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과 카터 대통령
2) 김대중과 카터 대통령
김대중과 동갑인 카터는 유난히 도덕정치와 인권 그리고 평화를 중시한 대통령이었다. 1970년 미국에서 흑인차별이 가장 심하고 보수적 지역으로 꼽히는 조지아에서 주지사로 당선돼 "인종차별 시대는 끝났다"고 선언한 사람이다. 1977-81년 대통령으로 일할 때는 무능하다고 인기가 낮아 재선에 실패했지만, 퇴임 후 정력적 평화운동가로 나서 더 유명해졌다.
카터가 박정희와 정상회담을 갖기 위해 1979년 6월 서울을 방문하기로 했다. 그는 인권문제와 주한미군 철수를 1976년 대선공약으로 내걸고 1977년 취임하자마자 한국의 인권문제를 비판해 박정희와 극심한 갈등을 불러오고 있던 터였다. 김대중을 비롯한 민주 인사들과 학생들은 카터의 인권정책 때문에 그에게 우호적 감정을 갖고 있었지만, 거의 모든 민주화운동 단체들이 방한반대 성명을 발표했다. 이에 글라이스틴 (William Gleysteen) 주한미국대사는 국무부에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김대중과 윤보선 등 한국 반체제 인사들과 주한미국인 지지자들, 그리고 이들에 동조하는 한국 방문 미국인들이 정상회담 개최를 방해하거나, 최소한 연기시키기 위해 중대한 압박을 준비하고 있다..... 이들이 정상회담을 반대하는 이유는 회담을 통해 미국이 박정희 개인을 승인하게 됨으로써 한국의 인권 증진에 역행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는 정상회담을 반대하게 되면 그나마 제한적으로 증진되고 있는 인권을 오히려 후퇴시키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카터가 몹시 굳은 표정으로 서울에 도착했다. ‘인권 대통령’으로서 ‘한국의 가장 저명한 인권 희생자’로 가택연금에 처해있던 김대중과 오래 전부터 면담하고 싶어 했지만 그럴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카터는 미국을 떠나기 전 “한국대통령과의 일정을 취소하게 되더라도 김대중을 만나야겠다”고 했다. 이에 글라이스틴은 그러면 “정상회담 분위기가 냉각되고, 한국방문 성과가 사라지며, 박정희가 개인적 모욕으로 받아들여 인권문제에 관한 미국의 노력이 무산될 수 있다”며 극구 만류했다. 이런 상황에서 정상회담이 역사상 가장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진 가운데 신랄하고 험악한 말이 오갔다. 카터는 인권이 미국의 대한정책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라면서 긴급조치 9호를 철회하고 재소자들을 될수록 많이 석방하라고 요구했다.
김대중은 2010년 자서전에 다음과 같이 썼다. “한국에 온 카터 대통령은 나를 만나고 싶어 했다. 그러나 박 정권은 나와의 접촉을 철저히 차단했다. 그때는 만나지 못했지만 카터와 나는 훗날 교분을 쌓고 한반도를 위해 많은 일을 했다.” 김대중은 카터와의 만남을 박 정권보다 주한미국대사가 더 적극적으로 방해했던 사실을 그 후에도 몰랐던 모양이다.
이와 관련해 미국 정부도 잘못된 공식 성명을 1989년 6월 발표했다. 1988년 한국 국회에 설치된 ‘5.18광주민주화운동 특별조사위원회’가 사건 당시 미국 측 핵심 당사자들이었던 주한미국대사와 주한미군사령관의 증언을 요청하자, 국무부가 이를 거부하는 대신 서면 질문에는 회답한 것이다. <1980년 5월 대한민국 광주사건들에 대한 미국정부 성명 (United States Government Statement on the Events in Kwangju, Republic of Korea, in May 1980)>이란 제목으로 약 50쪽의 문서를 통해 미국의 개입과 역할을 어느 정도 밝혔는데, 그 정부문서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카터 대통령은 1년 전 김대중 씨를 만난 일이 있어 그의 사정에 대해 개인적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아래에 밝히듯, 카터와 김대중은 1980년 서울이 아니라 1983년 조지아에서 처음 만났다.
1980년 8월 전두환이 대통령 자리에 오르자 카터가 그에게 편지를 보냈다. 김대중 관련 대목만 소개한다. “김대중 씨에 대한 재판은 국제적으로 널리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대통령이 이 사안이 불공정하게 처리됨으로써 한국과 미국 그리고 다른 나라와의 관계를 저해하지 않도록 조치를 취해 주실 것을 촉구합니다. 김대중 씨를 처형하거나 단순히 사형선고를 내리는 것만으로도 심각한 역풍을 맞을 수 있습니다.”
1980년 9월 김대중이 사형선고를 받자 아내 이희호가 카터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의 목숨을 구해달라는 간절한 청원이었다.”
1980년 11월 미국 대통령선거에서 레이건 공화당후보가 카터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감옥에서 소식을 들은 김대중은 당시 심정을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항소심 선고공판은 11월 3일 육군 대법정에서 열렸다. 재판부는 1심대로 사형을 선고했다. 그런데 이틀 후인 5일, 사형선고보다 더 낙담할 일이 일어났다. 미국 대통령선거에서 민주당 지미 카터 대통령이 공화당 로널드 레이건 후보에게 패했다..... 하늘이 무너졌다. 도덕성과 인권을 강조했던 카터 대통령이 재선했더라면 내 신변에도 변화가 생길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희망이 고여 있던 마지막 둑이 터져버렸다. 나는 너무 슬펐다. 발을 뻗고 소리 내어 울었다. 레이건은 보수파로 더 이상 기대를 걸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정녕 사형이란 말인가. 하느님이 나를 버리셨다는 말인가’.”
카터는 12월 주한미국대사를 통해 김대중 사면을 요청하는 친서를 전두환에게 보냈다. 일주일 후 도쿄를 거쳐 서울을 방문한 브라운 (Harold Brown) 국방부장관은 전두환을 만나 김대중을 처형하면 한미 간 안보와 경제관계에 심각한 결과를 불러올 것이라는 카터의 ‘엄중한 메시지’를 전했다.
1981년 1월 카터는 레이건 당선자에게 김대중 구명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대통령직 인계인수에 ‘김대중을 살려야 한다’는 내용을 포함했다. 레이건이 전두환에게 김대중의 생명을 보장하도록 요구했다는 것을 알고 카터는 이에 고마움을 표했다.
1983년 3월 김대중과 카터가 드디어 만났다. 김대중이 1982년 12월 형집행 정지를 받고 미국에 망명해 있으면서 조지아 에모리대학에서 강연하고, 1993-97년 주한미국대사를 지낸 레이니 (James Laney) 총장과 카터 센터를 방문한 것이다. 김대중이 진심으로 감사 인사를 건넸다. “사형수로 있는 나를 구명하려 노심초사해 주신 데 대해 깊이 감사드립니다. 사실은 당신이 선거에서 레이건에게 졌을 때 ‘이제 죽었구나’ 하는 생각에 발을 뻗고 울었습니다.” 눈물까지 글썽거리는 김대중에게 카터가 화답했다. “독재자들이 그렇게 협박하고 회유해도 굴하지 않는 당신의 용기와 인내심을 높이 평가합니다. 앞으로도 긴밀히 연락하기 바랍니다. 우리는 동지입니다.” 2년 후, 1985년 1월 김대중이 2월 실시될 한국 총선에서 야당에 도움을 주기 위해 귀국을 결심하고 로스앤젤레스에서 고별강연을 하자 카터가 축하 전문을 보냈다.
김대중이 1992년 12월 대통령선거에서 또 떨어져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1993년 1-7월 영국에 머무르다 9월 미국을 방문했다. 구상 중인 아태평화재단에 대한 도움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카터와 키신저 등을 만나 통일구상을 설명하고 협력 당부해 전폭적 지지를 받았다. 특히 카터는 김대중의 의견을 대통령 안보담당보좌관과 국무부장관에게 전달해주겠다고 했다. 10월 스칼라피노 (Robert Scalapino) 버클리대학 교수와 대담하면서는 카터 대통령을 미국의 대북 특사로 보내 김일성과 북핵문제에 관해 일괄타결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했다.
1994년 미국이 북한 핵시설 폭격을 준비하는 상황에서 5월 김대중이 워싱턴을 방문해 내셔널프레스클럽에서 북핵문제 해결방안을 제시했다. 그해 그 클럽의 ‘베스트 스피치’로 뽑힌 연설에서 “국제적으로 존경받고 특히 중국과 북한에서 신뢰를 받으며 클린턴 대통령과 유사한 성격을 가진 원로 정치인을 북한에 보낼 것을 권하고 싶다”며, ”가장 적합한 인물은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라고 했다. 물론 김대중은 하루 전 카터에게 전화해 설득하고 동의를 얻었다. 카터는 만약 북한에 가게 되면 사전에 김대중의 조언이 필요하다며 꼭 만나보겠다고 했다.
6월 카터가 방북 길에 서울에 들러 김대중을 만나고 싶어 했다. 김영삼 정권이 그의 방북 자체를 비판하고 반대했기에, 카터는 김대중을 직접 방문하는 대신 레이니 주한미국대사를 보내 조언을 구했다. 카터가 평양에서 김일성과 만나 북미전쟁으로 치달을 뻔한 갈등위기를 해결하고 김영삼-김일성의 남북정상회담 합의 선물까지 안고 돌아왔다.
7월 김일성이 갑자기 사망하자, 이른바 ‘조문 파동’으로 남북관계가 얼어붙었다. 이를 풀기 위해 김대중이 9월 미국을 방문해 카터를 다시 만났다. 카터는 자신의 방북과 북미 갈등 해소에 대한 김대중의 공로를 높이 평가하고 감사했다. 김대중이 한반도 평화에 대한 카터의 노력에 사의를 표하며 재방북을 요청했지만 성사되지 않았다.
김대중이 1998년 2월 대통령에 취임하고, 6월 클린턴과 한미정상회담을 위해 미국을 방문했다. 미국에 망명했던 사형수가 대통령이 돼 방문한 터라 정상회담 말고도 15회 연설과 70회 이상의 행사가 예정된 상황에서 숨가쁜 시간을 보내느라 밀려드는 면담 요청을 다 들어줄 수 없었다. 특히 카터가 만나자고 했지만 시간을 내지 못한 것은 김대중이 “두고두고 아쉬워했다.”
그 대신 2001년 8월 카터가 ‘사랑의 집짓기 (Habitat movement)’ 운동 자원봉사자로 한국을 방문하자, 김대중은 충남 아산으로 달려가 땀흘리는 ‘평화와 인권의 전도사’를 만났다. 카터가 다음해 2002년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김대중이 2년 전 먼저 그 상을 받느라 조금 미안했는데 그에게 맘껏 축하인사를 보냈다.
둘의 우정을 옆에서 지켜본 이희호는 2008년 자서전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카터 대통령 부인) 로절린 카터는 여러 차례 만나 일일이 기억할 수 없을 정도다. 카터는 남편의 생명이 위태로웠을 때 현직 미국대통령으로 힘을 보태준 생명의 은인이다. 퇴임 후에도 민주주의, 인권, 평화의 가치관을 공유한 노벨평화상 수상자들로 지금까지 돈독한 우정을 유지하고 있다.”
편집 : 김미경 편집장
한겨레신문 주주 되기
한겨레:온 필진 되기
한겨레:온에 기사 올리는 요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