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지와 각종 비리로 얼룩졌던 학교들

글쓴이가 정년 퇴임하기 직전 4년 6개월 근무했던 서울형 혁신학교인 서울신은초등학교
글쓴이가 정년 퇴임하기 직전 4년 6개월 근무했던 서울형 혁신학교인 서울신은초등학교

 

2000년 대 이전에는 학교가 이랬다면 믿겠는가?

이번 대선에서 윤석열 등 대선 후보들 중에는 공정과 상식을 이야기하는 후보들이 있다..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가 공정을 이야기하는 것을 들으면서 조국 법무장관 가족 수사 과정을 보면서 지나치리만큼 편파적이라 생각하는데, 공정 사회를 이야기한다. 하기야 독재자 전두환도 기업들한테 많은 돈을 욹어먹어 처벌을 받았지만 그도 '민주정의당'을 창당하면서 '정의 사회 구현'을 외쳤다.

학교라는 곳은 가장 도덕적이고 공정해야 한다. 차별과 부정의가 활개 치는 학교에서 무슨 정의와 민주 교육을 하기를 기대하겠는가? 시민으로서 최소한의 소양과 교사로서의 최소한의 양심을  가진 교사라면 공정과 정의가 무너진 학교에서 그들이 설 자리는 없다. 더더구나 부정과 부패와 비리가 판치는 학교에서 양심적 교사들은 설 자리가 있을 수 없다. 교사는 내 양식과 신념에 의해 교육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어야  교육의 자주성과 민주성을 확보할 수 있는 '산교육'이 될 수 있다. 이런 신념과 양심을 가진 교사가 교육이 중심이 되어야 교욱이 바로 서고, 사회가 바로 서며, 국가가 바로 서지 않겠는가?  

하지만 해방 이후 미군정을 거치면서 우리 교육은 철저하게 정권의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하는 수단으로서 이용이 되었다. 2세 국민인 학생들을 그런 방향으로 교육하여 끌고 가는 것은 물론이고, 당장은 학교를 통하여 학부모들을 친 정부 세력으로 묶어내는 도구로 활용했다.  

해방 이후 미군정은 미소 냉전 시대에 미국의 자본주의, 자유주의 이념을 중심으로 한국을 미국의 냉전 이데올로기의 축에 묶어놓고 그들의 이념과 제도와 세계 지배구도에 부합한 친미 국가를 세우고자 하였다. 그들은 미군정하에서 교육 관련법들을 제정하면서 해방된 한국의 교육 이념과 제도를 만들어 가기 위하여 미국에서 공부를 오천석 등을 내세워 죤듀의  경험주의 교육 이론을 중심으로 하는 '새교육'을 내걸고 해방된 나라의 교육 방향을 세우고자 했다. 이에 많은 학자들과 관련 단체 등이 반대 운동에 나섰지만 결국 미군정이 의도하는 대로 해방된 한국의 교육의 틀이 갖추어지기 시작한다. 이승만 정권을 거쳐 2공화국 때 오천석은 문교부 장관을 역임했다. 그후 박정희와 전두환, 노태우 정권의 교육 이념과 방향은 공고히 굳어져 왔다.  

다음은 그런 친미 반공주의자 오천석이 번역하여 교사들과 예비교사들에게 세뇌시켰던 '무명교사 예찬론'의 일부 구절이다

새로운 교육제도를 만드는 것은 이름 높은 교육자이고

젊은이를 올바르게 이끄는 것은 무명교사로다.

그가 사는 곳은 어두운 그늘,

한난을 당하되 달게 받도다.

그를 위하여 부는 나팔 없고,

그를 태우고자 기다리는 황금마차 없으며,

금빛 찬란한 훈장이 그 가슴을 장식하지 않도다.

묵묵히 어둠의 전선을 지키는 그.

무지와 우매의 참호를 향하여 돌진하는 그 어머니,

날마다 날마다 쉴 줄도 모르고

청년의 원수인 악의 세력을 정복하고자 싸우며,

잠자고 있는 정기를 일깨우도다.

 

이렇게 한국의 교사들은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로 이어지는 친미, 군사 정권에서 교사는 오천석의 '무명 교사론'을 읆으며  영혼이 없는  교사가 될 것을 강요 받으며 교사의 길을 걸었다. 학교가 새교육을 한다고 하면서도 철저히 국가 이데올로기에 종속된 교육인 일제의 황국신민교육의 잔재를 떨쳐내지 못하고, 거기에 더해 6.25를 거치고 박정희, 전두환 등의 군사 독재 정권을 거치면서 「체벌과 획일식, 안 되면 되게 하라, 돈이면 다 된다 」식의 군사문화의 재생산 구조 변모되어왔다.

사회야 그렇다 치더라도 학교까지도 돈이 지배하는 구조와 문화가 자리 잡았다. 공립학교는 물론이고 사립 학교의 횡포는 더욱 심했다. 사립학교에 근무하는 선생님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듣다 보면 사립학교의 숱한 비리들과 부패가 있어도 덮고 지나가는 현장의 교사들의 절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사람 사는 사회에서는 ‘인사가 만사’라는 말이 있다. 세상 일들은 결국 인간이 하기 때문이다. 자식들도 그렇고 학생들도 그렇게 차별 받는 것을 제일 싫어한다. 하물며 교사들이야 말해 무엇하리오.

 

이런 우리 교육의 변천사를 간략히 살펴보면서 이번과 다음 회차의 <김광철의 혁신학교 이야기>는 교사들이 학교 교육을 하기 위하여 어떻게 조직되어 운영되는지에 대한 인사 문제를 이야기 하려고 한다. 서울형 혁신학교인 서울신은초에서의 인사 운영 시스템에 대하여 이야기하려고 한다. 학년 배정, 학급 담임 배정, 학교 업무 분장, 부장 교사 임용 등이 얼마나 구성원들의 자발적 협력과 이해에 의하여 민주적이며 공정하게 이루어지는가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일반 학교에서의 인사 관행은 어떠해 왔는지 글쓴이의 경험을 살려 먼저 이야기 하겨고 한다.

 

순진한 햇병아리 교사가 부딪혔던 학교 현장

 

내가 교대를 졸업하고 학교 현장으로 발령을 받고 나간 것은 1975년 도였다. 4월 1일 자로 강사로 발령을 받았다가 그해 9월 1일 자로 정식 교사로 발령을 받아 신대방동에 자리 잡고 있는 문창초등학교로 부임을 하였다. 발령받고 가자마자 5학년 담임을 하고 다음 해에는 6학년 담임을 맡았다. 당시 문창초등학교는 학생 수가 1만 명이 넘고 4학년까지 2부제를 하는 세계에서 제일 큰 학교라는 바람직하지 않은 명성을 날리고 있는 학교였다..

6학년 담임을 맡았는데 우리 반 학생수가 88명이었다. 그러니 옛날 구닥다리 교실에 88명을 수용한다는 것을 상상해 보라. 교실 양쪽 벽면에 책상을 두 줄로 바짝 붙이고 앞뒤도 거의 공간이 없이 책상을 배치해야 했다. 바짝 붙여 놓은 책상 사이의 좁은 공간이 통로인 것이다.

나는 당시 6학년 담임을 하면서 보이스카우드 단대장, 육상부 지도교사, 주번 담담 등 소위 학교에서 가장 힘들다는 3D 업종의 업무를 배정받아 수행 하였다. 젊은 총각이고 학교장이나 교감 등 선배들 말을 잘 듣는 범생이 교사로 인정을 받은 것이다. 점심시간에는 4학년 이상 전교생들을 운동장에 모아놓고 중간 체조를 진행했다. 새벽부터 나와서 교통당번과 주번들은 잘 섰는지 순찰을 하고, 욱상부 아이들을 모아 지도를 하였다. 운동회 때는 한 달 이상을 연습을 시켜 덤 블링(꾸미기 체조)을 하면 학부모들로부터 많은 박수를 받기도 하였다. 정말 오래된 운동회의 기억이다. 그러고 보니 이게 근 50년 전의 나의 모습이었다. 당시에는 교사도 숙직을 하던 시절이라 선배 교사들의 숙직까지 도맡아 겨울 방학 동안 18일 숙직을 하기도 했다.

자녀들의 하교를 기다리는 학부모들(서울문래초등학교 후문에서)
자녀들의 하교를 기다리는 학부모들(서울문래초등학교 후문에서)

 

학부모들의 주머니를 노렸던 학년, 학급 배정

요즘과 같이 12월 말이나 2월이 되면 다음 학년도 학년과 학급 담임, 주임 교사 등 학교 인사가 이루어진다. 교사들을 대상으로 희망 학년과 희망 업무를 적어내라 한다. 1,2,3 희망으로 적어내라고 한다. 그러면 나이가 많은 여교사들은 주로 1, 2학년 등 저학년을 적어내고 남교사들은 5, 6학년을 희망하는 경향이 있다. 젊은 교사들은 주로 남아있는 3, 4학년에 많이 배정이 된다. 요즘은 체험학습이라는 형태로 야외학습을 가지만 당시에는 ‘소풍’을 간다는 명목으로 야외로 나가서 하루를 놀다가 왔다. 이때 1, 2학년의 경우는 자녀들이 어리다고 학부모들이 소풍지에 도시락을 싸들고 따라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면 그 엄마들은 담임 도시락을 준비해 오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담임 주머니에 촌지를 찔러주고 가는 일들이 마치 학부모와 교사의 문화 같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런 날에는 학년 주임 교사들 중에는  담임들 더고 받은 촌지 중에서 일부를 교장, 교감에게 줄 차비를 좀 내라고 해서 그걸 교장, 교감에서 전달하는 일들도 있었다.

전교 어린회의나 학급의 반장, 부반장 등이 되면 으레 소풍 등 행사가 있을 때에는 담임 도시락을 챙기는 것은 기본이라 생각하는 풍토가 있었다. 아이가 학급이나 전교 어린이회의 임원이 되면 아이의 직급에 따라 으래 반장 엄마, 회장 엄마가 되어 교사들을 대접하는 것을 당연시 여겼다. 당시 유신체제가 한창인 시절이라 유신 반대 세력은 힘으로 짓밟고, 그렇지 않은 곳의 부정, 부패는 눈을 감았다. 정권 자체가 정통성이 없고 부리와 부패로 얼룩져 부도덕했기 때문에 국민들을 탓할 수 없었다. 학교나 사회나 우리 사회 구석구석이 부패해 있었던 시절이다. 특정 재벌들은 정경유착으로 권력이 비호를 받으며 문어발 식으로 기업을 확장해 가고 그 과정에서 검은돈들이 오가던 시절이다. 하다못해 동사무소나 면사무소에 가서 민원 하나를 해결하려면 뒷돈이 오가지 않으면 쉽지 않았던 시절이다. 차를 몰고 가다 교통순경이 잡을 것을 대비하여 면허증 뒤에 만원 권이나 오천 원 권 지폐를 한 장 끼워놓고 다니다 걸리면 교통순경은 그 돈만 쏙 빼앗고 범칙금 따위는 내지 않아도 되는 시절이다. 얼마나 부정, 부패가 심했던 시절인가? 요즘 버마를 보면서 쿠테타 세력의 비리와 부정, 부패, 과거 중국이나 아프리카, 남이의 정통성 없는 구데타 세력들이 하는 행대가 우리와 똑 같은지 놀랍다. 얼마나 부정, 부패가 심했던 시절인가? 지금 우리는 국민적 노력에 의하여 이런 문화가 얼마나 크게 정화되었는가?

학교 현장에서 교장, 교감이 학년 배정을 할 때, 희망서들은 참고만 할 뿐 학교 형편에 따라 어쩔 수 없다면서 담임 배정을 관행처럼 자신들 마음대로 해 왔다. 그렇다고 희망을 전부 무시하는 것은 물론 아니지만. 학년 배정을 잘 받기 위하여 일부 교사들은 교장, 교감에게 금품을 제공하여 환심을 사고 자기의 희망을 관철한다. 결국 그런 돈들은 학부모 주머니에서 나왔다고 보면 된다. 학부모들이 가져온 돈의 일부를 교감, 교장 등에세 건네고 자신은 돈이 많이 생가는 학년, 학급에서 그 돈보다 훨씬 많은 돈이 생기니 거래할만 하지 않겠는가? 학교라는 피라미트 조직은 정점의 관리자, 그 밑에주임 교사, 그 아래 교사, 마직막은 생산자인 학부모의 구조인 것이다. 학교라는 조직도 결국은 서무과(업자), 교사(학부모) 간의 돈의 먹이사슬들이 복합적으로 얽혀있는 학교 생태 피라미트였다. 따지고 보면 작은 학교이지만 검은돈의 거대한 카르텔을 형성하여 굴러가는 조직이었다. 말은 그럴듯 하게 진리, 정의 등을 예기하면서 신성한 교육이라고 하지만 학교 현장도 이러한 돈의 먹이사슬 구조에서 벗어나 있지 않았다.  물론 이런 경험담과 주장은 전국의 모든 학교의 사례라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을 드린다. 제가 전교조 둔동을 하면서 전국초등위원장을 4년 간 한 적이 있다. IMF 시절 전교조가 비합법인 시절에서 2000년 전교조가 합법노조로 인정을 받을 시기 4년 동안 전교조 전국 초등위원장을 역임했다. 전국에서 모인 전교조 초등 동지들을 모아놓고 상당한 시간을 할애하여 지역 보고를 들었다. 그 지역 보고를 듣다보면 너무 황당하고 어이없는 일들이 학교 현장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알면서 분노했던 일들이 있다. 들어보면,  촌지 문제나 학교 비리 문제는 서울과 대도시 지방이라고 큰 차이는 없었다. 지금 내가 하는 이야기 중에는 시골벽지학교에서는 언감생심인 이야기들일 것이다. 그렇지만 한국 교욱을 현실을 직시하고 반추하면서 한국 교육은 어디를 향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관점에서 제가 알고 있거나 들은 이야기들을 중심으로 풀고 있으니 양해 바란다.

내가 두 번째 전근을 가서 3월 2일 아침에 교감이 학년, 학급 담임을 발표를 하였다. 당시 관리자들과 사전에 6학년 어느 특정한 학급을 맡기로 내밀하게 약속이 되어 있었는데, 누가 그 틈새를 치고 들어온 것이다. 거기에는 또 다른 거래가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자 그 학급 담임을 원했던 교사가 거세게 항의를 하면서 난리가 났다. 그 특정한 학급에는 6학년 전교 어린이회장을 노리는 특정한 아이가 있었던 것이다. 그 아이의 엄마는 담임에세 매월 일정액의 촌지를 한다고 소문이 나 있었다. 그 액수가 지금 들어도 적지 않은 액수다. 그래서 학년 배정을 다시 하는 사태에 이르렀다.

이런 사례는 그 학교에서만이 아니었다. 나는 가는 학교마다 일부러 인사위원을 뽑거나 추천할 때 꼭 들어갔다. 가는 학교마다 인사위원회 활동을 계속하였기 때문에  많은 학교에서의 인사 행태를 알고 있다. 내가 했던 어떤 학교에서는 학년 배정 발표하는 날 인사원칙대로 학년 배정이 되지 않았다고 마구 항의를 하는 바람에 다시 학년 배정을 했는데, 나는 이 경험을 두 번이나 하고 있다. 한 번 학년, 학급을 맡고, 학교 업무를 맡으면 싫으나 좋으나 1년은 눈 감고 버텨야 한다. 그래서 대부분의 교사들은 학교 인사에 초미의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이런불합리한 현실은 보고 젊은 교사들 중에슨 싸우기도 하면서 변혁을 시도하지만 그 문화라는 것은 쉽게 바뀌는 것은 아니다. 결국은 이런 학교 현장의 문화에 염증을 낸 많은 젊은 교사들은 학교를 떠나갔다. 그래도 현장에 남아서 올바를 교육을 해 보겠다는 교사들은 이런 부패한 구도를 깨기 위하여 다양한 형태의 교육 개혁운동으로 발전해 나갔다. 그 꽃이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다.

아이들의 인사를 받으며 하교 지도를 하고 있는 교사의 모습(특정 기사와 직접적인 관련은 없는 사진임)
아이들의 인사를 받으며 하교 지도를 하고 있는 교사의 모습(특정 기사와 직접적인 관련은 없는 사진임)

 

승진에 목마른 교사들의 아킬레스건을 잡았던 학교 관리자들

교감과 교장은 학급 담임의 배정도 중요하지만 주임 교사 임용에 관심이 많았다. 당시는 ‘주임교사’라고 불렀지만 지금은 ‘부장 교사’라고 부른다. 즉 보직 교사 인사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당시 주임교사는 6개 학년 주임 교사와 특수 주임이라 해서 교무 주임, 연구 주임, 새마을 주임, 윤리 주임, 체육 주임, 과학 주임 등의 보직을 배정한다. 유신이 시퍼렇던 시절이라 학교는 정부 시책에 따라 정부의 주요 지표와 국정과제들을 학교를 통하여 학부모들에게 전파시키는 역할을 강요해 왔다. 육성회, 새마을 어머니회 등 각종 어용단체들을 만들어 내세워 정권 홍보의 전위부대로 활용하고, 가정통신 등을 통하여 끊임없이 정권 홍보를 해 나갔다. 한국적 민주주의,  충효와 호국 안보, 반공 통일, 새마을 운동, 군사문화 옹호 등을 확산하기 위한 교육에 큰 비중을 두었다.  이러한 정권 홍보적 역할을 앞장서서 잘 수행을 해야 교육청의 평가를 잘 받을 수 있다. 그 평가를 잘 받아야 교장, 교감은 다음 번 전보 때 소위 촌지가 많이 나오는 잘 사는 동네에 있는 학교 교장과 교감으로 갈 수 있다.

당시 서울의 초등학교들은 학부모들이 교육에 대한 관심이 많은 학교를 기준으로 <가>급 <나>급,<다> 등으로 나누어 교장, 교감과 교사들 인사에 반영하던 시절이다. 교장, 교감들은 교육청 평가를 잘 받아야 한다. 교육청 평가를 잘 받기 위해서는 실적이 좋아야 하는데, 최전선에 서 있는 교사들이 주임 교사였다. 주임 교사로 한 번 임용이 되면 다른 학교로 전보를 갈 때도 주임 교사 보직을 달고 가던 시절이다. 지금 부장 교사들은 그렇지는 않다 본의의 희망에 따라 대분분 결정이 된다. 요금은 당시처럼 주임 교사를 하려는 분위기는 많이 사라젺다. 주임 교사가 되면 1년에 1점씩 주임 교사 점수를 받는다. 그것이 누적이 되어 주임 점수는 승진을 하는데 기본이었다. 무엇보다도 교감, 교장으로 승진을 하기 위해서는 교장, 교감이 평정을 하는 근무평정 점수가 최고점이 되어야 관리직으로 나갈 수가 있었다. 왜냐하면 이런 근무 평정 우수 교사들은 어느 학교나 다 있기 때문에 이들이 다 경쟁 대상인 것이다. 그래서 그것까지도 대부분 교사들은 점수를 다 채울 수 있다. 그런 경우에 다시 구분하기 위하여 연구 점수라는 것을 두어서 대학원을 다녔으면 그것을 점수화한다. 그 외에 어용 교원 단체 등에서 연구 논문을 심사하여 점수를 주는 제도, '교육자료 대전' 이라는 대회에서 입상을 화거나 도서, 벽지에 근무했다고 그것을 점수로 환산해서 그 종 점수에 의하여 장학사, 교삼, 교장 등으로 발탁될 수 있는 제도를 만들어 교사들을 회유, 통제, 유인하면서 교사들을 정권의 시녀로 만들어 나갔다.

근무 평정은 100명의 교사가 있으면 1등에서 100등까지 등수를 매겼다. 보통은 교무 주임이나 연구 주임 교사를 1등급을 주는 것이 관례였다. 승진에 뜻을 두고 있는 교사들은 근무 평정 점수를 잘 받기 위하여 교장이나 교감 등 관리자들에게 잘 보여야 교무 주임이나 연구 주임 등의 보직을 맡고 근무 평정 점수도 1등급을 받을 수가 있다. 그렇다고 교감이 막강한 힘을 가진 것은 아니다. 근무 평정 점수도 최종적으로 교장이 결재를 내고 낙점을 해야 한다. 교감도 교장이 근무 평정을 해서 교육청으로 보고하기 때문에 교감도 교장 앞에는 꼼짝을 못한다.

승진에 뜻을 두고 있는 교사들은 우선 주임 교사 보직부터 받기 위하여 교장, 교감한데 잘 보이려고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주임 보직을 안 주기 때문이다. 주임 교사 12명 중에서도 누가 교무나 연구 주임 보직을 맡느냐는 것도 다 교장의 인사권이기 때문에 당시 나이가 좀 들고 승진에 뜻을 둔 교사들은 교감, 교장한테 잘 보이고 아부하지 않은 수 없는 구도였다. 그러니 거기에는 학교 근무를 성실히 하는 것은 물론이고 돈봉투가 오가지 않을 수 없는 구도였다. 승진에 뜻을 두고 있는 교샤들은 평소에 관리자들한테 굽실 굽실하는 것은 기본이고 그것만으로는 안 되기 때문에 관리자들한테 은밀하게 뇌물을 받치거나 이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하여 이들의 사적인 일들을 거드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이런 관행은 학교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교감 승진을 하거나 교장 승진을 하기 위해서는 교육청 평가와 발령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그쪽에 로비를 해야 한다. 당시에 ‘교장 천, 교감 오백’이라는 말이 유행하기도 하였다.

학년 배치도 돈 봉투에 의하여 좌우되던 시절

12월 말이나 2월이 되면 학년 희망서를 써내라고 하여 학년 배정을 하게 된다. 당시 교사들 대부분은 소위 노른자위 학년 담임 배정을 원한다. 1, 2학년이나 6학년 등 학부모들 촌지가 많이 생기는 학년을 원한다. 특히 나이 좀 든 여교사들은 기를 쓰고 1, 2학년을 맡으려고 한다. 특히 1학년 같은 경우는 어린 자식을 학교에 맡겨 놓았으니 혹시 담임선생한테 미움을 받지나 않을까 하여 촌지를 한다. 그런 부수입을 노리는 교사들이 저학년을 선호하게 된다. 더구나 저학년은 수업 시수도 적고 아이들 다루기도 쉬운 이점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저학년을 맡고 싶은 교사들은 교장이나 교감 등에게 로비를 하여 4년 동안 있으면서 고학년 담임은 한 번도 거치지 않고 저학년만 맡다가 다른 학교로 전근 가는 경우들도 많았다. 이런 교사들이 교장, 교감에게 얼마를 갖다 받쳐다는 등의 소문들이 돌기도 하고 희망하는 학년에 배정이 안 되면 울고불고하는 교사들도 있었던 시절이다. 관리자들 중에는 은근히 아니면 노골적으로 촌지를 요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어떤 교사가 촌지를 할만한데 하질 않으며 교장이나 교감이 수시로 그 교실에 들어가 청소가 어떻고, 아이들 생활지도가 어떻고, 성적이 어떻고 하면서 심리적 압박을 가하는 관리자들도 있었다.

교장이 되면 학교의 각종 공사를 벌이거나 물품 등을 구입을 할 때 업자들로부터 리베이트를 받는 것은 관행처럼 되던 시절이다. 학교 도장 공사에서부터 화장실 공사, 수도 공사, 과학실 공사, 과학, 체육 등의 기자재 구입 등 예산과 관련된 것들은 다 서무과장과 교장의 결재 하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거기에서 업자들과 각종 거래들이 이루어진다. 수학여행을 가거나 수련회를 갈 때 특정 업체를 선정해 주면 사례비를 주는 일, 6학년에서 엘범을 제작하며 앨범 업자한테 채택료를 받고, 서점 등에서는 어떤 참고서를 채택해 주면 그에 대한 대가로 채택료를 받던 시절이었다. 이런 관행들이 문민정부가 들어서고, 김대중 정부시절 교사 정년이 단축되고 교사들의 봉급 체계도 바뀌면서 많이 현실화되면서 과감한 개혁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지금 학교에는 이런 업자와의 비리가 발붙일 수 있는 구조 차체가 차단되고 있다. 학교 공사에서부터 물품 구매 등이 투명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공개 경쟁입찰과 조달청 등을 통하여 물품 구매를 하기 때문에 부정과 비리는 거의 사라졌다고 보면 된다. 크게 제한이 되어 있다. 만약 부정이나 비리가 적발되면 그 직에서 물러나기 때문에 그런 것이 두려워서 지금은 학교들이 굉장히 맑고 투명해진 것은 사실이다.

서울구로남초등학교는 글쓴이가 전교조 운동 관련으로 해직이 되었다가 복직하여 두 번째로 근무했던 학교였다. 주변에는 공단이 있어 매연 등 주거환경이  좋지 않은 학교이다. 예전에는 교사들이 선호하지 않았던 학교이다. 이 학교에 근무를 할 때 전교조의 열성 조합원들이 많아서 함께 민주적 인사위 투쟁을 열심히 했던 곳이다.
서울구로남초등학교는 글쓴이가 전교조 운동 관련으로 해직이 되었다가 복직하여 두 번째로 근무했던 학교였다. 주변에는 공단이 있어 매연 등 주거환경이 좋지 않은 학교이다. 예전에는 교사들이 선호하지 않았던 학교이다. 이 학교에 근무를 할 때 전교조의 열성 조합원들이 많아서 함께 민주적 인사위 투쟁을 열심히 했던 곳이다.

 

전교조 운동과 촌지 거부 운동

1986년 전두환 시절에는 각종 교사운동들이 여기저기에서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오송회 사건에서부터 민중교육지 사건 등 한국 교육계를 발칵 되짚어 놓았다. 그 연장선상에서 글쓰기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고, 전국에 있는 YMCA사무실을 중심으로 교사들이 모여 경쟁과 입시 위주의 교육 시스템으로 죽어가는 아이들을 살려내자면서 YMCA교사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1986년 5월 10일 이들은 <교육민주화 선언>울 하면서 굴종의 교사의 삶을 청산하고 교육의 주체로서 당당히 서겠다는 선언을 하면서 전국의 각 지역과 많은 학교들에서는 교사들이 <교사협의회>를 조직하여 교육의 민주화를 외쳤다. 그 운동이 결국은 1989년 5월 29일 민족, 민주, 인간화의 참교육을 부르짖으며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결성의 횃불을 높이 치켜들었다. 전교조는 온갖 이념 공세에 시달리고, 수백 명이 구속이 되고, 1600명 가까운 교사들이 해직이 되는 탄압을 받으면서도 굴하지 않고 교육개혁을 주도하여 오늘날 대대적인 진보교육감의 진출과 혁신학교 운동 등으로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혁신학교> 운동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교육의 3주체들을 제대로 된 주체로 세우기 위한 몸부림이요 노력이다. 혁신학교에서는 교육의 내용과 방법, 교육주체들의 자주적 추체로 세우기 위한 노력, 시설, 예산 등 많은 면에서 획기적인 변혁을 이루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위 전교조 로고 자료는 전교조 홈페이지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전교조는 학교 현장을 개혁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교장 선출, 보직제가 도입되어야 한다고 강하게 요구하였다. 그런 노력은 노무현 정부에서 ‘선출’까지는 아니더라도 ‘보직제’ 형태의 공모 교장 제도를 도입하였으나 다음에 들어선 이명박 정부에서는 그 취지를 짓밟고 형식적인 교장 공모제로 변질이 되었다. 그러던 것이 촛불 혁명과 진보교육감들의 진출로 이제 학교 현장에는 공모제 교장들이 제법 진출해 있다. 나의 경우도 정년이 좀 더 남았더라면 공모제 교장에 한 번 도전해서 학교를 정말로 혁신적으로 개혁하고 나오고 싶었는데, 서울에서 공모제가 도입이 되던 당시 나는 임기가 4년 이상 남지를 않아서 공모제 교장에 도전해 보지도 못하고 학교에서 물러나왔다.

나는 초등교사협의회와 강서남부교사협의회 활동, 전교조 활동을 하면서 교육 개혁이라는 의제를 붙들고 많은 고민을 하면서 가는 학교마다 교사들을 모아 교사협의회를 만들고 전교조 가입을 권유하고 교육 비리의 시정과 정도를 위하여 교장, 교감 등 학교 관리자들과 많은 싸움을 하면서 학교 생활을 하였다. 그중에 대표적인 싸움의 교사들의 학년 배정이나 부장교사 임용, 업무분장의 공정성 확보를 위하여 인사위원회 싸움을 치열하게 해 왔다.

내가 네 번째로 부임해 간 ‘신시흥초등학교이다. 지금은 ’흥일초등학교‘로 개명이 되었다. 이 학교에서 근무를 하던 노태우 정권시절, 경찰에 의한 명지대생 강경대 군 타살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전교조 등 시민, 노동 단체 등 이 노태우 정권의 만행에 강혁히 대응 투쟁을 하였다. 전교조도 '노태우 정권 퇴진' 투쟁을 하면서 현장 교사들의 시국선언을 조직하고 이에 대응하는  싸움을 했다. 나는 당시 시국선언 대표로 활동을 하다 해직이 되었다. 당시에 나는 가는 학교마다 3월 초 학급 담임을 맡으면 학부모들에게 편지를 보내어 촌지 등 일체의 금품을 받지 않는다고 선언을 한다. 이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시국선언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직위해제가 되었다. 그러자 학부모들이 학교로 몰려와 "촌지도 안 받는 훌륭한 선생님을 왜 해직시키냐?"고 항의를 하였고, 출근을 저지하는 관리자들과 싸우면서 교문 앞에서 한 달 이상 출근투쟁을 하였다.  이 학교에 근무를 할 때 몇몇 교사들과 뜻을 모으고 학년 배정, 업무 분장의 공정한 배분 등의 인사위원회 싸움을 하였다. 이 싸움을 모범적으로 했다고 하여 이웃에 있는 학교 교사협의회나 전교조 분회들한테 모범 사례로 소개되기도 하였다. 이 인사위원회 싸움은 그 후 학교에 복직이 되어 <신성초>, <구로남초>, <문래초>, <서정초> 등 내가 가는 학교마다 치열하게 싸워 인사의 공정성을 확보하는데 좋은 사례들을 많이 만들었다. 이런 것이 토대가 되어 혁신학교인 <서울신은초등학교>에서는 학교장이나 교감의 입김이 학년 배정, 업무 분장을 함에 있어서 그들의 입김을 거의 배제할 수 있었다. 교사들이 서로 머리를 맞대고 합의와 호양의 정신을 발휘하여 모든 교사들이 만족할 수 있는 인사배치를 할 수 있었던 것은 굉장히 획기적인 혁신학교 성과라 자부해 마지않는다. 물론 내가 다 한 것은 아니고 이런 바람을 잡고 분위기를 주도해서 모든 교사들의 총의를 모을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드는 역할을 많이 했다는 것이다. 서울형 혁신학교가 2011년 <강명초>, <은빛초>, <상원초> 등이 3월에 개교를 했고, 내가 근무했던 <신은초>, <천왕초>는 6개월 늦은 가을 학기에 개교를 했다. 따라서 앞에 개교를 한 학교들의 사례를 모으고 들으면서 서울신은초의 인사원칙을 세우고 교장, 교감을 설득하여 구성원들의 합의하에 민주적으로 부장 선임과 학년 배정, 업무 분장 등을 할 수 있었다.

다음 회차에는 그 상세한 이야기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김광철 객원편집위원  kkc082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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