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들 청산되지 못한 역사는 되풀이된다고 한다. 1920년 봉오동, 청산리 전투에서 참패한 일본군은 바로 그 해 말 남북 만주 일대를 쓸어버렸다. 이른바 역사 교과서에 나오는 경신참변이다. 만주 일대 조선인들을 닥치는 대로 죽이고 마을 전체를 불사르는 만행을 저질렀다. 조정래의 대하소설 『아리랑』에는 그 참혹한 장면이 세밀히 기술돼 나온다. 조선인 마을 소학교 교사를 잡아다가 피부 껍질을 벗겨서 죽인다.

봉오동 전투 100주년을 한 해 앞두고 개봉된 영화 『봉오동 전투』(2019)에도 그러한 대사와 처참한 광경이 나온다. 만주 일대에 옹기종기 모여 살던 한인촌 마을을 처참하게 파괴하고 불태운다. 봉오동-청산리 전쟁에서 참패한 것에 대한 보복 차원이라지만 실상은 일본군의 일상 속 모습이다. 방화와 살육 그리고 약탈과 강간은 일본군이 저지른 만행이자 그들이 남긴 흔적이다. 독립군이 독립군으로 존속하는 데 주요한 물적 토대가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남북 만주 일대나 러시아령 연해주 일대 항일독립군의 존재는 한인촌이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했다. 독립군 한 명을 먹이고 뒷바라지하려면 조선인 마을 10세대가 뒷받침해야 했다. 1920년대 전반부 수백 회에 걸쳐 치열하게 일본군과 교전을 벌였던 정의부 역시 조선인 마을에서 꼬박꼬박 세금을 거둬갔다. 다시 말해 한인촌 조선인 풀꽃 민중들이 독립군을 먹여 살렸고 전투를 지원했다. 역사가 왜 이름도 명예도 남기지 못한 풀꽃 민중들의 서사인지 우리가 주목하는 이유이다.

제주 4.3 학살, 여순 학살, 보도연맹 학살 등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은 반공파시즘으로 덧칠된 이승만 정권이 자행한 국가폭력이다(출처 : 구자환 감독이 10년에 걸쳐 2015년에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레드 툼>포스터)
제주 4.3 학살, 여순 학살, 보도연맹 학살 등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은 반공파시즘으로 덧칠된 이승만 정권이 자행한 국가폭력이다(출처 : 구자환 감독이 10년에 걸쳐 2015년에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레드 툼>포스터)

해방 후 일본군, 만주군 장교로 복무했던 친일 군인들이 제주 4.3 학살, 6,25 전쟁 당시 거창, 산청, 함양, 함평, 구례 등 지리산 일대 마을을 초토화하면서 민간인 학살로 재연되었다. 그 당시 학살 지휘관들은 솜방망이 처벌로 처벌 흉내만 받았지 다시 지배권력으로 복귀했다. 이승만 정권에서 경찰 고위 간부로, 행정 관료로 승승장구했다.

마포구 성산동 <전쟁과 여성 인권 박물관> 지하 공간에 전시되었던 베트남 전쟁 민간인 학살 전시물(출처 : 하성환)
마포구 성산동 <전쟁과 여성 인권 박물관> 지하 공간에 전시되었던 베트남 전쟁 민간인 학살 전시물(출처 : 하성환)

이들의 정신적 후손들이 베트남 전쟁 때 퐁니 퐁넛 마을 학살을 주도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전두환은 베트남 참전 군인이다. 그리고 그 잔혹함은 1980년 광주 학살로 이어졌다. 전두환 공수부대 병사들이 광주시민을 베트콩으로 간주한 것이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야 할 군대가 역사상 참혹하기 이를 데 없는 잔인한 학살을 자국민을 향해 자행했다. 그들이 단 한 번만이라도 처벌을 받고 단죄를 받았다면 그 불행한 역사는 되풀이되지 않았을 것이다.

<전쟁과 여성 인권 박물관> 건물 내에 내건 <일본군 위안부> 관련 펼침막(출처 : 하성환)
<전쟁과 여성 인권 박물관> 건물 내에 내건 <일본군 위안부> 관련 펼침막(출처 : 하성환)

우리 대한민국 시민들이 32년째 수요시위를 하고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 정부의 사과와 전범자 처벌, 그리고 역사 교과서 기술을 요구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그래서 단재 신채호 선생은 일찍이 ‘역사를 망각한 민족은 망한다’고 일침을 놓았다.

역사를 망각하는 것보다 역사를 왜곡하는 것이 더 나쁘다. 그런 의미에서 박근혜 정권 시절 한국사 교과서 국정제 시도는 역사를 왜곡하는 범죄 행위였다. 1970년대 유신 시절 국정교과서로 공부했던 오늘날 60-70대 노년들 세대의 모습이 그 점을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서대문형무소 역사박물관> 내에 전시된 70년대 유신시절 장발 단속 사진(출처 : 하성환)
<서대문형무소 역사박물관> 내에 전시된 70년대 유신시절 장발 단속 사진(출처 : 하성환)

오늘날 60-70대는 국민의 힘과 윤석열에 대해 가장 높은 지지율을 보이는 세대이자 총선 투표율 또한 어느 세대보다 높다. 파시즘 교육과 파시즘 노예도덕에 흠뻑 젖은 세대가 60-70대 세대이다.

<서대문형무소 역사박물관> 내에 전시된 70년대 유신시절 미니스커트 단속 장면(출처 : 하성환)
<서대문형무소 역사박물관> 내에 전시된 70년대 유신시절 미니스커트 단속 장면(출처 : 하성환)

맹목적인 도덕성과 이중성, 그리고 권위주의와 굴종적인 자아가 뼛속 깊이 몸에 밴 세대이다. 산업화를 일군 세대이지만 거꾸로 파시즘 교육에 희생된 불행한 세대이다.

국어 시간 최초의 신소설로 이인직의 『혈의 누』(1906)를 열심히 외었던 세대가 60-70대 세대이기 때문이다. 그들 세대는 당연히 이인직을 훌륭한 작가이자 역사 속 인물로 기억하고 오늘날도 그렇게 알고 살아간다. 그러나 『혈의 누』가 무엇인가? 『피 눈물』도 아닌 일본식 말법으로 제목을 달고 쓴 소설이라니 소설 제목부터 일본 제국주의 냄새가 짙다.

『혈의 누』 작품 자체가 청일전쟁 당시 평양성 전투를 배경으로 한다. 주인공 옥련의 가족이 생이별당하고 괴한에게 겁탈당하려던 옥련의 어머니를 일본군이 구해준다는 매우 비상식적인 억지 구도의 소설이다. 더구나 주인공 옥련 역시 청일전쟁 와중에 총상을 입고 일본군에 의해 구조된다는 내용이다.

소설 속 옥련을 비롯한 주요 인물들은 조선이라는 낡은 현실을 버리고 일본과 미국 등 문명 세계를 지향한다. 근대화된 문명국가에서 신학문을 배우고 부패하고 무능한 조선 봉건 사회의 개화를 열망한다. 그러나 소설은 거기까지이다.

이인직은 소설을 통해 청일전쟁이 내포한 국제전의 성격, 즉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패권 욕망을 드러내기보다 조선 봉건 사회지배층의 부패와 무능만을 비판했다. 조선 사회의 현실을 관망할 뿐, 동학농민군처럼 부패하고 무능한 조선의 지배층에 저항하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농민군(의병)을 비난하는 반민중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원각사에서 최초로 공연한 『은세계』(1908)가 바로 그런 부류의 작품이다.

결국 『혈의 누』 작품 속 주인공들은 자신과 조선 사회에 대한 성찰도 없이 오로지 문명국가 일본과 미국을 여행(유학)하면서 그들의 가치를 선망한다. 그리고 어떠한 치유책이나 문제해결 방법을 제시하지 못한다. 작품 전체에 청나라는 조선 백성을 괴롭히는 나쁜 나라이고 일본은 우리를 도우려는 우방국이자 ‘문명국가’라는 인식을 심어주려는 정치적 의도가 짙게 깔린 친일 소설이다.

이인직은 종교 색깔까지 친일의 흔적이 짙다. 왜냐하면 이인직은 일본 신도(神道)의 일파인 천리교 신자였다. 재혼한 일본인 처도 천리교 신자였다. 천리교는 19c 말 메이지 시대 당시 신도 수가 300만 명에 이르렀고 오늘날 일본 전국에 15,000개가 넘는 교회를 갖고 있다.

지금도 일제가 가장 먼저 점령했던 부산에 가면 천리교가 존재한다. 천리교가 일본 제국주의 정책에 영합하면서 식민세력 팽창에 일조했던 과거사를 통해서 볼 때 이인직의 삶 자체가 뼛속까지 친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이인직이 이완용의 충직한 비서가 되어 나라를 가장 먼저 팔아먹기 위해 교섭 경쟁을 벌인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민족정론지라고 보기 어렵다.(출처 : 이승경 한겨레 신문 기자 2005년 12월 1일)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민족정론지라고 보기 어렵다.(출처 : 이승경 한겨레 신문 기자 2005년 12월 1일)

일진회 주구 송병준은 하세가와 등 일본 군부에 착 달라붙어 온갖 교태를 부렸다. 송병준은 ‘일한 합방’을 촉구하며 일본에 합방 청원서까지 보냈던 단무지 대중 선동가였다. <왜 문명화된 근대국가 일본이 미개한 조선을 통치하지 않느냐>면서 일제 수상에게 1억 5천만 엔이라는 구체적인 액수까지 제시하며 일제와 흥정했던 놈이다. 기생의 아들로 태어나 조선일보를 경영하며 일제에 기생했던 송병준! 그는 늙어서도 기생의 화대를 갈취하며 노년을 보냈던 인물이다.

송병준의 아들 송종헌 둘 다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돼 있을 정도이니 악질 친일 집안임이 틀림없다. 이완용, 송병준! 이 두 놈은 서로 나라 팔아먹는 데에 경쟁했던 적수였다. 일제가 조선을 먹는 데에 든 최종 액수가 3,000만 엔 정도였다고 하니 그들 간 나라 팔아먹기 경쟁이 얼마나 치열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며느리를 겁탈했던 패륜아 이완용은 자신의 비서 이인직을 시켜 조선 통감부에 몰래 보냈다. 밤 11시 야심한 시각에 망국 협상을 진행하기 위해서였다. 그 협상은 새벽 1시에 끝났다. 이인직이 매국 협상에서 몰래 만난 인물이 조선 통감부 외사국장 고마쓰였다.

고마쓰는 프린스턴대 법학박사 출신으로 이인직이 일본 동경 정치학교 유학 시절 자신의 스승이었다. 결국 나라 팔아먹기 경쟁에서 승리한 이완용은 백작에 오르고 송병준은 한 등급 낮은 자작이 된다. 일제 강점기 35년 동안 딱 3명만 귀족의 작위가 올라가는데 이완용과 송병준이 그에 속한다.

1909년 10월 26일 만주 하얼빈역에서 안중근 의사가 동양 평화를 해치는 제국주의 첨병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는 장쾌한 역사를 썼다. 그런데 이인직은 10여 일 뒤 서울에서 열린 이토 히로부미 추도회에서 「대한신문사」 사장의 자격으로 추도문을 낭독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뿐만 아니라 안중근 의사를 ‘악한’이라고 비난하였고 전국을 순회하면서 일제의 식민 지배를 찬양하는 강연을 자행했다. 특히 1915년 함경남도 시찰 당시 강연에서는 ‘조선인이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조선인의 골수가 ‘대화혼’(大和魂)에 동화되어야 한다‘고 열변을 토했다. 기가 찰 노릇이지만 엄연한 역사 사실이다.

이인직은 평생 반민족적인 길을 걸었던 인물이다. 그런 이인직의 친일 소설 『혈의 누』를, 대학 입시 앞두고 최초의 신소설로 열심히 외었던 기억이 또렷하다. 수십 년간 국가폭력이 일상에서 자행되던 시절이었으니 교육 또한 온전하지 못한 탓이리라!

편집 : 하성환 편집위원, 심창식 편집장

하성환 편집위원  ethics6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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