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지는 우리 것] 마광남 주주통신원

다시마가 우리의 주 소득원이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다시마를 식용으로 사용한 것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다. 지금으로부터 약 1200년 전의 기록인 入唐求法巡禮行記 卷第一 당문종개성삼년(唐文宗開成三年) 구월(九月) 二十八日 대사가 선물을 주다(838년 9월 28일 음력)라는 기록인데, 여기서 대사란 장보고를 말하는 것으로 이 글을 쓴 사람은 일본의 구법승(求法僧) 엔닌이 당나라에서 불법을 공부했던 사람으로 장보고로부터 다시마 열 묶음과 해송(海松,청각)한 보따리를 받았다는 기록이 최초인 것 같다.

이러한 다시마를 두고 신당서(新唐書) 卷 219 북적렬전(北狄列傳 제 144 발해(渤海)라는 기록에는 그 나라(신라)가 가장 귀중히 여기는 것은 太白山의 토끼와·남해의 다시마라고 할 만큼 고가품이었던 것 같다.

정약용의 경세유표(經世遺表)제14권 균역사목추의(均役事目追議) 제1 관북(關北)조의 기록에는 곤포(昆布)는 천하에 진기한 것이었다(곤포 중에 작은 것은 방언으로 다시마(多士麻)라 함) 숙종 16년(1690) 2월 17일의 기록에는 우장에서 의주까지는 9일 길이라고는 하나 거리로 따져보면 7일 길에 불과한데 용만(龍灣) 사람이 다시마(多士麻)·담배(南草) 등을 사가지고 우장에 들어가서 석새[三升] 당면(唐綿)으로 바꾸어 와서 생계를 꾸려가는 물물교환도 이루어 졌다.

그럼 당시의 다시마 값은 과연 얼마나 했을까? 만기요람(萬機要覽) 재용편 공상(供上,1808년의 기록)편에는 다시마 매 근의 값은 7전 9푼이라고 적고 있다. 그런가 하면 동학농민혁명 자료총서 사정일기(1894년 11월 미상 음력)의 기록에는 다시마가격 1전 2푼(1894,12,16)이라고 했으니 가격의 변동이 심했던 것 같다.

통감부문서 의병용(義兵用) 총기 밀수 정보 件 (문서번호 憲機第二三六一號) 발송일 明治 四十二年十二月 七日 (1909-12-07)자의 기록을 보면, 1.청국인은 한국 내에서 봉기한 폭도에게 매도할 목적으로 총기는 다시마 속에 포장하여 수입한다. 2.관세소(關稅所)에서는 중국인의 화물은 그다지 주의를 하지 않아 다만 겉포장만을 얼핏 보고 다시마 등 화물의 일부를 목격하면 엄중한 조사를 하지 않는 것 같다고 한다. 그러니 철저히 조사하라는 내용의 공문서이다. 3.폭도에게 판매하는 총기와 화약의 가격은 다음과 같다고 한다. 서양식 총 1정에 대해 최상 100圓, 중 70圓, 하 50圓, 화약 1근에 대해 5圓 내지 7圓, 탄환 100발에 대해 5圓 내지 10圓 등을 탄약은 중국 상점에서만 판매한다고 한다.

그러니 모든 물건을 철저히 조사하라는 기록으로 볼 때 다시마 속에 무기류를 감추어 밀수입을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다시마가 이제는 우리 완도를 살찌게 하는 효자 해조류가 되었다. 2014년 완도 국제 해조류박람회를 통해 더 좋고, 더 많은 다시마를 생산하여 더 많은 량을 수출하는 계기로 삼았으면 한다.

마광남  wd341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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