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뀌꽃밭의 해오라기[蓼花白鷺]>라는 제목의 오언고시가 있습니다. 고려 중기 문인 이규보(李奎報, 1169~1241) 선생의 작품으로 동문선(東文選)4권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8구로 되어 있어 얼핏 오언율시로 보이기도 하지만 율시의 엄격한 규칙을 벗어난 자유로운 형식인 데다 동문선에도 오언고시로 분류되어 있습니다. 네 구절씩 끊어서 봅니다.

앞 여울에 물고기 새우 많으니 / 前灘富魚蝦(전탄부어하)
백로가 물결 뚫고 들어가려다가 / 有意劈波入(유의벽파입)
인기척 발견하고 문득 놀라 일어나 / 見人忽驚起(견인홀경기)
여뀌꽃 핀 언덕으로 도로 날아 앉았네 / 蓼岸還飛集(료안환비집)

여울물 속에 우뚝 선 채 먹이를 노리는 백로. 꿈틀거리며 앞뒤로 흔드는 머리. 부드러운 목선이 리듬을 타는 듯합니다. 물고기 움직임을 포착하고 예측한 지점으로 날카롭게 부리를 꽂아 넣으려는 순간, 아차차. 먹이에 집중하느라 옆에 사람들 와 있는 것도 몰랐구나.

이런 젠장. 할 수 없지. 사냥은 잠시 후에 하도록 하자. 푸드득 솟아올라 너울너울 건너편 물가에 닿는데, 거기에는 여뀌꽃이 한창입니다. 여기서 좀 쉬다가 저 인간들이 가거든 다시 사냥해야겠군.

고개 들고 사람들 가기만 기다리는데 / 翹頸待人歸(교경대인귀)
보슬비에 온 몸의 털 다 젖어드는구나 / 細雨毛衣濕(세우모의습)
마음은 여전히 여울 속 물고기에 있건만 / 心猶在灘魚(심유재탄어)
무심히 서 있다고 사람들은 말한다네 / 人噵忘機立(인도망기립)

사진 출처 : 필자
사진 출처 : 필자

백로는 고개를 꼿꼿이 세운 채 곁눈질로 사람이 떠나는지 살피고 있는데 어럽쇼, 비까지 부슬부슬 내립니다. ‘아아, 이것 참, 점점 축축해지네. 빗방울 튀면 물고기도 잘 안 보일 텐데. 그나저나 배도 슬슬 고파 오는데 저 인간들은 왜 아직도 안 가고 있는 거야?’

우중 산책을 나왔는지 그냥 지나는 길인지 서너 명의 사내들은 여울 이쪽에 모여서 대화가 한창입니다. , 참 좋다. 비가 오니 더 운치가 있네. 거기에 저 백로까지 있으니 완전 한 폭의 그림이로군. 어쩌면 저렇게 미동도 안 하는 거야. 역시 하얀 색깔만큼이나 고고한 자세로군.

보이는 것과 실상은 이렇게 다르군요. 우리는 대부분 자기중심적으로 세상을 봅니다. 많은 사람들이 위의 광경을 놓고 한 폭의 그림이니 풍경이니 하며 감탄하고 있을 때 천 년 전의 시인은 그 실상을 꿰뚫어보고 우리에게 삶의 진실, 고고해 보이는 백로도 먹이를 먹어야 생존한다는 현실의 엄숙함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습니다.

니들이 게 맛을 알아, 아니 물고기 맛을 알아? 잡았다 싶다가 놓쳤을 때의 그 난감함과 열패감을 아느냐고? 눈물 젖은 빵, 비에 젖은 새우를 삼켜 보기나 했어?” 우리네 보통 사람들처럼, 현실을 살아가려 애쓰는 백로의 심정을 곁눈질로 헤아려 보며 어려운 한자 몇 개 풀어 드립니다.

*여뀌 료 *여울 탄 *새우 하 *쪼갤 벽 *우뚝할 교
*목 경 *이를 도

 

※ 《동문선(東文選)은 삼국시대부터 조선 전기까지 지어진 우수 작품을 모은 선집이며, 이미 번역되어 한국고전종합DB에 올라 있는 우리의 귀한 문화유산입니다. 귀한 내 것을 내 것인 줄 모르고 쓰지 않으면 남의 것이 됩니다. 이 코너는 동문선에 실린 작품을 소개하는 자리입니다. 잊을 뻔했던 내 것을 되찾는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편집자 주] 조경구(趙慶九) : 국문학을 전공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에서 한문전적 정리 번역 등의 일을 했으며, 한문 고전의 대중화에 관심을 갖고 <한문에게 말걸기, 다락원, 2005.>, <1등 했는데 왜 훌륭한 사람이 아니에요, 풀빛, 2015.>, <아하, 자연에서 찾은 비밀, 한국고전번역원, 2016.>, <우리가 만난 신비한 소녀, 정인출판사, 2018.> 등의 책을 썼다.


편집 : 양성숙 편집위원,  심창식 편집장

조경구 서포터즈 벗  op9ch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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