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월읍 <물메 마을> 지역은 제주 역사 변란의 중심에서 비켜간 적이 없어

​수산봉 자락에서 내려다보이는 풍광, 수산저수지 너머 넓은 들판을 지나면 멀리 한라산줄기가 동서로 길게 뻗어 풍광이 뛰어난 곳이다.
​수산봉 자락에서 내려다보이는 풍광, 수산저수지 너머 넓은 들판을 지나면 멀리 한라산줄기가 동서로 길게 뻗어 풍광이 뛰어난 곳이다.

2020년 11월 9일, 밀양의 배 선생과 고향 친구 창희는 제주 애월읍 수산리 사무소에서 수산리가 고향이면서 고교 교장 출신인 영수 친구의 안내를 받아 예원동의 포제단과 상귀리의 ‘황다리 궤당’을 탐방했던 이야기를 쓴 바가 있다. 영수 친구가 마을 일로 바빠서 오후에는 우리끼리 마을을 둘러보았다.

내가 이곳 수산리를 꼭 한 번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고등학교 친구이면서 전직 고교 교장 출신인 문영택 선생이 제주일보에 연재하는 기획 기사들 중, 몇 회차에 걸친 수산리 소개를 보면서이다. 문영택 교장은 향토사학자로서 2018년 <탐라로 떠나는 역사문화기행>이란 저서를 출간하여 문광부 우수도서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현재 <(사)질토래비> 이사장을 맡고 있으면서 제주의 역사와 문화를 소개하는 저술 활동과 제주 문화 탐방을 이끄는 활동을 왕성하게 하고 있다.

필자는 <수산리>에 대하여 사전 지식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문 이사장이 제주일보에 쓴 칼럼을 보면서 <수산리>의 설촌과 관련된 인물들과 그와 관련된 이야기들, <수산리>의 자연환경, <수산리>의 역사, 관련된 문화유산들, 제주 격변의 역사 속에서 <수산리>와 관련된 역사적 사건들...... 등을 많이 알 수 있었지만 <수산리>를 방문했던 11월 9일 오후의 다른 일정 때문에 마을 곳곳을 구석구석 살피고 오지 못한 것이 아쉽다. 그렇지만 다음에 다시 한 번 찾아 궁금한 곳들을 더 세세히 찾아보아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위안을 삼는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당일 <수산리>에서 보고 느꼈던 것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수산리>는 중산간 마을이지만 마을 주변에서 용천수가 여러 곳에서 솟아나고, 수산봉 정상에도 샘이 솟아 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않는 고장이다. 이 사진은 자유당 때 수산천을 막아 물을 저장한 수산천 저수지이다. 
​​<수산리>는 중산간 마을이지만 마을 주변에서 용천수가 여러 곳에서 솟아나고, 수산봉 정상에도 샘이 솟아 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않는 고장이다. 이 사진은 자유당 때 수산천을 막아 물을 저장한 수산천 저수지이다. 

물의 고장 물메 마을<수산리>

수산리는 520여 가구에 1,300여 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는 큰 동네이다. 수산리는 큰 동(본동), 동동, 서동, 당동, 예원동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수산리로 가서 영수 친구를 만나기 위하여 리사무소를 찾아가는데, ‘물메초등학교’ 옆이라 하여 수산리에서 처음 찾은 곳이 <물메초등학교>이다. 그래도 수산초등학교라 하지 않고 ‘물메’라는 옛 지명을 살려 학교 이름을 지었다는 것이 반가운 생각이 들었다. 인터넷 검색을 해 보았더니 전교생 110명의 작은 시골 학교지만 물메 오름을 바라보면 지어진 아담한 학교였다.

수산리 일대에는 샘과 못이 많다. 이곳은 '큰섬지'로서 옛날부터 이 고장 사람들이 식수로 많이 이용 되었던 곳이다. (사진; 포항나래산악회)
수산리 일대에는 샘과 못이 많다. 이곳은 '큰섬지'로서 옛날부터 이 고장 사람들이 식수로 많이 이용 되었던 곳이다. (사진; 포항나래산악회)

<수산리(水山里)>라는 지명은 일제 강점기 때 지어진 지명이다. 원래 이 마을의 지명은 순수한 우리말인 ‘물메’ 또는 ‘물미’라고 불리었다고 한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물뫼’(물의 산)이라고 불렀어야 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다. 하지만 발음을 하기에 ‘물뫼’가 불편하여 사람들이 입에서 입으로 동네 이름을 부르다 보니 발음이 편한 ‘물메’ 또는 ‘물미’라 부르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수산리>라는 마을 이름을 보면서 일본 제국주의의 우리 문화 말살 정책의 한 단면을 보면서 일제를 비난하지 않을 수 없다. 옛날부터 제주에는 마을 이름이나 지명, 오름 등의 이름을 지어 부를 때 지역의 자연이나 삶의 모습 등이 배어있는 지명을 찾아 불렀다. 이곳 <물메>만 하여도 수산봉 정상에 마르지 않은 샘이 있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이 마을이 바닷가에 있지 않지만 마을 주변에는 <큰섬지>를 비롯하여 <동녘샘지>, <새샘지> 등 샘이 많고, <뒷못>, <여웃못>, <장동못>, <예원못>, <감남새미(泉)> 등 못이 많아 식수는 물론 생활용수, 농업용수 등을 이용하는데 큰 불편함이 없는 지역이다.

올레 16코스가 지나는 뛰어난 경관을 지닌 물메 오름과 마을

고내포구에서 시작하여 신엄, 구엄 포구를 지나 수산봉, 예원 마을, 항파두리 등을 지나 광령1리까지 이어지는 제주올레 16코스 지도이다.
고내포구에서 시작하여 신엄, 구엄 포구를 지나 수산봉, 예원 마을, 항파두리 등을 지나 광령1리까지 이어지는 제주올레 16코스 지도이다.

마을을 잠깐 둘러보고 수산봉을 오르면서 보니 제주 올레길 표시들이 많이 되어 있었다. 이곳이 제주 올레 16코스가 지나가는 것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제주 올레 16코스는 다른 올레길들이 대부분 바닷가를 끼고 나 있는데 비하여 이곳은 <고내포구-신엄포구-구엄포꾸-수산봉-물메초등학교-예원복지회관-항파두리-고성천-광령1리사무소>

<수산봉>을 오르는 나무숲 길, 올레 16코스 길이다.
<수산봉>을 오르는 나무숲 길, 올레 16코스 길이다.

의 코스로 이어진다. 대부분의 올레코스는 바닷가를 끼고 나 있는데, 16코스는 바닷가에서 시작하여 중산간의 광령1리까지 이어진다. 왜 이렇게 코스를 짰는지 미스터리다. 추측컨대, 수산봉과 항몽유적지인 항파두리를 거치게 짜다보니 그렇지 않았을까?

아무튼 올레길을 걷는 사람들은 수산리 일대에서는 여유를 갖고 마을도 둘러보고 밭담길도 걸어보고, 이웃마을에 있는 예원동 포제단과 상귀리의 <황다리 궤당>을 꼭 들러서 제주의 숨어있는 신당문화를 느껴보라고 권하고 싶다.

수산리 일대에는 농림축산식품부로부터 지원을 받아 100인의 시비가 마을 곳곳에 세워져 있다. 이곳 출신 시인 송두영 시인의 시도 수산저수지 제방 인근에 있다.
수산리 일대에는 농림축산식품부로부터 지원을 받아 100인의 시비가 마을 곳곳에 세워져 있다. 이곳 출신 시인 송두영 시인의 시도 수산저수지 제방 인근에 있다.

또 하나, 수산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100인의 시인들의 시비이다. 농림축산식품부로부터 일반농산어촌개발사업 공모에 선정이 되어 39억원의 예산을 지원받아 2020년에 완공이 되었다 한다.

마을 구석구석에는 시비들이 즐비하다. 그 시비들 중에는 이곳 출신 송두영 시인의 시비도 세워져 있다.

‘있는 듯 없는 듯 둑 길을 넘던 바람 / 수몰된 밭과 집터에 손에 잡히는 옛 추억 / 까치발 치겨 세우는 내 고향, 어린 동심 / 시퍼렇게 어둠을 헤쳐 달려온 별빛 / 아롱진 얼굴들 저수지 수면에 채우면 / 세월을 헤집어 세운 수몰마을 수산리 하동’

필자는 이곳에 세워진 100인의 시비들을 보면서 ‘글쎄?’라는 의문이 들었다. ‘저 시비들이 이 고장 사람들의 시도 아니고, 저렇게 많은 예산을 들여 한 번 보고나면 그 다음 눈길을 주기 쉽지 않을 텐데, 웬 시비?’ 하기야 요즘은 살아있는 사람의 동상이나 시비까지 세우는 세상이니까......

이렇게 물 많은 지역이라는 자연의 이로운 점도 있지만 불익을 당하는 점도 있다. 자유당 때는 이곳 마을 가운데를 흐르는 수산천을 막아 저수지를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천변에 있던 동네 사람들이 강제 이주 당하면서 고통을 받았다.  처음 저수지를 막을 때야 그 물을 이용하여 논농사 등 농사짓는데 이용하려고 했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한동안은 저수지 주변에 유원지와 상업시설들이 들어서서 저수지를 오염시키기도 하였다가 지금은 철거되어 저수지가 잘 정비되었다.

많은 양반 사대부들이 제주로 피난하여 자리 잡은 길지

'수산 저수지' 제방 건너에 보이는 나즈막한 오름이 <수산봉(물메 오름)>이다.봉수대와 망루가 있어 군사가 주둔하였고, 수산리를 감싸고 있어 주변에 많은 문화유적들이 있다. 올레 16코스가 지나간다.
'수산 저수지' 제방 건너에 보이는 나즈막한 오름이 <수산봉(물메 오름)>이다.봉수대와 망루가 있어 군사가 주둔하였고, 수산리를 감싸고 있어 주변에 많은 문화유적들이 있다. 올레 16코스가 지나간다.

<수산리>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수산봉(물뫼 오름)>이다. 이 일대에서는 유명한 오름이다. <수산봉>이 겨울에 불어오는 서북풍을 막아주면서 딱 버티고 있고, 오름 앞으로는 <수산천>이 흐르고 있고, 앞에는 원벵듸의 너른 벌판이 펼쳐져 있다. 거기에 더하여 저 멀리에 있는 한라산 줄기가 조산 역할을 해주고 있으니 명당이요 길지가 아닐 수 없다. 이런 지형이니 고려시대 때부터 일찍이 마을이 형성되어 사람들이 모여살기 시작했다. 육지에서 여러 가지 사유로 제주로 피난온 양반 사대부들이 이곳을 찾기 시작했는데 그 수가 점차 늘어났다.

문영택 <(사)질도래비> 이사장의 제주일보 기고문을 보면, “진씨(秦氏)가 설촌했다 해서 주진촌(住秦村)이라고도 불리는 수산리는 유독 수산파라 불리는 입도조들이 많은 편이다. 그중 남평문씨 수산파 입도조인 문맹현, 밀양박씨 입도조인 박후신, 이천서씨 입도조인 서희례” 등에 대하여 쓰고 있다. <수산리>는 이렇게 ‘수산파’라 불릴 정도로 이 고장에 자리잡고 번창한 성씨들이 많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이곳 수산리는 역사의 중요한 변곡점에서 비켜가질 않았다.

수산리는 고려 때부터 마을이 형성되어 사람들이 살았는데, 조선 시대에는 양반 사대부들이 육지에서 피난처로 많이 들어와 자리를 잡았던 곳이다. 이 고장에서는 과거 급제자 등 많은 인재들이 배출되었다. 이 고장 곳곳에는 이런 인물들의 묘가 있고 그 자손들은 '수산파'라 부를 정도로 번창한 문중들이 많다.
수산리는 고려 때부터 마을이 형성되어 사람들이 살았는데, 조선 시대에는 양반 사대부들이 육지에서 피난처로 많이 들어와 자리를 잡았던 곳이다. 이 고장에서는 과거 급제자 등 많은 인재들이 배출되었다. 이 고장 곳곳에는 이런 인물들의 묘가 있고 그 자손들은 '수산파'라 부를 정도로 번창한 문중들이 많다.

많은 인물을 배출하고 역사의 격변기를 피해 가지 않는 절의의 고장

(사)질도래비 문영택 이사장이 제주일보에 기고한 글들을 보면 다음과 같은 역사적 인물들과 사건들을 살펴볼 수 있다.

삼별초의 대몽항쟁이나 이를 토벌하러 내도한 여몽연합군이 이곳으로 상륙을 하여 항파두리 등 이 일대에서 큰 싸움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목호의 난 때는 최영 장군이 명월포와 애월포 등으로 상륙하여 목호들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고 한다. 제주는 조선시대에 출륙 금지령과 멀리 떨어져 있는 절해고도라서 과거에 응시할 기회가 적었다.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과거 합격자가 적을 수밖에 없다.

큰 흉년이 들거나 반란이 일어날 때 이곳 제주인들을 위무하기 위하여 이곳 현지에서 과거를 치른 적도 있다한다.  이곳 출신 홍달훈이 정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 좌랑 등을 지냈고, 철종 때는 고경준이 문과 별시에 뽑혀 제주 판관을 역임하기도 할 정도로 과거 합격자가 원체 적은 제주지역임에도 불구하고 이곳 수산리에는 제주의 다른 지방에 비하여 과거 급제자를 배출하고 있는 것도 특이하다.

정여립의 난관 관련된 인물인 길운정, 소덕유의 난, 철종 때 일어난 김지의 난 등도 이 지방 출신들과 관련 있다. 이재수의 난 때는 이마을 사람들이 직접 가담하거나 식량 등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역사의 격변의 시기를 피해 가지 않았던 지역이다.

제주만이 갖고 있는 설치 미술의 걸작품 ‘밭담’, 그 중의 하나인 <물메 밭담길>

세계식량농업국에 농업 유산으로 동록이 된 제주 밭담들 중에 유명한 곳 6곳이 선정되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이곳 <물메 밭담>이다.
세계식량농업국에 농업 유산으로 동록이 된 제주 밭담들 중에 유명한 곳 6곳이 선정되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이곳 <물메 밭담>이다.

제주에는 제주만의 고유하면서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은 자연, 인공 유산들이 있는데, 제주 ‘밭담’이 유명하다. 제주도는 화산이 폭발하면서 생긴 섬이기 때문에 화산탄, 화산력, 용암이 흐르면서 굳은 현무암 바위, 빌레 등 제주는 돌 세상이다. 제주 전역에 널브러진 이 돌들을 치워 밭의 경계를 삼고, 방목하고 있는 소나 말들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는 울타리, 바람 많은 제주에서 바람을 막아주는 등 그 기능이 다양하다. 

그 밭담이 제주를 찾는 외지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어찌 보면 제주 전 지역을 대상으로 하는 설치미술작품인 것이다. 그 밭담 안에 피어 있는 유채꽃이며 보리가 익을 때 출렁이는 황금물결 또한 밭담과 조화를 이룬 설치미술 작품의 한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이 밭담은 세계식량농업기구에 의하여 세계농업유산으로 지정이 되어 있다. 그 길이가 24,000km로 만리장성의 3배에 달한다고 하니 이거야말로 농업유산만이 아닌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되어야 할 것이 아닌가? 

성산읍 신풍리의 <어멍아방 밭담> 등과 같이 제주에는 여섯 곳의 유명한 밭담이 있는데 이곳 수산리 <물메 밭담>도 그 중의 하나이다. 필자는 <물메 밭담길>을 다 걸어보지는 못했지만 제주에서도 그 명성이 높은 밭담길이니 다음에  꼭 한번 걸을 거라고 다짐하고 있다.

수산 저수지를 가운데에 두고 <물레 밭담길>이 조성되어 이 있다. 밭담이 하나의 설치미술품이 아닌가 생각된다.
수산 저수지를 가운데에 두고 <물레 밭담길>이 조성되어 이 있다. 밭담이 하나의 설치미술품이 아닌가 생각된다.

제주 최고의 숨은 역사와 문화를 간직한 <수산리> 탐방을 적극 권장하고파

필자의 고향인  제주 호근리도 이곳 수산리 못지않게 오래 역사를 갖고 있는 마을이다. 제주에서 노거수가 가장 많았고, 돌담길, 마을길, 올레길, 동백나무 마을 숲 등 참 아름다운 동네이다. 하지만 한라산 남쪽에 자리 잡고 있어서 육지와 왕래하는 일이 잦지 않아서 육지와 문물 교류나 역사적 사건들과는 좀 비켜 앉아 있는 동네이다. 그렇지만 이곳 <수산리>는 물로 애월 일대에는 목호의 난, 삼별초의 난 등 고려시대의 변란들의 중심에 있었음을 확인하면서 이 지역주민들의 고초를 생각해 보게 한다.

그렇지만 이 일대에는 넓은 들이 있고, 제주의 그 어떤 지역보다 물이 풍부할 뿐만 아니라 공동 목장이 있을 정도로 농, 축산, 어업 등 산업 활동이 활발하고 살기 좋은 동네라서 부럽다.

수산 저수지가에 있는 수령 400년의 곰솔이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수산 저수지가에 있는 수령 400년의 곰솔이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더구나 수산봉(물메 오름)을 배경으로 앞에는 수산천이 흐르고 저 멀리 한라산이 아스라이 보이는 풍광이 매우 뛰어나다. 그러니 풍수적으로도 제주에서는 보기 드물게 길지로 보인다. 그러니 예로부터 제주로 낙향한 양반 사대부들이 터를 잡아 그 후손들이 번창하였다. 또한 과거 급제자가 나올 정도로 인재들을 많이 배출하고 있다. 역사가 부침을 거듭할 때도 피해 가지 않고 절의를 지키며 제주 역사의 중심에 있었던 이 마을이 더욱 번영하기를 기대해 마지않는다. 더욱이 마을의 역사, 문화를 더욱 발굴해 내기 위하여 (사)질토래비와 업무협약을 체결하여 노력한다니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제주 역사, 문화의 숨은 진주 <수산리>를 많이 알게 해 준 친구 문영택 이사장과 양영수 전 교장께도 감사드린다. 마침 이곳이 올래 16코스가 지나가는 지역이기도 하니 올래꾼들과 여행객들이 많은 내방이  있기를 기대한다.

편집 : 김동호 편집위원

김광철 주주통신원  kkc082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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