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하라, 감사하라, 감사하라” 주문을 외듯이 감사생활을 요청하는 설교나 강의를 한 번 쯤은 들어 봤을 것이다. 감사노트‘를 매일 쓰는 사람들도 있다. 감사생활을 했더니 변화하는 삶의 모습을 간증하는 사람들도 있다. 감사한 마음이 일으키는 놀라운 기적의 사례들이 카톡방을 날아다닌다. 이에 많은 사람들이 감동하는 긍정적 물결을 목도하기도 한다. 

감사는 '감사할 수 없는 환경에서도 감사해야 한다'는 역설적인 이야기를 듣는다. 그런 환경에서 감사생활을 통해 기적을 이루어 낸 사람들을 못 믿으면서도 존경하게 되는 것은 나도 그렇게 되고 싶다는 희망 때문이겠다.

나도 그런 감사한 마음의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그래 감사해야지, 나도 감사생활로 삶을 긍정적이고 성공적으로 만들고 싶다. 감사, 감사 ,감사.....’ 암기하듯 감사를 되 뇌이며 아침에 일어나서 감사, 저녁에 자기 전에 감사, 식사 기도에 감사, 매사에 감사한 마음을 가지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작심삼일 인가? 어느 순간인가 감사의 주문과 감사한 마음을 잃어버리고 짜증을 내고 불평을 하며 사람들과 다투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이건 뭔가? 이러면 안 되는데, 참 어렵네낭패스런 자괴감에 감사생활을 포기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다.

마음이 평안하고 삶에 번거로움이 없을 때는 감사한 마음이 들다가도 여려가지 고민과 문제에 휩싸이면 걱정과 번민에 빠져 다른 생각은 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나약한 본성인 것 같다. 솔직히 미래에 대한 불안과 걱정에 사로잡히면 마음의 여유가 없어지고 감사한 마음은커녕, 우울증과 불안감이 엄습하여 정신을 질식시키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식자우환(識者憂患)이라고 지구와 세상에 대한 정보가 많을수록 걱정이 많아지는 것은 사실이다. 지구 온난화와 그에 따른 각종 부정적인 현상들, 세계 경제의 신자유주의와 양극화, 그에 따른 자녀와 후손들의 미래에 대한 끝없는 걱정, 내년 대선을 앞두고 벌어지는 수구세력의 악랄하고 집요한 공격, 무능력한 거대 여당의 행보, 위태로운 국가의 운명, 뜻대로 되지 않는 세상살이, 당장 오늘의 끼니 해결, 창궐하는 코로나에 살려 달라고 아우성치는 자영업자들....

'감사, 감사' 보다는 오히려 '걱정, 걱정'이 지구를 온통 감싸고도는 것이 엄연한 현실인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감사하자는 것은 걱정해 봤자 무엇이 도움이 되겠는가, 마음을 가라앉히고 감사할 거리를 찾아 그에 매달리자. 일종의 세뇌 또는 현실외면, 현실도피의 한 방편으로 감사생활을 주문하는 것인가?

2019.5월 강릉 허난설헌 고택 앞 꽃길
2019.5월 강릉 허난설헌 고택 앞 꽃길

! 삶이란 불가사의.'나는 누구이며 내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인가?’의 근원적 질문에 대한 답도 얻지 못한 채 곧바로 생존의 굴레에 매여 평생 삶의 쳇바퀴를 돌려야 하는 가련한 존재, 그럼에도 생명이란 우주적으로 축복받은 대단한 사건임에는 틀림없어 보인다.

모래밭에 반짝이는 보석 알갱이 하나 처럼 광활한 우주 가운데 외로운 생명별 하나, 그 지구의 수많은 생명들 중에 또한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으로 목숨을 부여 받았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그러한 행운에 온몸이 오싹하고 전율이 느껴져 감사의 환호성, 기쁨의 노래라도 불러야 하는데 현실은 왜 이리 적막하고 불안한 것인가?

그것은 인간이 미래에 마음이 저당 잡혀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예수가 내일 무엇을 먹을지, 무엇을 입을지 걱정하지 말라. 내일은 내일 걱정하고 오늘은 오늘로써 족하다고 과도한 걱정을 경계했듯이, 걱정해서 걱정이 사라지면 걱정이 없겠네라는 티벳의 재치 있는 속담도 있듯이 현실에 충실하면 내일은 긍정적으로 열리게 된다는 일반적인 교훈인 것 같다.

어린아이가 행복한 것은 내일에 대한 걱정이 없기 때문이다. 자기를 보호하고 양육하는 부모가 있다는 사실도 있지만 그저 천진한 마음이기 때문에 행복한 것처럼 어른이 된 인간들도 과도한 걱정을 버리자. 우주가 지구에 보내 준 고귀한 생명을 우주가 보호하고 섭리해 줄 것이라는 믿음으로 현실에 충실하면 자연스레 감사생활이 되지 않을까?

사실 세상과 주변은 내가 어떻게 마음대로 바꿀 수도 없다. 내가 걱정한다고 변화되는 것도 아니다. 다만 평상시의 기도로써 세상이 긍정적으로 변화되어 가기를 기원하자. 그리고 나의 일상생활에 부지런을 내는 것이 최선의 삶의 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자기의 능력에 부치는 일을 아쉬워하며 골몰하는 것도 중용(中庸)을 넘어선 만용(蠻勇)이기 때문이다

방하착(放下着), 마음을 내려놓고 알 수는 없지만 자연의 흐름에 순응하다 보면 사필귀정(事必歸正)의 좋은 결과를 보게 될 것이다. 못된 짐승이 몇 번 꽃밭을 짓밟을 수는 있어도 꽃밭을 없앨 수는 없다. 다시 새봄에 꽃은 피어 혹한을 이겨낸 승리를 찬양할 것이다

어떤 현자는 생명이 고달픈 것은 꽃과 별을 감상하는 값이 비싸서 그렇다는 것이다. 고난 끝에 보는 꽃과 별이 더 감동스럽고 치열한 노력 끝에 얻는 승리가 더 값진 것은 그런 까닭일까? 그것은 꽃과 별, 성공이 더욱 돋보이게 하려는 자연의 오묘한 설계인지 모르겠다.

물론 고난과 고통의 순간은 괴롭고 원망스러운 것이 자연스러운 생명현상이다. 그러므로 힘들 때는 힘들다고 소리쳐라. 슬플 때는 울고 괴로울 때는 괴로워하라. 그것이 억지로 감사하는 것보다 마음이 편하고 인간적인 것이다

그러나 괴로움과 원망에 매몰되지는 말자. 이내 털고 일어나 잠깐의 낙심과 불만을 이기고 긍정과 낙관의 자세로 회귀하는 습관이 필요하다. 그것은 삶을 유지하기 위한 유일한 방편이다

나뭇잎이 나무 전체의 생태를 모르지만 온힘으로 살다가 가을 낙엽이 된다. 우리 인간 개개인도 우주와 인생을 모두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수백만 년의 인류를 통해 이루어가는 우주의 선한 목적과 방향이 있을 것이라는 긍정과 낙관의 마음을 가진다면 한결 행복한 느낌이 들 것이다

거대한 우주의 운행에 고귀한 세포로 살고 있다는 자긍심과 자각을 가지고 살자. 나의 작은 고통에서 눈을 돌려 이웃과 사회의 어려움과 모순에 눈을 뜰 때 시야가 넓어지며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자연스레 생각날 것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처럼 공동체 속에서 나의 좌표를 발견하고 그에 헌신하면서 삶의 끝까지 살아가면 아름다운 삶이 완성되지 않을까?

그리하여 마지막에는 진정 감사한 마음으로 잠이 들기를 기원해 본다

2018.9월 미국 그랜드캐년 밤하늘의 은하수
2018.9월 미국 그랜드캐년 밤하늘의 은하수

 

편집 : 김미경 부에디터 , 양성숙 편집위원

조형식 주주통신원  july2u@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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