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만의 사회 경제 시스템을 넘어

                                                      (레닌의 러시아 혁명  사진출처: 나무위키)
                                                      (레닌의 러시아 혁명  사진출처: 나무위키)

”차갑게 죽어가는 아이를 보고 우리는 통곡했다. 사랑하는 아이가 죽은 것은 우리가 궁핍했던 시기였다. 죽은 아이의 관을 사기 위해 부근에 사는 지인에게 2파운드를 빌려 관을 살수 있었다. 2년 후 장남 에드가르가 10년을 못 살고 죽었다, 가난이 극심해 관을 사기 위해 옷을 팔았다.“ 마르크스 부인 예니가 남긴 글이다.

마르크스 가족은 빚쟁이들에 시달리면서 약방, 빵 가게, 식료품점에 갚을 돈이 하나 없어 힘겹게 살았다. 1850년대 런던의 빈민굴에 결핵이 창궐했다. 수천 명의 아이들이 죽어갔다. 마르크스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어린 차남(기도)은 생후 1년 만에 죽었고 3녀(프란치스카)도 1년 남짓 밖에 살지 못했다.(마르크스의 사랑/피에르 뒤랑/ 두레)

마르크스는 극심한 생활고 속에서 5년 사이에 세 자식을 잃었다. 그러는 속에도 루이 보나파르트 부르메르 18일, 자본론 등 열정적으로 저술활동에 몰두했다. 이 무렵 뉴욕 트리뷴지에 10여 년간 기고도 했다.

마르크스는 본인의 삶이 곤궁했다. 인간해방을 위한 정치 경제, 철학, 종교, 역사의 이론가, 혁명가였다. 유대교에서 개종한 자유주의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나, 프로이센의 유복한 귀족 가문과 혼인하였으나 반인간적인 사회 질서의 인간화, 그 모순의 원인과 처방, 실천을 위해 혁명적 삶을 살았다.그가 처방한 인간 해방철학은 21세기 인류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 인류를 구원할 복음처럼 보인 때도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철학에 심취하고 신봉하고 실천하다 죽었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고 천부적 인권을 타고났다

그러나 인류 역사는 약육강식의 역사이다

모든 인간은 사람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사회적 존재이다. 그리고 인간은 자유, 평등, 존엄을 천부적으로 타고난 것이다. 인간의 본성은 자유 자체로부터 연유한다.(노암 촘스키 /미래의 정부를 말하다).

속박과 불평등, 인간 존엄이 침해되면 고통스럽고, 이에 저항을 하게 된다. 또한 인간은 죽을 때까지 사람 관계 속에서 먹고 살아가는 현실적인 존재이다. 하루도 먹고사는 문제와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먹고사는 현실적인 문제를 기본적 전제로 하지 않으면서 인간의 존엄, 자유와 평등, 행복을 말할 수는 없다.

인간의 본성은 선과 악 양면적, 혼합적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선, 악의 발현은 처해진 사회경제적 환경, 상황에 따라 다를 것이다. 보편적으로 인간은 이성적, 합리적 판단과 필요에 따라 행동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제도와 사상, 이념은 인간성의 보편성과 부합하여야 설득력이 있고 공감되고 정착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류 역사는 약육강식의 역사라 할 수 있다. 힘과 능력이 없고, 능력과 힘을 물려받지 못하고 힘을 키우지 못한 환경 속에서 약자의 세상은 강자에 지배당하고 잡아먹히는 야수의 세상과 별반 차이가 없다.

자기들만의 자유와 평등

여전한 약육강식의 세상

18세기 말 중세 봉건왕조와 교회권력이 지배하던 세상에서 돈의 위력이 발휘되면서 유산자들이 만인 평등, 천부 인권을 주장하는 새 세상을 열게 된다. 이것이 프랑스혁명, 인권선언이고 미국독립선언이다.

자유와 평등, 박애, 안전, 행복을 시민의 권리라 주장하면서 교회권력과 결탁된 봉건왕조를 붕괴시키면서 시민사회가 시작된 것이다. 모든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며 행복하여야 하고, 시민은 스스로 정부를 선택할 수 있다는 선언이 현대 민주공화정의 始原이다.

그러나 이 위대한 시민혁명, 신흥 부자 주도 민주주의는 부분적, 제한적 민주주의 밖에 될 수 없었다. 프랑스 혁명 당시 신흥 부자들과 파리의 배고픈 하층 시민들이 연합하여 봉건왕조를 타도하였으나 돈 없는 시민들은 천부 인권을 누릴 수 없었다. 독립전쟁을 통해 건국한 미국의 민주공화정 역시 흑인 노예와 원주민, 여성은 배제한 부분적 민주주의였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고 행복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미국 건국의 지도자들은 노예를 거느리고 있었다.

​프랑스 혁명 당시 바스티유 감옥 점령에 선봉에 섰던 급진주의자 바베프(gracchus babeuf)의 어린 딸은 혁명 당시 굶어죽었다, 파리의 많은 시민들은 빵이 없어 기아에 허덕였다.

이로부터 반세기가 훨씬 지난 후에도 인간의 존엄, 자유 평등, 행복은 일부 계층이 향유하고, 산업화가 고도화되면서 시민의 먹고사는 생존의 문제, 빈곤, 불평등의 문제는 점점 심화되어 사회적 모순을 극대화했다. 자유와 민주주의를 강조했지만 인간의 먹고사는 생존권은 만인의 권리가 되지 못했다.

자본주의 참상에 대한 도덕적 분노는 ,”예수의 이웃 사랑 실천“, ”모든 인간은 형제다“ 주장을 제기하고 인간 존엄, 자유평등의 세상의 실현을 강변하기에 이른다.(바이틀링(weitling), 생시몽, 오웬, 푸리에, 등) 여기서 더 나가 제한적인 민주주의가 아닌, 모든 인간의 존엄, 행복, 자유, 평등의 완전한 민주주의 세상을 주장하고 인간해방을 위한 철학, 복음이라 선언한 것이 1848년 communist manifesto이다. 자본주의가 고도화되면서 내적 모순으로 자본주의는 소멸될 것이라는 예언과 달리 유럽 자본주의 후진국, 러시아에서 레닌의 지도로 볼셰비키 혁명이 성공한다.

열린 사회의 적, 죽은 개가 된 인간 해방철학

그러나 무산계급의 정권이 수립된 지 100년도 못되어 1991년 12월 낫과 망치, 오각별의 소련 국기는 내려졌고, 백, 청, 적의 러시아 삼색기가 게양됐다. 극심한 생활고, 실업 공포, 무한 경쟁, 극한적 불평등의 반인간적 경제질서를 인간 존엄, 자유평등의 사람의 얼굴을 한 정치 경제를 추구하던 마르크스의 인간해방철학은 패퇴했다.

소비에트 공산당은 역사에서 사라졌다, 마르크시즘은 열린 사회의 적, 죽은 개로 취급되면서 자본주의가 공산주의와 이데올로기 대결에서 승리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소련과 동구권이 붕괴하면서 이념대결의 냉전시대도 끝났다. 마르크시즘은 대안이 아닌 것으로, 실패한 이념으로 선언된 듯 했다.

존 에프 케네디의 농담

JOHN. F. 케네디는 1961년 미국 신문 발행인들 앞에서 이런 농담을 했다

“ 1851년에 뉴욕 데일리 트리뷴이 칼 마르크스라는 저널리스트를 고용했다. 런던특파원으로 고용했는데 마르크스가 회당 원고료를 5달러를 받았는데 더 올려달라고 줄기차게 졸랐다는데 그때 그 요구를 받아주지 않자 다른 생계수단을 찾아 나서 뉴욕 트리뷴과의 관계가 청산되었다. 만일의 뉴욕의 자본주의 신문이 마르크스에게 원고료를 올려주고 계속 특파원으로 활동하게 했더라면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런던 특파원/ 칼 마르크스 /부글 books )

케네디의 말은 농담적으로 한 것이지만, 성경 이상으로 영향력을 발휘하던 20세기 대 사상가를 폄하, 모욕하는 것으로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이념이란 절대적일 수 없다. 그의 주장 중에 오류가 입증되고 시대착오적인 것도 있고 여전히 옳은 내용도 많다.

무산계급의 해방, 인간 존엄의 철학, 실천하는 위대한 대 사상가였지만 그가 경제적으로 곤궁하지 않고 여유가 있었다면 그의 저작도 달라졌을 수 있었을 것이란 생각도 하게 된다.

마르크스주의를 기반으로 한 소련, 동구 공산주의가 실패한 주된 이유로는 경직된 관료주의 사회였다는 데서 찾는다. 물론 자본주의에 포위되어 무한 전쟁을 하여야 하는 상황에서 이념 실천에 한계도 있을 수 있었으나, 중앙통제의 비효율성, 복지 만능. 자유의 억압, 경쟁과 창의의 상실, 등이 자본주의와 경쟁에서 패배한 이유가 될 것이다. 자유, 경쟁, 협동이란 인간의 본성과 제도가 어긋나서는 정착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부르주아 시민혁명이 내세우는 자유와 평등, 행복이란 것이 유산자들의 사적소유의 자유와 불가분의 관계이기에 계급갈등의 원천이 될 수 밖에 없으나, 이러한 사적소유의 추구는 인간본성적 영역이라 간과할 수 없는 내용이기도 하다. 또한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국가의 일반 노동자들이 가난에서 벗어나 사치품의 소비자가 될 수 있을 것이란 예견을 못했다.(the socialist manifesto/ 바스카 선카라)

민주주의 없는 사회주의는 존재할 수 없고 이룩할 가치도 없다하던 수정주의자 베른스타인 이나 키우츠키의 주장이 지금에서 봐서는 결과론적으로 옳지 않았나 싶다.

소비에트 공산정권은 자유와 민주가 통제된 경직된 전체주의 사회였다.(노암 촘스키/ 미래의 정부를 말하다)

인간의 얼굴을 한 경제사회질서를 위하여

2014년에도 서울 송파구에서 생활고로 고생하다가 번개탄을 피워놓고 동반자살한 세 모녀 사건이 있었다. 이들은 마지막 집세와 공과금 70만 원,그리고 죄송하다는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2022년도에도 이와 유사한 비극적 사례가 있었고 생활고로 극단선택하는 사례는 최근에도 자주 발생하고 있는 일이다.

실업자, 비정규직, 무주택자가, 빈곤층이 천지인데, 1인분에 20만 원이 넘는 점심 식사 예약이 동이 난다. 평당 억이 넘는 아파트에 사는 슈퍼리치도 많다. 불평등의 도가 지나치다. 극심한 불평등, 무한 경쟁, 실업 공포, 빈곤, 부채 과다, 희망 없는 세상. 절망의 사회이다. 그러니 출산율은 최저, 자살률이 세계 최고이고, OECD 최저의 행복지수에 최고의 불평등지수를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은 선진국이 되었다. 10대 경제대국, 군사, 문화 강국이 되었다. 그런데 여전히 비인간적 시스템이 갖는 사회적 문제가 공존한다.

국제연합 총회에서 제정된 세계인권선언의 전문 “인류가족 모두의 존엄성과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인정하는 것이 세계의 자유, 정의, 평화의 기초이다”, 세계인권선언 1조 “모든 인간은 태어날때부터 자유롭고 존엄하며 평등하다. 모든 사람은 이성과 양심을 가지고 있으므로 서로에게 형제애의 정신으로 대해야 한다“

선언에만 그치고 규정으로 존재하는 것은 종이일뿐이다.사실상 쓰레기이다.

승리하였다는 자유, 시장경제는 여전히 다수의 인간에게 삶의 고통을 주고 있다. 그렇다면 자유방임적 자본주의 시스템은 여전히 큰 문제가 있는 것이고 자유, 민주, 인간 존엄의 시스템으로 극복되어야 한다. 냉전체제가 종식되었다. 이념대결의 세상은 끝이 났다. 지금은 자유, 자유하는 이념을 논하는 시대가 아니다. 이념논쟁은 그 실체도 없고 황당한 얘기이다.

한때 신자유주의 열풍이 불었지만 금융위기 이후 세계의 정치 경제 사조는 경제사회적 평등, 국가의 적절한 시장개입, 적극재정 등을 자연스레 요구하고 있다. 통제 없는 극단적 자유경쟁 체제가 갖는 폐단을 대체하여 사람의 얼굴을 한 사회경제 시스템이 요구되고 있고, 더블어 같이 사는 사회는 국가의 조세정책, 최저 생계보장, 기본소득, 공공정책을 통해 충분히 실현 가능하다

복지. 분배정책을 통한 구매력 제고는 경제를 선순환시킬 수 있다, 이는 전 세계 보편적 추세이고 민주복지국가의 방향이다. 이것이 유엔인권선언과 헌법이 보장, 규정하고 있고, 인간 존엄을 실현하는 길이고 민주주의가 지향하는 가치이다. 모든 문제는 인간의 먹고사는 문제에서 시작되고, 인간 사회의 갈등은 먹고사는 문제의 해결에서 치유될 수 있다.

심각한 경제적 불평등, 병든 자본주의는 부패, 차별, 학살, 전쟁범죄, 인권탄압의 근원이다. 우리가 살고, 후손들이 살아가려면 병든 지구를 치유해야 하고 구해야 한다. 바로잡고 시정해야 한다. 행동해야 하고 연대해야 한다. ( 바스카 선카라 전게서)

”인권은 자연의 선물이 아니며 세대를 걸쳐 역사가 지금까지 남겨둔 특권에 대한 투쟁을 통해 획득한 대가이다. 인권은 그것을 스스로 획득하고 누릴 자격을 갖춘 자만이 소유할 수 있다.- 칼 마르크스/유대인문제에 관하여.끝.

 

편집 : 심창식 편집장

김영수 주주  peak0415@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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