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3이 되어 3월 모의고사에서 문과 전체 수석을 차지한 김철수 열사(전남 보성고)는 1991년 5월 18일 교내 광주 민중항쟁  11주기 추모 행사에서 노태우 군사정권이 자행한 국가폭력과 출세주의 입시경쟁교육 현실에 항거하며 분신하였다.(출처 : 김철수 열사기념사업회)
고3이 되어 3월 모의고사에서 문과 전체 수석을 차지한 김철수 열사(전남 보성고)는 1991년 5월 18일 교내 광주 민중항쟁  11주기 추모 행사에서 노태우 군사정권이 자행한 국가폭력과 출세주의 입시경쟁교육 현실에 항거하며 분신하였다.(출처 : 김철수 열사기념사업회)

“우리가 여러분께 하고 싶은 말을 여러분은 잘 알 것입니다. 현 시국이 어떤 사회로 흘러가고 있는지 여러분은 잘 알 것입니다. 학교에서는 자기만을 위한 사회를 만들기만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학생들을 로봇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저는 엄연한 학생입니다. 제가 왜 그런 로봇교육을 받아야 합니까? 저는 더 이상 그런 취급을 받느니 지금의 교육을 회피하는 게 현명한 방법이라 생각합니다. 앞으로 여러분, 무엇이 진실한 삶인지 하나에서 열까지 생각해 주면 고맙겠습니다. 앞으로 여러분, 하는 일마다 정의가 커져 넘치는 그런 사회가 되어 주시기 바랍니다. 제게 힘이 없습니다. 3주일 동안 밥 한 술도 못 먹고 하루에 물 한 컵만 먹고 지금까지 여러분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지금까지 힘차게 살았습니다. 여러분, 여러분, 저는 여러분을 확실히 믿습니다. 다음에 살아서 더욱 힘차게 만납시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 1991년 5월 30일 병상에서 김철수 열사의 음성 유언

이 글은 1991년 5월 18일 분신한 김철수 열사(전남 보성고 3년)가 남긴 유언이다. 그는 숨을 거두기 3일 전인 1991년 5월 30일 부모님과 친구들 앞에서 유언을 남겼다. 김철수 열사는 1991년 4월 - 5월 지속된 ‘분신정국’에서 노태우 군사정권을 통렬히 규탄했다. 그리고 자신이 강요당한 출세주의 입시경쟁 교육을 학생 신분으로 준열하게 비판했다.

김철수 열사는 자신이 다니던 보성고등학교에서 1991년 5‧18 당일 몸에 불을 붙인 채 절규했다. 그날은 광주민중항쟁 11주기를 맞는 첫날이었다. 당시 보성고등학교는 학교 차원에서 5‧18 추모행사를 열었다. 추모행사는 보성고 학생회 주최로 진행했다. 학생회 간부가 <우리의 결의>를 낭독하고 있었다.  입시위주 교육을 거부하고 학생이 교육의 주체임을 강조하는 내용이었다.

결의문 낭독이 끝나고 풍물 놀이패가 풍물을 치던 그 순간, 학교 건물 동편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김철수 열사였다. 그는 학생들이 운집한 운동장으로 달려와 꼿꼿이 선 채로 “이런 잘못된 교육을 계속 받을 거냐?” 고 절규했다. 교사와 학생들이 놀란 채 황급히 웃옷을 벗어 불을 끄려고 했지만 좀체 끌 수 없었다.

물주전자와 양동이로 간신히 불길을 잡자 김철수 열사는 불길을 잡으려 허둥대던 정경호 교사에게 ‘선생님 죄송합니다’ 라고 말했다. 블길에 타면서도 기막힐 정도로 예의바르게 행동했다.속옷만 남긴 채 온몸이 불길에 타들어가는 극한의 고통 속에서도 김철수 군은 두 주먹을 굳게 쥔 채 의연했다. 그리고 그는 앰뷸런스 차안에서도 통일의 노래를 불러달라고 했다. 운동장에서 울부짖던 보성고 학생들은  놀란 가슴을 가라앉히고 정경호 선생님의 선창에 따라 일제히  ‘우리의 소원’을 부르며 김철수 군의 쾌유를 빌었다.

김철수 군은 병상에서도 영어 공부를 하고 싶다고 말할 정도였다. 넋이 나간 채로 병실로 달려온 부모님께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었다. 그 정도로 마음이 여린 학생이었다. 1990년 고2 당시, 생활 영어 대회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했고 1991년 3월 고3이 되어 처음 치른 모의고사에서 문과 전체 수석을 할 정도로 공부도 뛰어나게 잘했던 18살 학생이었다. 엉덩이 살이 병실 시트에 달라붙고 살이 썩어가는 고통이 엄습했다. 참을 수 없는 고통 속에서도 어머니가 애처로운 마음으로  “어디가 아프냐” 고 물으면 입모양으로 “안 아파요”라고 목소리를 대신했다. 그럴 정도로 한없이 마음 착한 학생이었다.

하루하루 피가 검붉게 변해가고 살 썩는 냄새가 속을 뒤집어 놓았다. 몸이 까맣게 변하던 5월 28일 철수는 너무도 고통스러워 자신의 “발을 잘라 달라” 고 호소했다. “너무 아프다”는 말과 함께!

그리고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는지 5월 30일 부모님과 친구들 앞에서 흐트러짐 없는 음성으로 또렷한 음성으로 유언을 남겼다. 맥박수가 떨어지고 붉은 피가 점점 검게 변해가던 6월 2일 오전  열사는 운명했다.

8일장으로 치러진 김철수 열사 장례행렬은 전남 보성고등학교에서 영결식을 마친 뒤에 민주화의 성지! 광주 전남도청을 향했다. (출처 : 김철수 열사 기념사업회)
8일장으로 치러진 김철수 열사 장례행렬은 전남 보성고등학교에서 영결식을 마친 뒤에 민주화의 성지! 광주 전남도청을 향했다. (출처 : 김철수 열사 기념사업회)

당시 전대협 출범식과 겹쳐서 보성고등학교 학생 1,200명과 전남 ‧ 광주지역 고등학생들을 중심으로 장례를 준비했다. 시신 탈취 등 만일을 대비해 사수대 150여 명이 전남대 병원을 지켰다. 8일장으로 치러진 「애국 고등학생 고 김철수 열사 민주 국민장」은 보성고 교정에서 폭우가 쏟아지는 가운데 영결식을 거행했다. 이후 김철수 열사의 장례 행렬은 백운동 까치고개를 넘어 전남 도청으로 행진했다. 7만 명이 넘는 학생 시민이 운집한 가운데 민주화의 성지! 전남 도청에서 노제를 지냈다. 그리고 밤 12시를 넘어 망월동에 영원히 잠들었다.

김철수 열사의 죽음은 1991년 4월 강경대(명지대 경제학과 1년) 열사의 죽음과 관련이 깊다. 그는 한 젊은이를 백주대로에 경찰이 쇠파이프로 참혹하게 내리쳐 죽음에 이르게 한 국가폭력앞에 몸서리쳤고 분노했다. 김철수 열사는 평소 김세진 열사를 흠모해 왔었다. 1986년 5월 신림동 네거리에서 전방입소 거부와 한반도 비핵화, 반미를 외치며 분신한 김세진 열사(서울대 미생물학과 4년)의 죽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 더구나 함께 분신한 이재호 열사(서울대 정치학과 4년)는 광주 출신이었다.

1991년 3월부터 시작된 명지대 학원자주화 투쟁은 투쟁의 구심인 학생회장이 전격 경찰에 체포되면서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학생들이 전경을 구타했고 양측은 팽팽히 맞섰다. 그렇게 비극이 시작되었다. 4월 26일 학생시위대열이 교문 밖 전투경찰과 대치할 당시 강경대 군은 학생 시위대를 보위하고 있었다. 임무를 마치고 학교 담벼락을 마지막으로 넘던 강경대 군은 뒤에서 잠바를 낚아챈 백골단에게 잡혀 길바닥에 고꾸라졌다. 그리곤 쇠파이프로 전신을 잔혹하게 구타당했다. 무려 전경 5명이 달려들어 야만적으로 폭행한 것이다. 강경대 열사는 심장이 파열돼 운명했다.

노태우 군사정권의 폭력성에 항거하며 분신한 김영균 열사 30주기 추모회(출처 : 민주화운동 기념사업회)
노태우 군사정권의 폭력성에 항거하며 분신한 김영균 열사 30주기 추모회(출처 : 민주화운동 기념사업회)

강경대 열사의 죽음은 명백히 국가폭력이자 노태우 군사정권의 폭력성과 야만성을 만천하에 드러낸 잔혹한 사건이었다. 이후 박승희 열사(전남대 식품영양학과 2년)가 노태우 군사정권의 폭력성을 규탄하며 4월 29일 분신 항거했다. 그리고 이어서 5월 1일엔 김영균 열사(안동대 민속학과 2년)가 분신으로 저항했고 천세용 열사(가천대 전산학과 2년)가 5월 3일 연이어 죽음으로써 노태우 군사정권의 잔혹성에 저항했다.

노태우 군사정권의 폭력성에 항거하며 분신한 천세용 열사 28주기 추모회(출처 : 민주화운동 기념사업회)
노태우 군사정권의 폭력성에 항거하며 분신한 천세용 열사 28주기 추모회(출처 : 민주화운동 기념사업회)

1991년 5월 이른바 ‘분신정국’이라 일컫는 정세가 조성된 것이다. 사회변화를 향한 강렬한 열망에도 불구하고 국가폭력이라는 압도적인 물리력 앞에 ‘분신정국’으로 맞선 것이다.

전두환 군사정권에 이어 노태우 군사정권이 계속되자 국가의 폭력성을 끊어낼 어떠한 수단도 갖지 못한 채 절망적인 상황이 지속되었다. 그러자 학생들은 자신의 몸을 불살라 저항함으로써 군사정권의 폭력성에 맞섰다. 어쩌면 절망의 시대! 깨어 있는 시민, 학생이 취할 수 있는 최후의 도덕적인 무기였던 것 같다. 청년학생들의 저항 자체가 처절하기 그지없었다.

김철수 열사는 분신을 감행하기 전에 며칠 동안 단식을 했다. 거사를 앞두고 스스로 몸과 마음을 가지런히 하고자 한 때문이었다. 김철수 열사는 유서에서 그런 말을 남겼다. “내가 왜 죽는지 너희들은 알아야 한다. 쥐꼬리 만한 명예와 권력을 위해 공부벌레가 되어 주길 바라는 기성세대와 벌건 대낮에 강경대 열사가 백골단에 맞아 피를 흘리며 쓰러져도 심장이 터질 듯한 분노의 가슴을 잃어버린 우리의 배움에 학도들을 깨우치기 위함이다.” 라고 썼다.

그렇다! 그의 죽음은 출세주의 입시경쟁교육으로 치닫던 교육현실에 대한 거부이자 <로봇교육>에 대한 저항이었다. 나아가 그런 <로봇교육> 탓에 불의한 권력에 분노할 줄 모르고 권력의 노예로 살아가는 삶에 대한 성찰을 촉구하는 것이자 그러한 삶에 대한 준열한 경고였다. 인생에서 가장 순수했던 시기, 청소년들이 감당하기 버거울 정도로 당대 한국 교육 현실은 암울했다. 성적 비관으로 매년 100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을 정도로 절망적이었다. 1986년 서울사대부중 3학년 0양의 유서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는 그러한 교육 현실을 아프게 절규한 내용이었다. 이오덕 선생은 당대 교육을 ‘병든 교육’, ‘살인교육’, ‘죽음의 교육’이라 규정하지 않았던가!

촌지거래가 횡행했고 0교시 수업과 강제 야간자율학습이 학교마다 버젓이 자행되었다. 이 글을 쓰는 글쓴이 역시 그 시절을 생각하면 교사로서 한없이 부끄러울 뿐이다. 강제 방과후 수업도 마찬가지였다.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인간적으로 자기성장의 기쁨을 갖게 하기보다 점수의 노예가 되도록 내몰았다. 청소년이 간직할 수 있는 아름다운 꿈을 심어주기보다 교과서를 달달달 외워 세칭 명문대에 많이 합격시키는 것을 ‘교육’이라고 생각했다. 세상을 비판적 안목으로, 그리고 따뜻한 눈길로 바라볼 수 있는 주체적 인간으로 길러내기보다 권위주의에 순종하는 학생만을 강요했다.

학교가 <행복발전소>가 아니라 거대한 <수용소>로 느껴졌음에도 변화의 미동도 없던 시절! 교사든 학생이든 불의한 권력에 눈 감고 주어진 현실에 순종했다. 근면하게 노력해 부자가 되고 출세해 승자가 되는 것에만 매몰돼 있었다. 정직하게 살아가는 삶에 대한 고민이나 사회정의에 대한 열정은 없었다. 그런 사회현실 속에서 사회적 약자에 대한 연민이나 더불어 살아가는 마음을 길러주는 교육은 발 디딜 공간이 없었다. 오히려 ‘의식화 교육’으로 매도되고 그런 교사는 ‘빨갱이 교사’로 낙인찍히던 시절이었다.

그 숨 막히던 시절! 인간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어린 제자들은 가장 순수한 정신으로 고뇌했고 청년 학생들은 가장 순수한 의식으로 불의한 현실에 맞섰다. 1990년 6월 5일 불의한 교육현실을 고발하며 투신한 대구 경화여고 김수경 열사가 그랬다. 1990년 9월 7일 분신 후 투신한 충주고등학교 심광보 열사 또한 그러했다. 1991년 5월 18일 분신한 김철수 열사 역시 똑같은 길을 걸어갔다. 자신을 온전히 불사르며 불의한 현실에 저항했다.

이제 부끄러움으로 살아남은 사람들은 그 뜻을 이어가는 것으로 부끄러움을 씻고자 했다. 지난 시절은 그런 세월이었다. 열사가 분신한 지 30년이 지났다. 추모하는 마음을 담아 향을 피워 그 못다 한 영혼을 위로하고자 한다.

편집 :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양성숙 편집위원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ethics6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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