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은 속되다는 집단 무의식에서 벗어나야...
술과 춤 (필명 김자현)
삼십 년 전 등단 초기 <술과 글>, <음주예찬>이라는 수필로 가부장적인 사회에 여자로서는 참으로 어이없는 글을 몇 편 발표 한 일이 있다. 그러나 지금도 필자의 글을 접하지 못한 분들은 여전히 술도 하시냐고 잔을 기울이는 나만 발견하면 수정체를 크게 하고 묻곤 한다. 술은 한 잔도 못 하게 생겼다는데 어떻게 생긴 여자라야 술을 잘 하게 생긴 건지 모르겠다.
과묵한 남자보다도 더 말이 없다는 평을 들을 정도로 지나치게 찬 성격이었다. 대체 술이라도 취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우물에 빠진 듯 내 성격에 자신이 덜미를 저을 때도 있다. 술이란 이름을 빌려 협소한 마음을 넗히고 평소에는 느끼지 못하는 흥도 불러내고 주신과 접신이 되면 서양의 박커스 아니면 디오니소스와 축배를 들 수도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더구나 문단에 나오고부터는 술자리 기회가 더 잦았다. 한 잔을 한 초저녁이나 빈 병이 늘어가는 심야가 되어도 나는 술을 축내거나 안주를 축내는 일밖에 변화가 없었다. 내가 생각해도 하등 술을 마셔야 할 이유가 없잖은가. 두 시간 세 시간, 밤을 새워도 똑같은 자세로 그저 침묵만 지킬 뿐이었다. 시쳇말로 정말 재수 없는 인간 아니었을까. 나는 정말 취하고 싶었다. 그 기분은 어떤 것인지, 취한다는 것이 어떤 경지인지 알고 싶었지만 많이 마셔도 절대로 취하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단에 나오고서도 한참 있다가 문단의 노시인, 지금은 돌아가신 정공채 시인을 만나게 되었다. 어느 년 말 모임에서 수필을 낭독할 기회가 있었다. <불혹지년>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낭독이 끝나자 총원의 함성과 함께 그 저녁 가장 노장이었던 정공채 시인 곁으로 불려가면서 그분과 친분을 갖게 되었다.
그 이후 어느 날 문단의 선후배들과 그 정공채 선생을 모시고 술판이 벌어졌는데 저녁 시간이 다가오자 모두들 저녁을 한다고 약속이 있다고 하나둘 자리를 박차고 떠나는 것이다. 나는 도저히 그분을 두고 떠날 수 없었다. 아이들도 다 자라지 않았던 터라 저녁 시간에 외유란 상상도 못 할 시절이었던 때다. 가슴이 바작바작 타기는 나도 마찬가지이지만 그분이 곤궁한 분이 아니었다면 나도 용기를 낼 수 있었으리라.
5공 시절 <미팔군의 차>라는 장시를 현대문학에 발표하므로써 문단의 실력자 정공채 선생은 남산에 불려 다니면서 인생이 급전직하로 떨어진 분이다. ”시“ 라는 장르를 통해 미 제국주의를 통렬히 비판하고 우리나라의 명운을 짚으셨던 그분의 미팔군의 차는 당시 북한 정권이 잽싸게 노동신문에 인용하면서 미 제국주의 비판에 활용했던 것이다. 당연히 미 첩보국을 통해 미팔군의 차는 우리 청와대로 방첩대로 이첩되어 당시 MBC 피디 1기생이었던 시인은 파출되고 연대 정외과 출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후 어떤 곳에도 취직을 할 수 없이 곤궁한 삶을 사시다 돌아가셨다.
초한지를 번역한 분이기도 했는데 그분의 박식은 문단이 알아주는 바요, 글 쓰는 작가들 중에 주먹이 세기로 우열을 다투는 지경이었다. 문단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어떤 비열한 노장은 이분에게 뚜드려 맞기도 했던 강직한 성품으로 주먹의 실력자였다.
그분과 필자가 조우를 시작하던 시기는 도저히 헤어나올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이미 위천공을 겪었으나 술이 아니면 하루도 지탱할 수 없는 그분이었다. 이 분이 변두리로 밀려난 시인이 아니고 문단의 잘 나가는 시인이었다면 그 날 저녁 그분을 두고 모조리 떠날 수 있었을까. 그때나 지금이나 그토록 약은 것이 세상이다.
이미 나보다 십오 세 정도 나이 차이가 나는지라 남성으로도 보이지 않는 남성이어서 긴장은 덜하고 함께 하던 사람들이 모조리 떠나고 나자 선생님은 소주로 주류를 바꾸자는 것이다. 그날 처음 그린 소주라는 것을 맛을 보았는데 설탕물처럼 맛이 좋았다. 아니 소주라는 것이 그렇게 달콤한 술인 줄이야 어찌 알았을까.
문학 예술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철학 지리 역사 거침없는 그분의 입담에 시간 가는 줄 몰랐으며 나는 처음으로 정신에 열기가 솟으며 조금씩 열락이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어둑어둑 일몰이 지난 귀갓길은 지면에서 발이 둥둥 떠가는 것 같았다. 물리적으로 몸이 흔들린다는 것이 아니라 어딘가에 붙들려 있던 정신의 출애굽을 경험한 것이다.
그날에 이르러 드디어 나는 그렇게 열망하던 취기를 오지게 접했다. 그 질기고 투박한 자기 통제의 갑옷을 벗고 진정 자유롭고 나다운 나로 태어난 것이다. 이후로 나는 좋은 안주와 소주를 보면 그 날처럼 되고 싶다, 에 빠져든다. 주신과 접신이 되는 그 순간의 색채는 얼마나 감미로운 것인가. 갇혀있던 물꼬가 트이고 가능한 모두를 수용하고 너그러울 수 있는 그 흔연한 물길, 그 날의 최초의 경험으로 나는 그 날 이후 재수 없는 인간에서 모두들 환호하는 인간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그 전 나는 술이 절대로 못 취하는 것처럼 또한 뻣뻣한 몸치였다. 그런데 그날 이후 정신의 자기 방출이 되자 몸도 아주 자연스럽게 리듬을 탈 수 있는 것을 느꼈다. 누구든 그 뻣뻣한 몸치 속에는 유치한 자기기만의 뼈가 박혀있다.
춤은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몸짓이다. 몸치 속에는 가부장적인 인습의 뼈, 성리학적 염치와 체면의 뼈, 선비의식의 뼈, 교육과 학습의 뼈, 각자 개인이 만들어낸 정체불명의 뼈들이 곳곳에 박혀있다. 이 뼈들이 박힌 몸은 곡선을 그을 수 없으며 리듬을 탈 수 없다. 온전한 자유 정신, 원초에 자신을 열 수 있어야 흐르는 리듬에 자신을 던질 수 있다.
지금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일정 의도된 춤사위, 안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어떤 음악에든지 리듬에 자신을 내어줄 수 있는 몸짓을 말하는 것으로 이것은 온전한 탈아이며 정신의 완전한 자유 속에서 난무할 수 있는 자유 의식의 흐름이다.
술을 하다가 합창이나 제창은 어느 그룹이나 이제 자연스러워졌다. 그런데 춤은 아직도 어둡고 음침한 곳에서만이 존재한다. 춤추는 것은 속된 것이라는 집단 무의식에서 탈피할 필요가 있다. 춤은 가장 인간다워지는 순간이며 자유로운 영혼이 자기 자신을 만나는 것이며 사회와 혹은 자신의 억압에서 풀려나는 일이다. 지하에서 지상으로 밤에서 낮으로 이행되어야 한다. 일정 그룹과 지역민의 군무가 가능할 때 사회적 병리를 벗고 건전한 문화가 형성, 자리 잡을 수 있을 것이다.
편집 : 심창식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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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주건 양주건, 위스키, 브랜디, 꼬냑 구분을 못하고 그냥 '쓰다'고 인식합니다.
가끔 폼 잡는다고 요강단지 뒤집어졌다는 복분자나 백세주도 한 잔 마셔봤지만 남의 금쪽 같은 귀한 술 도둑질했다는 죄책감만 들었지요.
김승원 통신원의 유쾌한 글 '술과 춤'을 보니, 언젠가 만나뵙게 된다면 술 석잔을 청해서 마셔보렵니다.
생각만 해도 신이 나네요!
흥겨운 술과 춤을 벗하면 모두가 행복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