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 제128주년 기념 정기학술대회 발제문

[동학농민전쟁과 두레문화, 대동 세상]
 

 

<서론>
 
87년 6월 항쟁 30주년을 맞이한 2017년 6월에 그 기념행사를 준비하면서 근현대사에 연연히 이어온 중요한 민중항쟁을 체크, 갑오동학농민전쟁, 3.1만세독립운동, 4.19혁명, 5.18광주민주항쟁, 6.10항쟁, 촛불혁명 등 여섯 군의 풍물대오를 나누어 서울광장에서 민주시민대동제를 개최하였다. 
 
필자는 여기서 동학군 풍물대오를 맡게 되어 동학관련 단체를 수소문하다보니 서울 종로에 동학실천시민행동이라는 단체를 알게 되었고 마침 보은에서 1893년 일어난 동학 보은취회를 기념하는 행사를 하고 있어 찾아뵙고 동학 농민전쟁의 의미를 접하게 되었다.
 
새로운 세상, 백성이 편안한 나라, 사람이 하늘인 세상을 꿈꾸며 자발적으로 모여 평화집회를 가진 보은 동학은 이미 새로운 민중의 힘을 맛보았으며 그 질서정연함은 차분하게 이듬해 갑오동학혁명으로, 3.1만세로, 지금 시기 촛불혁명으로 이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동학과 3.1혁명을 중요시하는 동학실천시민행동을 통해 2018년에는 3.1혁명 99주년 천북울림을 탑골공원에서 시작하여 광화문으로 행렬을 이루었고 2019년 100주년 때에는 감동의 만북울림을 개최하였다.
 
동학에서 3.1로, 동학에서 5월로, 동학에서 통일로...
이러한 구호들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풍물인 으로서 늘 일하는 사람들의 대동놀이를 꿈꾸었는데 역사를 거슬러 동학농민혁명을 통한 대동 세상 발원은 아주 흥미로운 것이었다. 그래서 오늘 2022년을 보내는 이 귀한 자리에서 대동 세상을 이루는 근간인 동학과 평등 평화통일세상 염원, 동학과 두레, 그리고 뭇 생명들이 어울리는 대동 세상을 이야기 해보고자 한다.
 
<동학 전개과정과 의의>
 
1800년대 초반 순조, 헌종 등 어린 왕들이 즉위하면서 안동 김씨, 풍양 조씨  등 특정세력이 권력을 장악해 세도정치가 판을 치며 전정, 군정, 환정 등 삼정이 문란해지고 친족들의 권력기반을 확대하는데 열을 올리며 위가 썩으니 자연 지방 관아까지 매관매직과 부정부패가 하늘을 찔러 농민들의 고통은 날로 심각 해졌다. 흉년이 들어도 무거운 세금부과와 차별로 평안도에서 홍경래 난이 크게 일어났고 이후 제주, 전라, 경상 황해도까지 지속적으로 곳곳에서 크고 작은 농민봉기들이 호응하였다. 
 
밖으로는 산업화가 진행되고 있던 서양제국주의 국가들이 17~18세기 프랑스혁명이나 1917년 러시아의 볼세비키혁명 등 전 세계사로 불어 닥친 근대 개혁열풍을 하면서 내부적으로 인종차별과 노동자들을 착취하며, 대외적으로는 식민지약탈경쟁을 지속하여 끊임없이 약소국의 국권을 강탈하는 가운데 조선을 위협하였고 아편전쟁으로 청나라가 패배하고 이를 목격한 일제는 개항을 서두르는 한편 근대화를 추진하면서 호시탐탐 동아시아에서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는데 부패한 조선정부는 계속되는 민란과 농민봉기에 자체 개혁으로 수습하기 보다는 외세에 기대면서 조선반도는 청, 일, 그리고 서구의 각축장으로 내몰리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인간의 존엄성과 인류애, 평등을 내세운 동학은 봉건적 수탈구조에 시달리던 농민들에게 급속하게 퍼져나갔고 최제우에 이어 2대교주인 최시형 그리고 손병희, 김개남, 전봉준 등 동학 지도자들이 진출하였다. 전국 12개도에서 봉기했던 동학농민혁명은 오랜 봉건적 지배구조에서 오는 수탈과 억압, 천대를 반대하는 ‘인내천‘의 반봉건 투쟁과 ’척왜양창의‘의 반외세 투쟁에서 비롯되었다.
 
1892년 조병갑(趙秉甲)이 고부군수(古阜郡守)로 부임, 과분한 세금을 징수하고 근거 없는 죄명을 씌워 양민의 재산을 갈취(약 2만냥, 1880년 정부예산의 1/100)하는 등 못된 짓을 자행하던 중, 이미 저수지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보를 새롭게 수축(임금 없이 강제징벌)한 후 물을 이용하는 대가로 과중한 수세(水洗)를 물려 700여석(8400리터 축구장바닥크기의 3층높이)을 거두는가 하면, 균전사(토지측량, 개간 장려, 지방관 부정행위 처벌기관), 전운사(지방의 세금을 서울로 운반) 등 지방기관까지 만연한 폭정과 부정부패는 농민들로 하여금 봉기하게끔 하였고 정부 측이 회유를 해서 해산을 거듭해도 구조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농민군은 전주성을 함락하고 집강소를 설치하는 등 봉건제 개혁에 박차를 가하였다.(참고: 청년 서재필, #032 동학농민운동)
 
그러나 전주성 함락에 놀란 정부는 자체적인 개혁으로 해결하지 않고 청군에 도움을 요청, 너무 쉽게 외세를 끌어들였고 호심탐탐 기회를 노리던 일제가 이를 명분삼아 파병하여 이를 염려한 농민군은 전주화약을 맺고 자진해산하였고 폐정개혁안에 주력하지만 일제는 청일전쟁을 일으키고 신식무기로 관군과 합세하여 척왜로 2차 봉기한 동학농민군을 패퇴시켰다.
 
제국주의의 야욕을 드러낸 일제에 비록 패배하였지만 동학농민전쟁은 이미 양반, 천민을 가르던 신분제를 폐지하였으며 집강소 등 농민이 실질적인 개혁의 주체로 나서게 하며 근대화의 동력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수만의 농민이 희생당한 반외세 투쟁을 통해서 열강들에 둘러싸인 지정학적 위치에 놓인 조선반도는 ‘외세에 기대지 않고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지키고 헤쳐 나가는 힘을 기를 때만이 나라와 백성을 지킬 수 있다.’ 라는 교훈을 주었다. 이러한 교훈은 이후 식민지 시절, 일제를 반대하는 의병활동으로 이어졌으며 3.1만세운동과 독립운동으로 자리매김 되었다. 
 
동학농민전쟁의 의미는 해방 후에도 미국, 소련 등 열강들에 의해 그어진 3.8선 분단문제 해법에 자주, 평화, 통일을 제시하고 있으며 그 분단에 기생되어 지탱해온 친일, 친미 군부독재에 맞서 4.19와 5.18 그리고 6.10항쟁, 천만 촛불로 연연히 이어져 불의에 맞선 민주주의로 꽃피워왔다.
 
<동학과 두레 그리고 농민 단결문화> 
 
동학이 태동하기 시작하던 조선후기는 쌀이 곧 돈으로 통용될 정도로 농업이 주류였고 악덕 탐관오리의 부정부패에 맞서 농민 봉기도 빈번할 때여서 신분제의 개혁이 필수로 요구되었다.
 
봉기가 이루어져 해방이 되면 악덕 지주를 징치하고 관아의 곡식을 분배하는 등 ‘사람이 곧 하늘’인 평등사회를 맛보게 되는데 이때 농민 봉기를 세워내는 마음들을 효과적으로 모아내는 조직이 두레였다. 두레는 조선후기 농업생산법의 변화에서 비롯되었는데 수리시설이 개선되는데서 논농사가 활발해지며 나온 농사법으로 ‘이앙법’이 자리 잡으면서 농업생산 공동체가 건설되었다.
 
‘이앙법‘은 모판에서 싹을 틔운 모를 논에 심는 농작법으로 씨 뿌림 자리가 작고 잡초 손질하기도 쉬워 관리하는데 편하고, 초기성장과 이후 본격적인 성장이 이루어지는 토지를 나누어 경작 할 수 있게 됨으로 해서 강수량이 적은 시기 물을 효율적으로 댈 수 있었고, 제초작업도 절감되는 등 효과적인 농사법이다. 17세기 이래로 제한된 노동력을 효율적으로 동원하여 서로 돕는 공동노동으로 이앙법과 쌀, 보리 2작 농업기술이 확산됨에 따라 집약적 농업생산 방식의 필요성 때문에 두레가 일반화되었다.(참고: 레포트하우 과제물-조선농촌사회의 이앙법 등)
 
두레는 보편적인 농민생활 풍습으로 정착되었으며 공동노동으로서의 진취성과 농민들의 자주적 성격이 매우 강한 긍정적인 조직이었으며 농민문화의 두레 풍물을 발전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생산을 함께 조직적으로 한다는 것은 개별적이 아닌 공동체적 문화가 자리 잡게 되고 필연적으로 단합된 힘과 자주성이 높아져 부패한 지배계급은 두레의 변혁적 힘을 두려워했다.
 
두레조직이 체계화 된 것은 절기별이나 노동주기와 깊은 관련을 갖는다. 주로 모심기와 김매기에 두레가 조직되었고 힘든 일을 해 가는 과정에 스트레스를 풀고 서로 간  재생산에 활력을 주기위해서 일과 놀이가 결합되었고 화합을 위해서 호미씻이의 놀이행사를 단오나 백중절기에 잡아 두레풍물과 대동놀이로 진행하였고, 수확 이후 겨울로 접어든 정월대보름에는 지신밟기와 달집 동제로 마을의 화합과 안녕을 기원하였다.
 
두레작업은 아침에 모여 풍물 길군악 치며 출발하고 논, 밭에 도착하면 두레기를 꽂아놓고 소리꾼이 선소리를 메기면 일꾼들이 소리를 받으면서 두레 일의 신명을 돋우었는데 일이 힘들지 않고 능률이 좋았다. 두레 밥으로 오전참과 점심, 오후참을 나누며 공동체적 유대감이 높아지고 동네 아낙들은 밥 짓기 품앗이로 수다를 떨며 소통하였다.(참고: 다음백과 두레)
 
두레 풍물굿은 김매기를 마치고 나면 마을을 돌고 농기를 세워놓고 굿을 벌였는데 이러한 문화가 일상생활이어서 마을사람 모두가 지금으로 보면 아주 잘 노는 고수들이었다. 두레 풍물굿은 이렇듯 일상이었고 놀이가 점차 커지자 백중 등, 날을 잡아 벌이게도 되었고 마을별로 농기싸움도 하고 줄다리기, 차전놀이, 고싸움놀이 등 대동놀이도 발전하게 되었다. 여기서 농기싸움 등 두레싸움은 자기 마을의 자긍심과 전투력을 높여 단결력을 과시하였는데 이러한 힘이 왜구나 오랑캐가 침입하였을 때는 군악으로 바뀌었고 두레조직은 전투부대가 되었으며 부패한 세상을 바꾸는데 결정적 봉기의 힘으로 작용하였다.
 
<동학과 대동 세상>
 
일과 놀이의 두레문화는 ‘사람이 하늘’ ‘사람은 누구나 고귀한 존재’라는 것, 어린이도 여성도 누구도 소외되지 않고 함께 어울려 사는 것, 장애인도, 지하 단칸방에 세 들어 사는 이웃도, 건설 현장에서, 컨테이너 벨트에서 일하는 노동자들도, 농민들도 다 소중한 존재이며 이 나라의 주인으로 자주적으로 살아갈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동학의 보국안민, 척양척왜, 인내천 정신은 이후 후손들에게 부당한 억압과 착취에 맞서 싸우는 동력이 됐으며 분단을 고착화시키는 외세에 반대해 늘 앞장서 왔다. 그리고 동학은 기후위기와 지구자원 고갈 속에 자본의 논리로만이 아닌 땅 파먹고 사는 농민들의 자연에 대한 소중함을 늘 강조하며 산천초목의 속잎 하나하나 소중히 가꾸어야 한다고 얘기한다.
 
돈 만이 우선이고 제국주의적인 시각에서 무조건적인 개발과 자동화, 석유 기름과 플라스틱, 시멘트 막 빼서 쓰기, 인류가 정말 다루기 힘든 원자력폐기물 등을 생각하면 다시 숲을 가꾸고 탈 원전과 대체 에너지 개발, 플라스틱 사용치 않고 생산도 다시 손으로 하는, 조금  불편하더라도 뭇 생명들이 어울려 사는 생명 평화세상으로 나아가야 한다. 대동 세상을 발현하기 위해서는 일하는 사람들의 두레문화를 다시 진작시켜 공동체로 나아가야 한다. 
 
두레문화가 중요하다는 것은 앞에서 많이 언급하였으므로 실천적인 차원에서 학교에서, 일하는 현장에서 체험학습으로 두레 풍물 치며 손으로 직접 모를 심고, 들일도 같이 해보면 좋겠다. 일하다 출출하면 주먹밥도 나누면서...
 
그래서 일하는 현장이나 노동조합, 농업현장에서 다양한 두레문화를 계승 발전시켜야 한다. 동학실천시민행동에는 동행풍물패가 있다. 2018년 3.1혁명 99주년 천북울림을 준비하며 그해 1월에 만들어졌고 그 이듬해엔 3.1혁명100주년 만북울림을 광화문 세종로 광장에서 진행하였다. 정말 장관이었다. 
 
회원들이 동학을 공부하고 몸소 실천하는 속에서 풍물활동을 하다 보니 민족의 자주적인 문제에 관심이 많아 ‘친일청산’의 행사, 그리고 부당한 외세의 간섭에 대응하는 ‘미국은 들어라’ 행사, 평화통일 행사에 적극 참여하고 있으며, 노동자, 농민행사도 적극 지원하고 특히, 남해에 마늘 농활에도 매년 참가하여 바쁜 일손에 큰 힘이 되고 있다. 필자가 보기엔 이렇게 끈끈하고 든든한 단체가 없다. 바로 동학을 학습하고 실천하기 때문에 이런 결속력이 나온다.
 
얼마 전에는 건설노동자와 학교 비정규직 1,000명의 노동자들이 북을 배워 천북울림을 하였는데 아주 믿음직하고 힘이 나는 큰 울림을 만들었다. 두레가 느껴지는 기획이 감동이었다. 이렇듯 두레문화로 일궈나가는 신명나는 대동세상, 우리민중들과 풍물패가 꿈꾸는 세상이다. 동학농민전쟁 130주년을 기념하는 자리에 두레풍물을 복원하는 만북울림을 해보고 싶다. 이제 다시 대동의 두레문화로 나아가자.
 
- 동학실천시민행동  임인출 공동대표
 
<참고문헌>
-청년 서재필, #032 동학농민운동
-레포트하우 과제물-조선농촌사회의 이앙법 
-다음백과 두레
-우리문화의 수수께끼 주강현 지음
-처음 만나는 우리문화 이이화 지음
-위대한 봄을 만났다 이이화 지음
-이덕일의 한국통사
-이이화의 인물한국사
-진짜 기본 한국사 김광일 김보라 지음
-한국사를 보다 조선 하
 
 
편집 : 심창식 편집위원
임인출 시민통신원  chool2231@hanmail.net

한겨레신문 주주 되기
한겨레:온 필진 되기
한겨레:온에 기사 올리는 요령

저작권자 © 한겨레:온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