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해진대사 장보고 비가 일본 延曆寺 文殊樓(大津市 坂本本町 220) 옆에 세워졌다. 한.일의 역사와 문화, 경제, 외교에 있어서 청해진대사 장보고와 일본 연역사 圓仁 스님의 관계는 오늘날 재음미할 가치가 있다고 여겨 완도군이 사단법인 장보고연구회에 의뢰하여 세운 것이다.

장보고는 서기 820년 경  당나라에 거주하는 신라 교민들을 규합하여 중국 동해안과 산동반도, 대운하변, 장강하류, 절강성에 이르는 거대한 해상상업 세력을 구축하였다. 824년에는 무역선단을 일본에 파견하였고 당시 동아시아 해상에서 횡행하던 해적을 소탕하기 위하여 828년 신라 흥덕왕의 허락을 받아 지금의 완도에 1만의 군사로 청해진을 건설하고 청해진대사가 되었다.

청해진 건설 직후 동아시아 해상의 해적은 소탕되어 평화와 우의의 뱃길이 열리게 되었다. 장보고는 청해진을 중심으로 신라와 중국, 일본의 해상무역을 활성화하고 동남아시아를 거쳐 아라비아까지 해상교역을 하였다. 인류 역사상 처음 동양에서 서양에 이르는 해상 교역로가 완성되었다. 동아시아 해상에서 민간 해상 활동이 활발해지자, 한.일.중의 문물과 문화 교류가 크게 신장되었다.

평화의 뱃길이 열린 시대에 장보고와 圓仁 스님은 인연을 맺었다. 圓仁스님은 838년 일본 천태종의 求法僧으로 선발되어 당나라 불교 성지를 방문하고 불교연구를 하고자 고난의 여정을 시작하였다. 847년 여행을 마치고 귀국할 때까지 9년 6개월 동안 圓仁스님은 장보고의 사찰과 장보고 휘하의 재당 신라인들의 도움으로 구법여행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장보고는 독실한 불교 신자로 주요 활동지마다 사찰을 건립하였고 스님들을 극진히 모셨다. 특히 圓仁 스님의 구법여행에 각별한 관심과 애정을 표했다. 圓仁 스님이 남긴 <입당구법순례행기>는 이와 같은 두 분의 인연을 소상히 전하고 있다. 圓仁 스님은 장보고의 인품과 업적을 높이 평가하고 공경과 흠모의 정이 담긴 서한을 남겼다.

圓仁 스님은 당나라에서 장보고 선단의 도움으로 많은 불구와 불교 경전을 일본에 가져갈 수 있었다. 圓仁 스님은 당에서 가져온 佛具와 佛敎經典 하나에 하나의 건물을 지어 연역사의 대대적인 중창을 이룩하였다. 또한 유언으로 적산선원을 열게 하고 신라명신을 봉안하였다. 신라명신은 장보고을 신으로 모신 것이다. 두 분의 관계는 비길 데 없이 격조 높고 아름다운 관계라 아니할 수 없다. 장보고 대사와 圓仁 스님의 인연은 오늘날 한.일 관계에도 시사하는 바가 많다고 본다.

오늘날 한일 관계를 보면 양국의 대립과 침략의 역사는 크게 부각시키고, 선린우호와 상호 발전적 영향을 주고 받은 사실들은 외면하는 경향이 있다. 연역사의 청해진대사 장보고비는 한.일 양국의 공식기관(완도군, 연역사)이 함께 세운 최초의 기념비다. 이 작은 비가 한.일 양국의 선린우호와 상호발전에 기여하기를 염원하면서 이 비를 세웠다.
 

청해진대사 장보고비 설립

2000년 10월 : 완도군, 사단법인 장보고연구회에 청해진대사 장보고비 건립 의뢰

2000년 10월 ~ 2001년 12월 : 사단법인 장보고연구회. 서울 대림석재에서 청해진대사 장보고비 제작

2001년 11월 28일 : 청해진대사 장보고비 한국에서 일본으로 운송

2001년 12월 21일 : 청해진대사 장보고비 연역사 근본중당 앞 동산의 圓仁의 사당 문수루 옆에 세움

2002년 1월 13일 : 일본국 대진시 연역사에서 연역사 執行 淸原惠光 스님의 주관으로 청해진대사 장보고비 건립 제막식 거행 - 완도 군수 외 14명, 연역사 청원혜광 집행과 부집행 전원 외 다수 참석

일본에 세워진 장보고대사 기념비
일본에 세워진 장보고대사 기념비

청해진대사 장보고비 개요

- 비높이 : 4.2m, 비신: 2.25m, 용갓 : 0.8m, 거북받침(높이:1.05m, 길이:2.4m, 폭:1.5m)

비문 내용

張保皐(弓福, 弓巴, 寶高)는 신라 사람으로 九世紀 전반 신라, 일본. 당 3국의 해운 질서를 바로잡고 동남아시아를 비롯하여 페르시아와도 활발한 해상 교역을 펼친 해상왕이다.

신라 서남해의 완도에서 태어나 높은 뜻을 품고 당으로 건너가 30세에 무령군 군중소장에 올랐다. 그는 타고난 용맹과 바다 같이 넓은 도량을 지녔다.

동아시아 해상에서 횡행하던 인신매매에 의분강개하여 흥덕왕 3년(828)에 귀국하여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고 해적을 소탕한 뒤 우의와 평화의 뱃길을 열었다. 일본 천태종의 제3세 좌주인 자각대사 圓仁은 9세기 중엽 9 년 반 동안 당에서 구법순례를 하면서 장대사의 도움을 받았고, 대사가 세운 적산 법화원에 유석하였다. 그 인연으로 오대산과 장안 등지를 순례할 수 있었다. 대사는 그의 일기 <입당구법순례행기>에서 장대사에 대한 흠앙의 정을 다음과 같이 남기고 있다.

‘生年 未袛奉 久承高風 伏增欽仰 仲春己喧 伏惟

大使尊體 動止萬福 卽此圓仁遙蒙德尤任勤 圓仁 爲果舊情 淹滯唐境 微身多幸 留遊大使本願之地 感慶之外 難以喩言 圓仁辭鄕之時 伏蒙筑前 大守寄書一封轉獻大使 忽遇船沈淺海 漂失資物 所付書札隨波沈落 悵恨之情 無日不積 伏冀莫賜怪責 祗奉未期 但增馳結之情 謹封狀起居 不宣謹狀

開成 五(840) 年 二月十七日
日本國 求法僧 傳燈法師位 圓仁 狀上
淸海鎭大使 麾下 謹空

後學들은 大師의 求法體驗談을 통하여 九 세기의 신라, 일본, 당의 문화교류 실상을 알게 된다. 두 분이 다져 놓은 정다운 관계가 오늘날 두 나라 사람들 사이에 널리 알려져 더욱 두터워 지기를 바라며 이 비를 세운다.

서기 2001년 12월
설립 :  대한민국 완도군(청해진)
후원 : 해양수산부
장보고해양경영사연구회
재단법인 해상왕장보고기념사업회
사단법인 장보고연구회
일본국 연역사
비문 한국말 : 김문경, 이경구
일어 및 영어 : 손보기
감수: 손보기, 김성훈, 사사끼고오조오, 김동화
조각 : 이재휴
제작 : 대림석재

圓仁 스님이 장보고대사에게 보낸 서찰 번역(김문경 圓仁의 <입당구법순례행기>역주)

나서 지금까지 삼가 만나뵈옵지는 못하였습니다만 오랫동안 높으신 은덕을 들어 왔기에 흠모의 정은 더해만 갑니다. 봄은 한창이어서 이미 따사롭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데 대사님의 존체 거동에 만복하옵기를 비옵니다. 이 엔닌은 멀리서 인덕을 입사옵고 우러러 받드는 마음 끝이 없습니다. 엔닌은 옛 소원을 이루기 위하여 당나라에 체류하고 있습니다. 미천한 몸 다행하게도 대사님의 본원의 땅(적산 법화원)에 머물고 있습니다. 감사하고 즐겁다는 말 이외에 달리 비길만한 말이 없습니다. 엔닌이 고향을 떠나올 때 엎드려 지쿠젠(筑前)태수의 서신 한 통을 기탁 받아 대사께 전해 올리려 하였습니다. 그런데 홀연히 배가 얕은 바다에 가라 앉아 물건들은 떠내려 가고 기탁 받은 서찰도 물결 따라 흘러가 가라앉고 말았습니다. 한 맺힌 마음 하루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기이하게 생각하셔서 책망하지 마시옵소서. 언제 만나 뵈올지는 기약할 수 없습니다만 다만 대사를 경모하는 마음 더해갈 뿐입니다. 삼가 글을 올려 안부를 여쭈옵니다. 갖추지 못하옵고 삼가 올립니다.

개성 5년 2월 17일
일본국 구법승 전등법사위 엔닌 올림
청해진 장대사 휘하 삼가 상서 

* 엔닌스님이 당나라에 갔을 때 육지에 접안조차 할 수 없었으나 장보고의 도움으로 접안 할 수 있었다. 당시 당나라는 통행증이 없으면 성 밖을 나갈 수가 없었는데 장보고가 발행한 통행증을 소지하면 당나라 전역을 무사 통과 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한 인연으로 당나라의 불교를 일본으로 가져갈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편집 : 양성숙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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