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군 항일독립항쟁사적지 정암사 답사기-

[사진1] 귤암리 입구 귤암교에서 바라 본  풍경
[사진1] 귤암리 입구 귤암교에서 바라 본 풍경

 

 여명이 밝아오기 이른 새벽 두치산 계곡 지장천 세류 물소리에 잠을 깬 후 바라본 창밖 풍경은 시 한수가 저절로 나오기에 충분하였다. 

전날 양주땅에서 정선골까지 오백리길 한달음에 달려와 은퇴 후 귀촌하여 인생2막을 위해서 귤암리 윗만지산 자락 터에 움막을 짓고 있는 영준형과 아우를 만나서 봇짐을 풀었다. 이어 아랫만지산 계곡으로 이동하여 시리도록 차가운 물에 멱감고 오후 약속을 위해서 귤암리에서 사북읍으로 출발하였다.

귤암리에서 사북읍 일터까지 가는 지장천 출근길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이라는 형의 너스레가 아니라도 풍경이 기가 막히게 아름답고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것이였다. 정선에 가면 꼭 한번 지장천 물줄기 따라서 백리길 드라이브를 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사진2] 태백산정암사 일주문 풍경
[사진2] 태백산정암사 일주문 풍경

 

첫탐방지로 ‘김시중 의병장전적비’를 답사하고 싶었는데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어서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하고 정암사로 운전대를 돌렸다. 정암사는 정선군 함백산(해발 1,572m) 중간 800m 지점에 위치하고 사북읍에서부터 도로가 뚫려 있어서 접근하기에 불편함이 없는 가람이다.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 월정사의 말사이며, 국내 5대 적멸보궁의 하나이며 신라시대 자장율사가 창건한 사찰이다. 국보 제332호 수마노탑, 적멸보궁, 천연기념물 제73호 열목어 서식지로 유명하다.

정암사 일주문에 도착하여 기념사진을 찍는데, 현판에 ‘태백산정암사‘로 판각되어 있어서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입구에 있는 안내입간판 해설문을 읽어보면 “고구려의 침략 위협으로 소란스럽던 동북방을 안정시키기 위해 평창 오대산을 새로 세우고 현재 함백산으로 불리는 태백산에 석남원을 지었다. 석남원은 ‘신령한 바위의 남쪽’이라는 의미로 현재 수마노탑이 위치한 바위를 기점으로 하는 사찰이라는 뜻이다. 현재의 정암사, 즉 ’깨끗한 바위‘라는 의미가 여기서 유래된 것이다.”라고 적혀있다. 해석하면 정암사가 건립된 지역은 원래는 태백산 영역으로 불리어졌다는 것이다. 1861년 우리나라 지도를 집대성한 고산자 김정호 선생의 [대동여지도] 태백산 영역에 함백산은 기록이 없고 현재의 함백산은 대박산으로 기록되어 있고(디지털장서각 참고), 1899년 출간된 [정선군읍지] 산천 항목에도 대박산으로 기록되어 있어서 신빙성을 입증하고 있다.(규장각한국학연구원 참고)

해설문을 읽으면서 또 다른 의문이 들었다. ‘신령한 바위의 남쪽’에 설립된 석남원 즉 정암사는 수마노탑을 기준으로 남쪽에 위치하지 않고 북쪽에 위치한다. 그리고 고구려의 침략으로부터 부처의 힘을 빌려서 “평창 오대산을 새로 세웠다”는 것은 또 무슨 의미인가? 평창 오대산에 월정사를 세우고 문수보살 친견을 위한 기도를 올리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남하하여 월정사 남쪽 방향에 석남원 즉 정암사를 세웠다는 것으로 새롭게 해석해본다.

아쉽게 열목어서식지에서 열목어를 친견(?)하는 행운을 누리지 못하고 적멸보궁으로 발걸음을 돌렸는데 보수작업으로 안전가림막이 설치되어 아쉬움을 뒤로 하고 수마노탑으로 향하였다. 장암사 경내에 걸려있는 수마노탑 모형의 등을 보면서 이곳을 상징하는 것이 무엇인지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사진3]  수마노탑  돌틈새에  뿌리를 내린 초목
[사진3] 수마노탑 돌틈새에 뿌리를 내린 초목

 수마노탑 안내 입간판에 있는 내용을 발췌하면 “수마노탑은 신라의 승려 자장이 귀국할 때 서해 용왕이 마노석 조각을 주며 탑을 세워줄 것을 부탁하였다고 유래로 전해지고 있다. 마노는 석영에 속하는 보석의 일종으로 용궁이라는 물에서 나왔다고 해서 수마노라고 명칭이 붙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실제는 마노로 쌓은 탑이 아니라 석회암으로 만든 벽돌(길이 30~40cm, 두께 5~7cm)를 쌓아 만든 모전석탑이다. 그런데 모전석탑은 석탑에 비해서 견고성이 떨어진다. 이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서 여러번 해체 후 보수가 이루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우연히 부처의 인연으로 불공을 드리는 거사를 만나서 현재 탑의 관리 상태를 듣고 자세히 살펴보니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석회암 벽돌로 쌓은 모전석탑은 견고성이 떨어지는데, 7층 높이 9m, 너비 3m의 탑 중간에 뿌리를 내린 나무뿌리와 잡초들에 의해서 벽돌과 벽돌 사이가 벌어저 있어서 위태롭게 느껴졌고 폭우와 폭설 등 기상 이변이 발생하면 위험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국보로 지정되어 있어서 정암사 자체적으로 보수할 수 없고 문화재청 허가를 받아서 보수를 할 수 있다고 하니 당국에서 살펴보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한다. 

문득 수마노탑 돌틈새를 바라 보면서 150년전 1872년 부처님 품으로 들어온 동학 2대 교주인 해월 최시형 일행을 품어 준 적조암 노스님의 자비가 느껴지는 것은 무슨 조화인가! 반상의 차별이 엄격하고 남녀가 유별하며 사대 명나라 멸망 후 임진, 병자 양난의 치욕을 잊고 소중화사상에 찌든 양반들과, 조선후기 세도정치의 폭정과 삼정의 문란으로 도탄에 빠진 백성의 원성에 귀 닫고 탐욕에 눈 먼 벼슬아치들에게 “하나님을 내 마음에 모신다”, “사람을 하늘같이 섬기라”는 ‘시천주’와 ‘사인여천’의 동학사상은 혹세무민하는 위험한 선동으로만 느껴졌을 것이다. 동학을 창시한 수운 최제우 교조의 뒤를 이어 2대 교주가 된 해월 최시형과 이필제 등 500여명 동학교도들이 ‘교조신원운동’과 ‘반봉건투쟁’ 성격의 1871년 3월 10일(음력)에 일으킨 영해봉기(=최초의 동학 봉기, 현 영덕군 영해면 일원 -백과사전 참고)로 인하여 수 많은 교도들이 죽고 피체되어 교세가 풍비박산이 되고 관군에 위해서 쫒기는 몸이 되었다고 한다.

다음 해에 관군의 좁혀오는 포위망을 피해서 들어선 함백산 적조암에서 노스님이 흔쾌히 음식과 거처를 제공하고 49일 기도를 할 수 있도록 베풀어 준 은덕은 부처님의 자비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조선의 억불숭유 국시로 인하여 500년간 핍박을 받고 있던 동병상린과 “모든 중생은 부처 앞에 평등하다”는 교리와 “사람을 하늘처럼 섬긴다”라는 ‘사인여천’의 동학사상 본원은 일맥상통한 것이 아니겠는가!

[사진4]  적조암유허지 입간판-누리그물 갈무리
[사진4] 적조암유허지 입간판-누리그물 갈무리

시간이 없어서 정암사에서 만항재 방향 2km에 위치한 적조암(=지금은 유실되어 유허지를 알리는 유허지비만 있음)까지 가보지 못하고 다음 여정으로 발길을 돌리면서 상념에 젖어본다.

1500년전 자장율사가 걸었던 순례길, 150년전 해월신사와 동학교도가 걸었던 포교와 새로운 세상을 향한 혁명의 길, 100여년전 항일의병이 걸었던 구국의 길 위에서 정암사에서 적조암 유허지로 가는 순례길 따라 만항재 너머 백두대간 끝자락까지 부처님의 자비, 동학의 ‘사인여천’, 의병의 구국항쟁의 뜻과 얼이 굽이굽이 스며들기를 수마노탑 풍경소리 울림에 실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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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허익배 편집위원, 양성숙 편집위원

김재광 주주통신원  gamkooda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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