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천의 사기열전에서 19금 내용이 조희(趙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화려한 꽃치고 시들지 않은 꽃 없고, 권력을 탐한 자 말년이 아름다운 꼴 못 봤습니다.

산책 중에 만나는 꽃입니다. 이미 정점을 찍고 선명하던 색은 나날이 바래져갑니다. 花無十日紅 이라고 모두 알고 있지만 사람 욕심이 어디 그런가요? 조희에 관한 사진을 구할 수 없어 시절 인연따라 꽃이 지고나면 열매 맺는 나무 사진 올립니다.
산책 중에 만나는 꽃입니다. 이미 정점을 찍고 선명하던 색은 나날이 바래져갑니다. 花無十日紅 이라고 모두 알고 있지만 사람 욕심이 어디 그런가요? 조희에 관한 사진을 구할 수 없어 시절 인연따라 꽃이 지고나면 열매 맺는 나무 사진 올립니다.

‘[대만이야기 121] 주지육림’ 편에서 중국 최초의 왕조 하나라를 멸망으로 이끌었던 요부 말희를 언급했었는데, 중국 역사에서 또 다른 희자를 쓰는 여자가 있습니다. 바로 조희(趙姬)입니다.

조희는 정사와 야사, 여러 문학작품 심지어 만화나 중국 영화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스펙터클한 색녀로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천하를 통일하고 최초의 황제가 된 진시황의 어머니이기도 하지요. 그렇다고 권력을 탐해 자식까지 죽이는 서태후와는 또 결이 다릅니다. 그저 천박한 탕부로 다루어지는 데, 그 요염함에 환관조차 색욕을 느꼈다고 전해집니다. 그런 어머니로 인해 따뜻한 사랑을 받지 못했을 진시황이 정상이기를 바랄 수는 없겠지요.

조희는 동거남 여불위를 만나면서 역사에 등장합니다. 여불위는 지금의 펀드매니저 조지 소로스 급의 거상으로, 2,000년 전에 원거리 무역으로 거부가 된 상인이었습니다. 특히 사람을 보는 안목이 뛰어나 주식 대신 사람에 아낌없이 투자하였지요. 여불위에 관한 글도 [대만이야기 26, 27] 편에서 이미 언급하였기에 조희 위주로 쓰겠습니다.

조희라는 이름은 조나라 姬, 당시 姬는 노래와 춤을 생업으로 하는 여자를 일컫는 말입니다. 왕족도 아닌 여자가 이름이 있을 리가 없지요. 일설에는 부잣집 딸이라는데, 나중에 어떤 짓으로 부자가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춤을 잘 추고 벼슬아치나 양반집 행사에 나가 춤을 추었다니 기생과 별반 다르지 않았을 출신입니다. 그러다 거상 여불위의 눈에 띄어 애첩이 되지요.

당시는 춘추전국시대 말기. 적과 동지가 수시로 바뀌는 군웅할거의 시대라 국가 간에 인질 교환이 빈번했습니다. 진나라의 별 볼 일 없는 서자 출신 이인(후에 자초로 개명)이 잦은 전쟁으로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조나라에 볼모로 잡혀있었습니다. 이 궁핍한 왕자 이인이 여불위의 시야에 들어오고, 여불위는 이인의 상이 왕의 재목임을 알아봅니다. 그래서 인생을 건 배팅을 하지요.

이인을 집으로 초청하여 애첩 조희로 하여금 춤을 추고 시중을 들게 합니다. 자고로 가장 귀한 선물은 자신이 가장 아끼는 물건이라고 합니다. 여불위의 예상대로 이인은 조희를 달라고 하지요. 그렇게 해서 조희는 이인 즉 후에 장양왕의 부인이 됩니다.

2천 년 전의 역사도 상세하게 기술하던 사마천이 불과 200여 년 전의 진시황 출생에 관한 기록은 오락가락합니다. 임신한 조희를 이인에게 주었기에 여불위는 진시황이 자기 아들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다고 하다가, 다른 곳에선 이인에게 간 지 12달 만에 아들을 낳았으니 장양왕의 혈육이라고 기록하기도 합니다. 이미 거세를 당한 사마천이 당시 권력자들의 심기를 고려한 자기검열은 아닐까?

장양왕의 아버지는 아들만도 20여 명이 넘었는데, 장양왕은 진시황이 된 아들 정 외에는 자손이 없습니다. 여러 정황으로 심증은 가지만 진시황의 아버지는 영원한 수수께끼입니다.

여불위는 거금을 들여 이인을 조나라에서 탈출시키고 왕이 되도록 돕습니다. 그리고 조나라에 남은 조희와 그 아들을 끝까지 숨겨주고 보살피지요. 진나라에 도착한 이인은 여불위의 자금과 책략으로 태자가 되자 조희와 아들을 진나라로 불러들입니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하지요? 왕족이나 명문가의 교육을 받지 못한 조희가 갑자기 사임당처럼 살 수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떠돌이 구박데기 이인은 왕이 되자 약속대로 여불위와 권력을 나눕니다. 여불위는 거상에서 일국의 승상이 됩니다.

왕위에 오른 장양왕은 겨우 3년 만에 죽어버리고 맙니다. 아직 젊은 나이에 장양왕이 요절하자 당연히 호사가들은 조희의 욕정 때문이라고 나불댔지요.

13살 어린 나이에 아들 정이 왕위에 오르자, 태후가 된 조희와 승상보다 더 높은 상방의 자리에 오른 여불위가 섭정을 합니다. 나중에는 아버지에 버금간다고 하여 (왕의) 중부(仲父)라고 불리기도 했답니다.

어찌 보면 조희에겐 여불위만 한 남자가 없었을 것입니다. 말이 왕자이지 할아버지나 아버지의 사랑도 없이 적국에 팽개쳐진 이인은 다양한 경험을 가진 조희 눈에 찰 리가 없는 바보 멍텅구리였겠지요.

반면에 여불위는 위나라 출신 혹은 한나라 출신으로 언급될 정도로 각국에 대한 정보나 견문, 그리고 역사 인문학에 대한 소양도 엄청나서 여씨춘추라는 백과사전에 버금갈 역사서를 편찬합니다.

장양왕이 죽자, 조희는 수시로 여불위를 침상으로 불러들입니다. 진시황이 점점 장성하자 위기감을 느낀 여불위는 은밀하게 남자를 구합니다. 당시 남근으로 수레바퀴를 돌린다는 노애라는 젊은이를 불러들이고, 노애의 소문이 조희의 귀에 들어가게 합니다. 혹한 조희에게 노애를 환관으로 위장하여 조희 곁에 두게 합니다.

조희는 임신하자 성 밖으로 거처를 옮깁니다. 노애와의 사이에서 두 아들을 낳자, 간이 배 밖으로 나오지요. 왕을 죽이고 자기들 아들에게 왕위를 넘기자고 모의합니다. 사전에 밀고로 수사가 진행되자 노애는 가신들을 동원해 난을 일으키지만 제압당합니다. 노애는 거열형으로 죽이고, 노애의 두 아들과 3족도 모조리 처형합니다. 조희는 유폐되어 역사에서 사라지지요.

조희와 노애 사이의 관계가 밝혀지면서 중국 천하를 호령하며 한때 왕의 중부로 불리던 여불위도 자살로 생을 마감합니다.

머지않아 조희의 피붙이 진시황은 순행 중에 객사하고, 손주인 2세 호해는 환관 조고에 의해 죽임을 당하며, 다른 핏줄들은 모조리 초 패왕 항우에게 죽임을 당하고 진나라 왕조는 멸망하고 맙니다. 이것이 역사이고 폭군과 탕녀의 종말입니다.

편집 : 김동호 편집위원

김동호 편집위원  donghokim78@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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