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북선이란 이름은 언제부터였을까?

거북선 말만 하면 우리들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자랑을 한다. 그러나 거북선에 대해서 묻는다면 그냥 막연하게 대단한 배였다고 자랑만 할 뿐이다. 자랑을 하면서도 우리는 거북선에 대해 너무도 모르고 있다. 세계의 해전사에서 23전 23승이란 전쟁은 없었다. 이순신이란 명장이 있었기에 거북선은 더 빛을 발했을 것이다. 그러나 거북선이 없었다면 이순신도 명장이 되지 못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거북선이 언제부터 우리의 전선으로 사용하였을까? 우리는 일찍이 이렇게 훌륭한 군선을 우리 손으로 만들어 나라를 지켜냈다. 거북선에 대하여 그동안 여러 학자들이 많은 연구를 해왔고 지금도 하고 있다. 

현재의 거북선이 만들어지기 까지 심혈을 기우려 오랜 산고 끝에 태어난 거북선이 자료의 부족함 때문인지 아니면 이해의 부족함인지 도(櫂,棹)를 설치하였다가 다시 노(櫓)로 바꾸는 등 많은 시행착오를 겪는 어려움이 있었다고 한다. 오직 문헌상의 기록으로만 처리를 하려다 보니 그랬을 것이다. 배를 직접 제작하는 기능인들을 동참시켰다면 그러한 일들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분들이 있었기에 오늘날 우리의 자랑인 거북선이 만들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수많은 거북선 모형들이 각기 다른 모양으로 만들어 지고 있어, 아직도 거북선은 이렇게 생겼다고 자신 있게 말 할 수 없는 것이 또한 현실이다. 우리 선박사에 큰 족적을 남기신 고 김재근 선생은 '거북선의 신화(1978)와 거북선(1992)'이란 저서의 말미에 거북선에 참모습을 찾는 길은 우리 모두가 환상을 버리고 겸허한 마음으로 그것을 대하는 데서부터 재출발해야 한다고 써 놓았다.

선생의 말처럼 우리는 이제부터라도 환상이나 상상과 아집을 버리고 학자와 기능인들이 다 같이 마음을 비우고 거북선을 연구하고 제작하여야 한다. 학자들은 학술적으로, 기능인들은 기술적인 면을 연구하고 토론하여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없고 공감할 수 있는, 우리의 자랑인 거북선을 새롭게 탄생시켜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세상을 먼저 살다 간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일 것이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거북선에 관한 기록들을 살펴보자. 우리의 사서에 거북선이 처음으로 기록된 것은 태종13년의 기록으로 임금이 임진강변을 행차하다 거북선과 왜선(倭船)으로 꾸며서 수전(水戰) 연습을 하는 것을 보았다는 기록이 최초이고 , 태종 15년에 좌대언(左代言) 탁신(卓愼)이 태종에게 구선(龜船)에 관하여 말하기를 구선의 전법은 적중에 뛰어들어 적선과 충돌하여도 적이 능히 해하지 못하니 결승의 좋은 계책이니, 견고하고 교묘하게 만들어 전승(戰勝)의 도구로 삼자고 하였다. 이 기록은 임진전쟁이 일어나기 179년 전의 기록이다.

그럼 거북선을 최초로 만든 시기가 이때라고 할 것인가? 기록에 처음 나타난 것이 이때라고 해서 처음 만들어진 때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 기록이 처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 이때 임금이 그 모습을 보지 못했다면 기록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배의 제도는 짧은 돛대를 뱃머리에 세웠고 배 허리에는 긴 돛대를 세웠다. 정박(碇泊)하면 이 돛대를 뉘어서 뜸의 들보로 삼는다. 배 위는 모두 판자로 덮어서 거북의 등처럼 생겼다. 아무리 심한 비바람을 만나도 터지거나 새는 근심이 없다고 했다. 이 배는 참으로 편리하게 만들어졌다.

이러한 기록으로 볼 때 태종대 이후에도 배의 등을 가린 배들이 계속해서 만들어지고 있었다고 보여 진다. 다만 거북선이란 이름의 배가 기록되어 있지 않았을 뿐이지 거북선이거나 그와 유사한 배들이 있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때에 구선이라는 이름을 한 전선이 있었다는 사실을 중시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수군들은 이미 지붕을 덮어서 시석을 막을 수 있는 전선을 만들어 사용하였고, 이 배를 구선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이순신이 처음으로 거북선을 만들어(創製) 낸 것은 아니라고 본다.(여한십가문초 제8권 한 연천 홍석주 문[韓洪淵泉文]을 보면 관음포 유허비(觀音浦遺墟碑)의 내용 중 큰 거북 건장한 매(穹龜健鶻)라는 구절에서 충무공은 거북선을 창조하여 쾌골(快鶻) 자로 표시하였다.)

역사의 기록이나 구전 등을 통하여 그러한 구선이 있었음을 알고 임진왜란 당시의 공법으로 사용하기에 보다 편리하도록 개조하여 새롭게 만들었을 것이다. 이 기록을 마지막으로 임진왜란 때까지 사서의 기록에 거북선이 기록된 적이 없다고 한다. 아마도 임진왜란 때까지는 큰 전쟁이 없어서 기록할만한 사건이 없어서 그러했을 것이다. 기록이 없는 이유야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거슬러 올라가보면 초나라에 몽충(夢衝, 艨艟)이란 배가 있었는데 이 배는 우리의 거북선처럼 배의 위를 소가죽(어느 기록에는 판자라고도 되어있음) 등으로 덮어서 시석(矢石, 화살과 돌)을 막아주는 전투에 용이한 배였다.

 

몽충선몽충선  출전 삼재도회
몽충선몽충선 출전 삼재도회

위 그림의 글 내용은, 몽충(蒙衝, 일명 艨艟)이란 쇠가죽(生牛革)으로 전선(戰船)의 등짝을 덮어씌운 것으로 좌우에 도(棹)를 내놓을 구멍(棹空)을 만들어 돌이나 화살로도 부술 수 없다. 전후좌우에 쇠뇌(弩)를 쏘는 창틀과 창 찌르기를 할 구멍이 있어 적이 접근해오면 바로 쏘거나 찌른다. 이 같은 구조는 큰 배에 적용되지 않으며 신속함에 힘써서 적이 미처 대비하지 못하는 허점을 노린다고 해석을 하였고, 원문에는 掉로 되어있으나 나무木변을 재扌변으로도 흔히 쓰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생 쇠가죽(生牛革)이란 원래 가죽(皮)에서 털만 제거하고 무두질(생가죽에서 털과 기름을 뽑고 가죽을 부드럽게 만드는 방법) 처리를 하지 않는 상태를 가리킨다. 그림은 몽충선의 그림인데 그림을 자세히 보면 노선이 아닌 도선(櫂船, 棹船)인 것을 알 수가 있다. 이러한 형태의 배를 전선으로 사용하여 싸웠다는 기록이 고려사절요에 나온다.

김방경이 진도에 이르니(삼별초 때) 적이 모두 배를 타고 징과 북소리가 바다에 들끓었고, 또 성 위에서는 북 치고 크게 소리 질러 기세를 돋우니, 아해(阿海)가 싸우기를 겁내어 배에서 내려 막을 치고, 물러가 나주에 주둔하라고 명령하였다. 방경이 말하기를, 원수가, 만일(우리가) 물러가면 이것은 약함을 보이는 것이다. 적이 이긴 기세로 몰려온다면 누가 감히 그 칼날을 당하겠는가. 황제께서 만일 문책한다면 장차 무슨 말로 대답하려는가? 하니, 아해가 감히 물러가지 못하였다.

방경이 홀로 군사를 거느리고 공격하자 적이 군함으로 맞아 치니, 관군이 모두 달아났다. 방경이 말하기를, 결승이 오늘에 있다. 하고 적의 가운데로 돌입하였더니 적이 배로 포위하여 몰고 갔다. 방경의 배에는 화살과 돌이 다하고 군사는 모두 화살에 맞아서 일어나지 못하였다. 적이 칼을 번득이며 배 가운데로 뛰어들므로, 김천록(金天祿)이 짧은 창으로 막아 찔렀다.

방경이 일어나서 말하기를, 차라리 고기의 뱃속[魚腹]에 장사지낼지언정 어찌 적의 손에 죽으랴." 하고 바다 가운데로 빠지려 하니, 위사(衛士) 허송연(許松延)ㆍ허만지(許萬之) 등이 붙들어 말리고 사람마다 모두 결사적으로 싸웠다. 방경은 호상(胡床)에 걸터앉아서 군사를 지휘하였다. 그 때 장군 양동무가 몽충(蒙衝, 전선(戰船)의 일종)으로 공격하여 구원해서 적이 흩어졌으므로 드디어 포위를 무너뜨리고 나왔다.

위의 기록에서 몽충이란 전선이 아니었으면 김방경은 전사하였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우리의 거북선처럼 시석으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적의 포위망을 뚫고 나오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편 약천집(藥泉集)제24권 가승의 기록을 보면 3층의 비루(飛樓)가 있는 몽충선(蒙衝船)을 크게 만들어서 아래에는 군량을 싣고 가운데에는 노수(櫓手)를 배치하여 노를 젓게 하고 위에서는 화살을 발사하게 하였으며, 사방의 둘레에는 방패를 높이 세워서 적의 탄환을 막게 하였다고 했다.(몽충선은 초(楚)나라의 배다. 이 기록은 홍제전서13권 서인6 익정공주고군려류서(翼靖公奏藁軍旅類叙)로 경신년의 기록이다.) 몽충이라는 배가 지붕을 덮은 배로 큰 전공을 세운 것을 보고 착안하고,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으나 지붕을 소가죽을 대신하여 판자로 바꾸고 배의 생김새를 사용하기에 편리하도록 개선하여 거북선이란 이름의 배를 만들었을 것이다.

고려 원종 14년에는 김방경을 행영중군병마원수로 다시 모였는데 탐라로 떠나기 위하여 모였던 전선들이 모두 바람에 까불리므로 전라도 배 160척만 가지고 떠났다고 한 것으로 보아 당시에도 전라도배(백제)가 다른 지역의 배와 선형이 달라서 능파성이 제일 좋았다고 본다. 또한 이충무공전서 하권의 귀선송(龜船頌)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202쪽) 몽충(蒙衝)군함의 옛 제도를 본뜨는 뒤에 새 의견을 붙여 거북선을 만들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공을 다시 모셔올 수 없음을 탄식하면서 거북선을 노래한 것이 있다.

거북으로 이름 한 배 우리임이 만드시어/ 그 모양 본떠내어 몽충 대신 쓰시도다./ 鷁(익, 물새)과 鴟(치, 솔개)를 새긴 배를 이상할 것 없건마는/ 엎디고 떠오르고 마음대로 하는 도다/ 입으로 뿜은 총알 우박같이 흩어지고/ 등에 박힌 칼날이야 별빛 같이 반짝이며/ 고래 같은 파도 위를 평지같이 여기누나/ 외로 치고 바로 찔러 번개처럼 달리면서/ 나는 적을 해치어도 적은 나를 못 보도다/ 적의 배들 모여들다 부딪치면 깨어지니/ 섬 오랑캐 넋이 빠져 서로 보며 놀라도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귀신이 아닌가/ 옛 제도만 본뜸이랴 사람 손에 달렸도다/ 본떠서 만드오매 물건이야 예 같건만/ 신묘하게 부릴 사람 누가 공을 이으리오/ 그 사람 곧 못 얻으면 헛 물건이 되오리니/ 이 노래 지어 내어 구멍막이 되려노라.

이 노래에서 거북선을 만든 것은 몽충에서 본을 따왔으며, 고래 같은 파도란 아주 큰 파도를 의미한 것이고, 이러한 파도 위를 평지 같이, 즉 조용한 물위를 가는 것처럼 잘 갈 수 있음을 말한 것이다. 본떠서 만들었으니 모양은 예 같건만 부리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는 것을 이순신이 전사하고 없으니, 그런 사람 못 얻으면 누가 그 뒤를 이을 것인가 하는 내용의 노래이다. 또한 거북선은 당초에 몽충의 제도를 보고 만들었음이 확실해졌다. 즉 거북선은 몽충의 옛 제도를 본뜨고 새 의견을 붙여 만들었다고 했으니, 당시의 몽충을 개조, 개량하여 거북선을 만들었다고 본다. 태종대의 거북선은 몽충과 똑같지는 않았겠지만 그와 유사한 형태의 배였을 것이고, 소가죽 대신 판자로 지붕을 덮었을 것이다. 그리고 배이름을 거북선이라고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거북선은 이순신이 창제(創製)한 것이라고들 하고 있다. 예부터 있었던 배를 전투하기에 편리하도록 보완 및 개조를 하였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 고려로부터 조선시대에 걸쳐 군선으로 사용했던 배들은 주로 맹선이었으나 명종 대에 들면서 판옥선(板屋船)이 등장하고 이 배가 임진왜란 때 주력군선으로 활약을 하였다. 이러한 변화들을 살펴보면 약간의 변형은 있었을지 모르지만 판옥선의 여장이 방패가 되기는 했으나 덮개가 없어 전투에 불리함을 보완한 것이, 판옥선의 여장(女墻) 위에 지붕을 덮었을 것이고 이것이 곧 좌수영거북선이었을 것이다.

지금까지 알려져 있는 거북선에 관한 대표적인 기록으로는 이충무공전서이다. 이충무공전서는 정조17년(4126,1793) 이순신이 전사한지 195년이 되어서 이순신을 영의정에 중직하고 이순신의 신도비를 세울 것을 명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즉 임진왜란 후 200여년이 지난 후에 발간 된 것이 이충무공전서이다. 200여년이 지난 후의 것이니 200년 후인 당시의 거북선을 그대로 기록 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해동역사의 기록을 보면 거북선에 관해 설명을 하면서 체계적으로 기술은 되어있으나 이것은 이순신이 창제한 거북선이 아니고 정조 때의 거북선이라고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충무공전서의 기록 외의 것이 없으니 오직 이충무공전서가 전부인 것으로 알고 있지만, 거북선에 관하여 기술한 최초의 기록은 영조28년(4085,1752)에 간행된 간재집이라는 책에는 구갑선도와 설명이 기록되어있다. 이 간재집을 집필한 사람은 이덕홍(李德弘, 3874~3929,1541~1596)으로 중종36~선조29년 사이에 집필한 책이라고 하지만, 본집(本集)은 저자(著者)의 현손 장진(玄孫 長鎭ㆍ5世孫 경태(慶泰) 등이 4076(1743)년 수집 편차(蒐集ㆍ編次)하여 이광정, 권상일(李光庭ㆍ權相一)의 교정(校正)을 거쳐 4085(1752)년 활자(活字)로 인행(印行)한 초간본(初刊本)이다. 초고보다 늦게 초간본이 나왔으나 이충무공전서보다 41년 전의 것이다.

그러나 간재 이덕홍은 3929(1596)년에 사망한 사람이니 임진왜란 중에 이 글을 썼다. 그러니 구선에 관한 기록으로는 간재집이 최초의 것이라 생각한다. 이 간재집은 3925(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올린상소로 전술상의 대책을 건의한 것으로, 이 상행재소〈上行在疏〉는 3926(1593)년 1월에 올린 상소문으로 왜적을 물리치고 국정을 회복시키자는 저자의 계책을 상소한 것인데, 특히 거북선의 사용을 적극 권장하고 있으며, 진계도(陣械圖)ㆍ침수진목전도(沈水眞木箭圖)ㆍ구갑선도(龜甲船圖) 등 그림을 첨부하여 설명하고 있다.

단순히 정치적 전략적 차원에서가 아니라 전술적인 차원에서 임진왜란에 대처하려 한 적극적인 태도를 보여 주는 것으로 주목할 만하다. 비록 상소문이긴 하지만 사료로서의 가치는 충분하다고 본다. 3926(1593)년에 올린 상소문이라고 하니 이충무공전서가 써진 것보다 202년이나 먼저 쓴 것이다. 다만 치수 등 기록이 상세하지 못한 점이 다를 뿐이다.

편집 : 김태평 편집위원,  양성숙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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