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김유경 주주통신원

- 영화 <begin again>을 보고 -

<begin again>은 음악 영화다. 싱어송라이터 ‘그레타’(키이라 나이틀리)의 사랑이 서사로 변주되어 흐르며 새 노래를 연속적으로 선보인다. 변주에 방점을 찍는다면, 노래들은 처음 맛보는 애증의 순간순간을 박제(剝製)화 한 것이다. ‘그레타’와 ‘데이브’(애덤 리바인)의 사랑과 갈등은, 발생의 순간만큼은 낯선 겪음이어서 최초의 인간으로 맞닥뜨린 환희와 좌절로 박제된 채로, 이미 과거가 되었음에도, 음원을 통해 무한으로 재생되어 확산된다.

우리나라에서 불특정다수의 관객이 그 사랑의 비상(飛上)과 추락의 롤러코스터에 동승하여 힐링 되는 경험...을 하였다면, 외국인 남녀의 애틋한 어긋남에서 ‘우리’의 보편성을 마주한 것이리라. 물론 ‘댄’(마크 러팔로)의 가족애 회복 과정이 이혼율이 높은 현실 사회에 힐링의 감초 역할을 톡톡히 했을 것이다.

며칠 전 접한 온&오프라인 기사는 <begin again>이 우리나라에서 상연된 다양성 영화 중 처음으로 관객 300만 명을 넘어섰다고 전한다. 입소문이든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지 발걸음을 유도한 것은 ‘우리’성(性)을 감지한 때문이리라.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음원차트를 석권하고 있다는 <begin again>의 노래들에서 내가 발견한 것은, 우리나라의 ‘우리’ 감성에는 거북한 즉흥성의 자유로운 영혼의 메아리이다. 아울러 배우 키이라 나이틀리의 가수됨은, 노래방에서의 나처럼, 바뀜 없는 분위기의 결로써 한결같이 축축 처지는 음색을 만들 뿐이어서 노랫말조차 지레 지루했다.

등장인물들의 비범한 재능과 뉴요커들의 거침없는 참여행위들은 더더구나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우리’성은 아니었다. 그저 영화 같은 영화일 뿐인 발상의 화면에서 나를 구한 것은 결미 부분이었다. 장난처럼 가볍게 처리된 사안의 무거움은 진정 ‘우리’성이었다.

무명인 ‘그레타’가 자신의 음반제작과 무관한 음반제작사의 유명세를 빌어 음원을 공급하자는 제안을 냅다 차버렸다. 그것은 성공한 스타 남친의 재회 바람을 내치는 것과 상통하는, 싱어송라이터이자 한 인간으로서 올곧게 ‘다시 시작하는’ 삶이다. 나는 그녀의 선택을 ‘유통업체의 음원 수익 분배구조’의 문제를 제기한 시나위의 기타리스트 신대철의 바람과 오버랩하며 보았다.

신대철이 지난 8월20일에 설립한 ‘바른 음원 협동조합’의 취지는, 모두가 공감하지만 현실에서 문제해결을 위한 토대일 ‘우리’를 가시화하기가 얼마나 힘든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콘텐츠 생산자인 ‘그레타’와 ‘신대철’의 노래가 진정성이 부재하여 돋는 일상적 아픔에 제대로 힐링이 되려면, 음원의 수요자인 관객이나 소비자는 ‘바른 음원 협동조합’의 조합원으로 등록하는 ‘우리’됨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그래야 스타 음반프로듀서인 ‘댄’(마크 러팔로)처럼 문제에 대한 공감으로써 음원 공급의 자본주의적 질서를 뒤엎는 또라이성을 발휘해 해고되어 기득권을 잃은 귀한 이웃이 ‘우리’ 곁에 남을 수 있다. ‘그레타’와 ‘신대철’, 그리고 ‘댄’이 선택한 삶은 자본주의적 강자독식의 킬링이 만연한 현실을 불특정다수가 함께하는 힐링으로써 변화시키려는 ‘다시 시작하는 삶’이다. 비로소 나는 영화 <begin again>을 박수로 맞이했다.

김유경  newcritic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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