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이 꽃축제로 화려합니다. 국화를 비롯하여 해바라기, 천일홍, 코스모스, 핑크뮬리, 억새꽃 등등. 봄에만 꽃이 피는 게 아니라는 당연한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는 계절입니다. 동문선(東文選)속집 4권에는 서거정(徐居正) 선생의 <1016, 국화가 만개하고 밝은 달이 정히 아름답기에 혼자 술 마시며 회포를 쓰다[十月旣望, 黃花滿開, 明月政佳, 獨酌有懷.]>라는 다소 긴 제목의 칠언고시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아니 동문선은 서거정 등이 편찬한 책이라며? 거기에 자신의 글을 뽑아 넣었단 말이야? 암만 자기 글이 자신 있어도 그렇지 너무 뻔뻔한 거 아냐?

그러나 이 시는 서거정 자신이 뽑은 게 아니라 선생이 세상을 떠난 지 30년 후에 후세 사람들에 의해 편찬된 속집에 수록된 것이니 의혹과 노여움은 거두시기 바랍니다. 칠언 고시라 다소 길기에 몇 토막으로 나누어 봅니다.

달빛은 늘 중추절 다가오면 아름답고 / 月色每向中秋奇(월색매향중추기)
국화는 절로 중양절과 잘 어울리거늘 / 黃花自與重陽宜(황화자여중양의)
금년 중추절엔 하필이면 비가 내렸고 / 今年中秋値雨來(금년중추치우래)
금년 중양절엔 국화꽃 아직 피지 않아 / 今年重陽花未開(금년중양화미개)
중추절 중양절을 이미 모두 저버렸으니 / 旣負中秋又重陽(기부중추우중양)
내 회포 울적하여 그저 슬퍼만 했다네 / 我懷鬱鬱徒悲傷(아회울울도비상)

중추절(中秋節)815, 중양절(重陽節)99. 물론 모두 음력입니다. 중추절은 다들 잘 아시는 큰 명절. 우리는 올해 유난히 뜨거웠던 중추절을 보낸 바 있습니다. 중양절은 양수(陽數 홀수) 중 가장 큰 수인 9가 겹친 날로, 예전에는 큰 명절의 하나로 쳤다는군요. 중양절에는 귀신을 쫓는 붉은 산수유 열매를 머리에 꽂고 산에 올라가 시를 지으며 하루를 즐기는 등고(登高)’라는 풍습이 있었답니다. 또 이날은 국화를 감상하거나 국화잎을 따다 술을 담가 먹었다고도 하죠.

사진 출처 : 필자
사진 출처 : 필자

중추절은 보름이니 환한 달구경이 제격이요, 중양절은 국화꽃 구경이 제격인데 올해는 공교롭게도 하필 중추절에는 비가 오고 중양절에는 국화가 아직 피지 않아 두 가지 놀이가 다 불발로 끝난 채 한 해를 보내게 되었습니다. 아쉬운 정도가 아니라 아예 슬펐다는군요. 변변한 즐길 거리가 없던 시절이니 그럴 만도 하겠습니다.

오늘 저녁은 웬 저녁인고 10월 중에 / 今夕何夕十月中(금석하석시월중)
국화꽃 피고 밝은 달도 함께 떠올랐네 / 黃花自與明月同(황화자여명월동)
달 대하여 술잔 들고 국화꽃까지 띄우니 / 對月擧杯泛黃花(대월거배범황화)
인생의 이 즐거움 어떠한 줄 알 것이라 / 人生此樂知如何(인생차락지여하)

은 뜰 입니다. 술잔에 노란 국화 꽃잎을 띄운 모양입니다. 의 제목이 10월 기망(旣望)이었죠? 기망은 16일을 뜻합니다. 15일이 보름이니 16일에도 달빛은 여전히 환할 테고, 뒤늦게 국화까지 만개하니 달구경과 꽃구경을 겸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거기에 술상까지 한상 떡 차려 놓고 앉으니 그야말로 환상적인 밤, 달과 국화와 술이 있는 자랑스러운 밤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여보게, 이리 와서 이걸 보시게나.’ 시인은 가상의 독자를 부릅니다.

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 君不見(군불견)
이백이 달을 대했을 땐 이 국화가 없었고 / 李白對月無此菊(이백대월무차국)
도잠이 국화를 대했을 땐 달을 못 보았지 / 陶潛對菊月不得(도잠대국월부득)
고금의 현인달사도 오히려 겸하지 못했거늘 / 古今賢達尙不足(고금현달상부족)
나는 어떤 사람이기에 둘 다 누린단 말인가 / 我何爲者兼所欲(아하위자겸소욕)

이백(李白)은 중국 당나라 때의 시인으로 술과 관련된 일화가 차고 넘칩니다. 오죽하면 <술 권하는 노래[將進酒]>까지 지었을 정도니까요. 또 이백의 시에는 달도 많이 나옵니다. 심지어 술에 취한 채 강물에 비친 달을 잡으려 뛰어들었다가 익사한 뒤 하늘로 올라가 신선이 되었다는 이야기까지 전해집니다. 국화꽃을 시에서 전혀 다루지 않은 것은 아니겠지만 이백 하면 우선 떠오르는 이미지는 달과 술입니다.

지상에 내려온 달, 사진 출처 : 필자
지상에 내려온 달, 사진 출처 : 필자

도잠(陶潛) 즉 도연명(陶淵明)에게는 이백과 달리 국화를 다룬 작품이 많습니다. 도연명의 <음주(飮酒)> 시에 나오는 동쪽 울타리 아래에서 국화꽃 따다가 유연히 남산을 바라보노라[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는 세상에 너무나 잘 알려진 명구입니다. 녹봉에 얽매여 사는 게 싫으니 고향으로 돌아가자고 외쳤던 <귀거래사(歸去來辭)>에서도 고향집에 도착하자 맨 먼저 그를 반기는 것이 마당의 소나무와 국화입니다. 그러므로 도연명 하면 우선 떠오르는 이미지는 술과 국화입니다.

술과 국화와 달이 있는 가을밤의 한없는 풍류. 이백은 달과 술, 도연명은 국화와 술 두 가지씩만 가졌지? 보아라, 나는 그 셋을 모두 누리는 사람이다. 그러니 내가 더 행복하지 않겠는가. 참으로 호탕한 기개요 한없는 자부심입니다. 달빛 아래 앉아 국화 향기 맡으며 홀로 술잔을 기울이다 노랫가락 흥얼거리는 나. 이렇게 풍류 넘치고 아름다운 가을밤이 영원할 듯 고요히 깊어 갑니다. 마무리 구절입니다.

달과 국화에게 묻노니 나 같은 사람 없겠지 / 問月問花如我無(문월문화여아무)
해마다 이런 날을 부디 놓치지 마시게 / 年年此日莫相辜(년년차일막상고)
나 홀로 취하고 노래하고 혼자 마시노라니 / 我醉我謌我獨酌(아취아가아독작)
국화꽃 수없이 피어 있고 달도 지지 않는구나 / 黃花無數月不落(황화무수월불락)

는 저버릴 ’, ‘는 노래 와 같은 뜻입니다. 더 이상 덧붙일 말이 없습니다. 잔치 같은 계절, 꽃축제와 더불어 우리네 가을도 이렇게 풍요롭고 여유 있고 호방하길 간절히 기원해 봅니다.
 

※ 《동문선(東文選)은 삼국시대부터 조선 전기까지 지어진 우수 작품을 모은 선집이며, 이미 번역되어 한국고전종합DB에 올라 있는 우리의 귀한 문화유산입니다. 귀한 내 것을 내 것인 줄 모르고 쓰지 않으면 남의 것이 됩니다. 이 코너는 동문선에 실린 작품을 소개하는 자리입니다. 잊을 뻔했던 내 것을 되찾는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편집자 주] 조경구(趙慶九) : 국문학을 전공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에서 한문전적 정리 번역 등의 일을 했으며, 한문 고전의 대중화에 관심을 갖고 <한문에게 말걸기, 다락원, 2005.>, <1등 했는데 왜 훌륭한 사람이 아니에요, 풀빛, 2015.>, <아하, 자연에서 찾은 비밀, 한국고전번역원, 2016.>, <우리가 만난 신비한 소녀, 정인출판사, 2018.> 등의 책을 썼다.


편집 : 양성숙 편집위원

조경구 서포터즈 벗  op9ch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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