보아도 고루하기 그지없다.

더구나 강처중을 배제하고 윤동주 문학을 언급할 순 없다. 한국문학사를 객관적 사실에 기초해 올바르게 이해하는 데 윤동주의 절친! 강처중의 존재는 그 내용 면에서 더욱 풍요로움을 더할 것이라 생각한다.

윤동주가 연희전문 시절 쓴 ‛서시‛ 는 우리나라 청소년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가장 애송하는 시다. 그 ‛서시‛ 가 새겨진 ‛윤동주 시비‛ 를 연세대 교정에 처음 세운 인물이 성래운 교수이다.

성래운 교수는 윤동주의 ‛서시‛ 를 비롯해 300편이 넘는 민족시·민중시를 낭송했던 ‘낭송문학’ 의 대가이다. 한국근현대사를 시를 낭송함으로써 그 시대를 읊었던 음유시인이었다. 강의할 때나 결혼식 주례를 설 때도 성래운 교수는 감정을 실어 시를 읊었다. 심지어 검찰청 검사나 교도소 간수, 그리고 법정 판사 앞에서도 윤동주의 ‛서시‛ 를 낭송해 판사를 곤혹스럽게 했다.

▲ 성래운 교수가 1968년 연세대 교정에 세운 윤동주 시비.(출처 : 하성환) 

뒤에 보이는 건물이 핀슨홀인데 일제강점기 당시 윤동주, 송몽규, 강처중 3총사가 묵었던 공간이다.

성래운 교수는 1968년 11월 3일 학생의 날을 맞아 연세대학교 교정 핀슨홀 앞뜰에 ‛윤동주 시비‛ 를 세웠다. 그리고 ‛윤동주기념관‛ 이 연세대 캠퍼스에 세워진 것은 30년이 훨씬 더 지난 2000년이 되어서였다. 윤동주는 해방된 지 45년이 지난 1990년에 대한민국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았다. 1990년 8월 15일 뒤늦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서훈 받은 것이다. 송몽규는 5년이 지난 1995년 8월 15일에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앞으론 윤동주 문학을 이야기할 때 강처중을 빼놓을 수 없다. 함경남도 원산 출신 강처중은 1916년 부유한 한의사 집안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따라서 연희전문 핀슨홀 삼총사 윤동주와 송몽규보다 1살이 많다.

17살 되던 해 강처중은 동아일보에서 시작한 브나로드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1932년 8월 2일 방학을 맞아 고향에서 가까운 함경도 고평역에서 100명이 넘는 농민들에게 한글을 깨치게 하고 산수, 성경, 지리, 역사, 창가, 체조, 동화를 가르쳤다.

브나로드 운동의 책임대원이었던 강처중은 이듬해에도 책임대원이 되어 함경도 덕원군에서 한글을 가르쳤다. 강처중은 연희전문 문과 재학시절 전체 1~2등을 차지할 정도로 명석했다. 특히 영어에 능통해 ‘영어도사’ 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 활달한 성격에 리더십도 뛰어났다.

강처중, 윤동주, 송몽규 핀슨홀 3총사는 모두 문학에 남다른 애착과 재능을 보였다. 연희전문 4학년 시절 강처중은 문과 학생회인 ‘문우회’ 회장을 맡았고 송몽규는 문예부장을 맡았을 만큼 문학에 관심이 남달랐다. 그들은 함께 ‘문우회’ 잡지 ‘문우’ 를 발간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제말기 전시체제 아래 통제가 강화되면서 ‘문우’ 는 폐간되고 ‘문우회’ 조차 해산당하는 불운을 맞았다.

연희전문 기숙사 3총사 가운데 두 친구의 죽음을 맞은 강처중! 1948년 초간본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발문에도 썼듯이 아무리 불러도 그리움만 가득한 두 친구, 동주와 몽규에 대한 애틋한 감정은 70년이 지난 오늘에도 강처중이 쓴 발문을 읽다보면 애틋함을 넘어 애잔하기 그지없다.

윤동주가 만난 또 다른 인물 가운데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박치우가 있다. 윤동주가 1935년 9월부터 1936년 3월까지 7개월 동안 숭실중학교를 다녔을 때 박치우를 알게 된다. 당시 박치우는 숭실전문학교 교수였다. 둘의 만남과 교류를 가능하게 했던 공간은 숭실학교 ‘학생 YMCA 문예부’가 발간했던 「숭실 활천」이었다.

이 잡지에 교직원, 학생, 졸업생들 글이 실렸는데 윤동주는 자신의 시 가운데 최초로 활자화된 ‘공상’ 을 실었다. 박치우와 졸업생 황순원도 이 잡지에 글을 실었다. 그렇게 시작된 윤동주와 박치우의 인연은 숭실학교가 신사참배 문제로 강제 폐교당한 뒤에도 이어졌다.

▲ 1930년대 후반으로 추정되는 박치우와 아내(출처 : 한겨레 자료사진)

경성제대 재학 시절, 일본인 스승으로부터 <일본에도 없는 천재>라는 극찬을 받았던 철학자 박치우는 1936년 김종숙과 결혼한다.

숭실전문학교에서 나온 박치우는 1938년 4월 조선일보 학예부 기자로 자리를 옮겼다. 그 시기 윤동주는 연희전문학교에 재학 중이었는데 조선일보 학예란에 작품을 기고하고 있었다. 그렇게 둘의 교류는 지속되었다.

이러한 교류 사실은 윤동주의 유품 가운데 1941년 7월 17일 박치우가 윤동주에게 보낸 엽서에서도 확인된다. 둘의 친분이 있었다는 사실은 종로구 누상동 9번지 소설가 김송 집에서 하숙할 당시 받은 엽서에 나타난다. 박치우는 제기동 “자신의 집으로 찾아올 때 집에 있는 개를 조심하라” 며 자상하게 주의를 당부하는 글귀도 눈에 띈다.

실제로 윤동주는 박치우가 숭실전문학교 교수 시절 동아일보에 소개한 ‘국제작가대회’ 행사에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유럽사회에서 대두된 파시즘에 대항해 1935년 6월 파리에서 개최된 ‘국제작가대회’는 문학청년 윤동주로 하여금 주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세계적인 작가 토마스 만, 로맹 롤랑, 싱클레어 루이스, 버나드 쇼, 막심 고리키 등 38개국 230명 작가들이 참석한 행사였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1940년 『인문평론』에 작가이자 하숙집 주인인 김송의 희곡작품과 박치우의 평론이 실렸는데 당시 윤동주는 『인문평론』을 읽고 있었다. 적어도 윤동주가 1942년 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기 전까지 둘의 만남은 지속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1943년 7월 윤동주가 방학을 맞아 귀향 준비 중일 때 일본 특별고등계 형사 고오로기에게 체포되던 그 시기에 박치우는 1943년 봄 이육사와 함께 경성콤그룹 관련 모종의 임무를 띠고 중국 항일전선에서 활동 중이었다.

이육사는 해방 1년 7개월을 앞두고 베이징 주재 일본 영사관 감옥에서 피를 낭자하게 흘리며 고문 끝에 죽어갔다. 함께 투옥돼 이육사의 시신을 거둔 이병희가 경성콤그룹 활동가였음을 이해할 때 이육사와 박치우는 매우 연관성이 높은 임무를 띠고 활동했을 가능성이 높다.

의열단 출신 사회주의자 이육사가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박치우와 함께 수행했던 임무는 국내외 항일독립운동세력을 연계시키는 모종의 임무였을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해방 6개월을 앞두고 윤동주와 송몽규가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죽지 않고 해방을 맞았다면 윤동주와 박치우는 해방 이후 어떻게 삶을 이어가며 교류했을지 실로 궁금하다. 해방이 되고 박치우는 곧장 귀국하지 않고 장춘에서 경성콤그룹 활동을 마저 수행하고 뒤늦게 귀국했다.

박치우가 조선일보 학예부 기자로 들어간 1938년 4월에 조선일보 학예부장이 이육사의 동생 이원조였다. 이원조는 일찌감치 일본유학 시절 사회주의를 받아들인 인물로 일제강점기 카프 소속은 아니지만 부르주아 문학 전반에 대해 날카로운 비평을 쏟아내고 있었다. 박치우와 이원조는 해방 직후 남로당에 가입해 정치노선을 함께 했다.

해방 공간 좌파언론 『현대일보』 발행인 겸 주간이 박치우였고 편집국장이 이원조였을 정도로 둘은 돈독한 관계였다. 특히 박치우는 박헌영이 북쪽 김일성을 만나러 갈 때 세 번이나 수행했던 비서이자 남로당 핵심이론가였다.

실제로 박치우는 박헌영의 지시로 강동정치학원을 설립해 정치부원장을 맡아 사상교육을 담당했다. 그러다가 1949년 9월 6일, 직접 강동정치학원 출신 1병단 360명을 이끌고 남쪽 빨치산 유격투쟁에 정치위원으로 참가했다. 그리고 그해 11월 말 군경토벌대와 교전 중 죽음을 맞았다.

윤동주와 숭실학교에서 만나 조선일보 학예란을 통해 교류했고 그 만남은 1941년 7월에도 계속되었다.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박치우와 항일민족시인 윤동주의 만남은 윤동주와 강처중의 우정만큼이나 친분이 깊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해방이 곧 분단으로 귀결되고 전쟁으로 고착되면서 윤동주의 삶과 문학에 깊은 영향을 미친 강처중과 박치우는 역사 속에서 배제되었다. 아예 역사의 그늘에 갇혀 수십 년 동안 망각의 존재가 되었다.

이제 윤동주 문학을 비롯해 한국문학사를 객관적 사실에 기초해 더욱 풍부하게 재구성하고 재조명할 시점이다. 더 이상 낡은 이념을 앞세워 문학사가 편향된 시각으로 기술되는 것에서 조금은 벗어나야 하지 않겠는가!

편집 :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ethics6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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