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사는 순천에서는 10월 21일 순천시와 한겨레신문사의 협업으로 공모한 여순문학상 시상식이 있었습니다. 하는 일 때문에 참석은 못 했으나 한겨레신문 기사를 훑어보며 격세지감을 느꼈습니다.
제주도 4.3 항쟁과 여순사건은 떼려야 뗄 수 없는 한 몸처럼 연관 있는 피 묻은 한국 근현대사의 일부분입니다. 그동안 제주 4.3항쟁은 한국 시민들에게 영화와 책을 통해서 먼저 알려졌고 후에 국가적 차원에서 제주 4.3항쟁의 진상규명과 특별법을 입법화하며 널리 알려졌습니다.
반면에 여순사건은 그동안 주목을 많이 못 받다가 올해에 들어서 여순사건특별법이 국회에서 통과되어서 진상규명과 희생자를 비로소 지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순문학상 제정은 대한민국의 시민들에게 본격적으로 다가가서 알리는 첫 시작입니다.
정부의 법 제정과 지원도 중요하지만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희생자와 유족들의 아픔을 오늘을 사는 현재의 전국 방방곡곡에 사는 시민들과 공유하고 알리는 방법은 문학과 예술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과거사에 관심을 가지는 일부 시민들을 제외하고 요즘 누가 신문과 방송을 보고 과거사에 관심을 가지겠습니까! 그들의 무관심의 벽에 실금을 긋는 섬세한 작업을 문화예술인들이 효과적으로 잘 해내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정부와 지자체에서는 정책적 지원과 아낌없는 후원을 해주시면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곳 남도는 붉게 물든 단풍과 벼가 노랗게 익어 곳곳이 아름답기 그지없습니다. 붉게 물든 단풍이 노비와 농민의 민란, 동학농민혁명과 의병들의 투쟁, 광주학생운동과 5.18 광주항쟁 등 면면히 이어져 오는 남녘의 의로운 역사를 선명히 알려주는 핏빛 상징이란 생각이 문득 듭니다.
저는 자라면서 주위 어른들과 부모님으로부터 종종 듣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경상도의 공장지대가 있는 큰 도시나 서울로 돈을 벌러 간 젊은 친척들이 전라도 사람이라고 멸시받고 차별받는다는 말들과 연애도 결혼도 전라도 사람이라고 반대한다고 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곳에 적응하며 경상도 말과 서울말을 금세 배우고 적응해가는 친척들을 보며 전라도 사람의 천형 의식을 제 몸에도 은연중 체화해갔던 것 같습니다.
다행히도 지금은 나고 자랐던 순천에서 살며 전라도 사람의 정체성을 간직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 자식도 선조들의 항쟁과 정의로운 역사의 유전자를 이어받기를 바라며 부끄러워하지 않고 맘껏 전라도 사투리를 왁자지껄 지껄이고 태어난 이곳을 부모 못지않게 가슴 뻐기며 자랑스러워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자란다면 소위 서울대니 하는 명문대를 보내지 않아도 가히 잘 키웠다고 하지 않을까요?
지난 주말은 갖가지 축제와 문화행사로 눈과 귀가 즐거웠습니다. 저뿐만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시민들 또한 깊어가는 가을을 풍요롭게 즐기셨으리라 믿습니다. 저는 영화음악과 함께하는 클래식 공연을 보러 갔었습니다. 영화 <미션>의 주제가 가브리엘의 오보에 연주를 들으면서 감동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스페인 군인들의 원주민 학살과 한국전쟁 전후 기간 동안 자행된 민간인 학살을 떠올렸습니다. 지휘자의 숭고한 몸짓과 슬프고 애절한 아름다운 악기 소리가 어우러져 가슴이 참으로 저리고 아팠습니다.
이곳 순천, 여수뿐만 아니라 전국 곳곳의 피맺힌 원혼들의 절규가 음악과 함께 하는 것 같았습니다. 음악을 들으며 비참하고 억울하게 돌아가신 원혼을 달래는 음악회가 매년 여순문학상 시상식 때마다 함께 열리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향인 이곳 남도에서 국악이든 서양음악이든, 진도 씻김굿이든 레퀴엠이든 함께 왁자하게 울려 퍼져 억울하게 희생된 원혼과 산 사람들이 함께하면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한반도를 둘러싼 긴장이 다시 시작되고 예술의 싹을 자르려는 어리석고 무능한 권력이 시민의 한숨과 실소를 자아내는 엄중한 시기입니다. 과거의 불행한 역사가 반복되지 않고 대한민국이 전쟁이 없는 평화의 길로만 순항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바라는 점은 '여순사건'이란 명칭이 '제주 4.3항쟁'이나 '광주민주화운동'처럼 '여순10.19항쟁'이라는 공식 명칭으로 바뀌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제주도를, 제주도민을 공격하라는 상관의 지시를 거부한 군인들의 사상이 좌익이든 우익이든 현재 시점에서 뭐가 그렇게 중요한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이데올로기 과잉이 난무한 시기가 다시 돌아오는 것 같은 암울함이 우리나라를 뒤덮고 있습니다. 이럴수록 우리 시민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맑고 밝은 눈으로 세상을 지켜봐야 하겠습니다.
편집 : 김미경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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