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볼 글은 《동문선(東文選)》에 실린 작품이 아니라 조선 후기 실학자 안정복(安鼎福) 선생께서 1778년에 편찬한 역사책 《동사강목(東史綱目)》에 수록된 기사입니다. 그러면 ‘좋은 말로 할 때’ 코너 이름을 [동사강목 읽기]로 바꿔야 할 거 아니냐 하시겠지만, 앞의 [동문선 읽기 009]에서 노극청의 이야기를 보고, 이어서 읽고 싶어 잠시 곁눈질한 것이니만큼 곧 《동문선》으로 돌아갈 것이기에 굳이 코너 이름까지 바꾸지는 않겠습니다.
신라 진평왕(眞平王) 50년(628)에 크게 기근이 들었다. 이때 굶주린 백성들은 자식을 팔아서 먹고 살았다. 대사(大舍) 구문(仇文)의 아들 검군(劒君)은 사량궁(沙梁宮)의 사인(舍人)이었는데, 모든 사인들이 창고의 곡식을 훔쳐서 나누어 가졌으나 검군만 혼자 받지 않았다. 양이 적어서 받지 않는 줄 알고 더 주려 하니, 검군이 웃으며 말하였다. “나는 이름이 근랑(近郞)의 무리에 편입되어 풍월(風月)의 뜰에서 수행한 사람이니, 진실로 의로운 것이 아니라면 비록 천금(千金)이라도 어찌 마음이 움직이겠는가?”
자식까지 팔아야 할 정도로 온 나라가 난리였던 모양입니다. 굶주림이 심하여 모든 게 다 쌀로 보일 판입니다. 백성들이 오죽 기근에 시달렸으면 ‘이팝나무’ ‘조팝나무’라는 이름까지 만들어졌을까. 생각하면 마음이 저립니다. 그래도 궁에는 곡식이 더러 남아있었기에 일하는 사람들끼리 그걸 훔쳐서 나누었습니다. 같이 공모해야 비밀이 새지 않을 테니 검군에게도 나눠주는데 거절합니다. 어럽쇼? 이게 무슨 일? 네가 아직 배가 안 고프구나? ‘좋은 말로 할 때’ 받으라고. 왜 ‘좋은 말’은 이렇게 대부분 ‘좋지 않은 상황에서 쓰는 말’이 되는 건지,
검군은 화랑도였고 그 대장이 근랑입니다. 천하를 유람하며 심신을 수련하고 장차 나라의 지도자가 되려는 무리. 그러니 의롭지 않은 건 결코 취하지 않겠다. 짝짝짝. 멋지다 검군, 그의 화랑도 정신에 박수를 보냅니다. 그 화랑의 후예를 자처하는 곳이 오늘의 육군사관학교이니 육사 생도들의 기개와 정신도 또한 이렇게 멋지리라 기대합니다. 물론 해병대 정신, 해군 정신, 특전사 정신 등등도 모두 자부심을 가지고 지켜나가야 할 소중한 자산입니다. 생각해보면 모든 군인정신이 다 그래야겠군요. 특히 최고 지휘관인 장성(將星) 정도 되면 그런 정신이 온몸에 배어 있을 겁니다.
검군이 물러나 근랑에게 갔다. 사인들은 비밀이 새나갈까 두려워 검군을 죽이려고 다시 불렀다. 검군은 그것을 알면서도 가려고 하였다. 근랑이 말하였다. “어찌하여 담당 관리에게 말하지 않는가?” 검군이 말하였다. “내가 죽는 것이 두려워서 다른 사람을 죄에 걸려들게 하는 짓은 차마 할 수 없습니다.[畏我死而抵人罪(외아사이저인죄), 不忍也(불인야).]” “그렇다면 어찌하여 도망치지 않는가?” “저들이 잘못되었고 내가 옳은데 도망친다면 대장부가 아닙니다.[彼曲我直而逃(피곡아직이도), 非丈夫也(비장부야).]”
이거 상황이 좀 심각합니다. 퇴근한 검군을 다시 부르는 이유를 양쪽 다 압니다. 그럼에도 죽을 자리로 가겠다니 대장이 말립니다. 윗사람에게 고발하든지 도망이라도 치라고 권합니다. 대장부 검군은 과연 어떻게 했을까요?
검군은 마침내 그들에게 돌아갔다. 사인들이 겉으로는 사과하는 체하면서 음식에 독약을 넣었다. 검군은 그것을 먹고 마침내 죽었다.
이것이 잘된 결말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열전(列傳)에서는 “검군은 죽어야 할 데가 아닌 데서 죽었으니 태산 같은 생명을 기러기 깃털보다 가볍게 여긴 것이라고 할 수 있다.”라고 비판하였고, 조선 후기 문인 윤기(尹愭, 1741~1826) 선생도 검군의 선택을 안타까워하는 시를 지었습니다.
훔친 곡식 나눌 때 혼자 물리친 일은 의롭지만/ 盜分獨却義堂堂(도분독각의당당)
최선의 방법 택하지 못한 검군이 애석하구나/ 我惜劍君未盡臧(아석검군미진장)
죽기 두려워 남 고발하는 짓 차마 못하더라도/ 畏死告人雖不忍(외사고인수불인)
스스로 찾아가 독살을 당하다니 너무 옳지 않다/ 自投被毒太無當(자투피독태무당)
‘臧’은 착할 ‘장’이므로 ‘盡臧’은 ‘최선을 다하다.’라고 풀이할 수 있습니다.이 상황에서 그러면 검군은 어떻게 하는 것이 최선이었을까요? 고발도 못 하겠다. 도망도 못 치겠다. 그러면, 가서 그들을 설득한다? 굶주린 처자식 생각에 악만 남은 사람들을 상대로? 어떻게? 마땅한 답이 없어 보이니 더 딱합니다. 그나저나 착하고 훌륭한 사람들은 왜 늘 이렇게 남보다 먼저 죽거나 고통을 겪어야 하는 걸까요.
※ 《동문선(東文選)》은 삼국시대부터 조선 전기까지 지어진 우수 작품을 모은 선집이며, 이미 번역되어 한국고전종합DB에 올라 있는 우리의 귀한 문화유산입니다. 귀한 내 것을 내 것인 줄 모르고 쓰지 않으면 남의 것이 됩니다. 이 코너는 《동문선》에 실린 작품을 소개하는 자리입니다. 잊을 뻔했던 내 것을 되찾는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편집자 주] 조경구(趙慶九) : 국문학을 전공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에서 한문전적 정리 번역 등의 일을 했으며, 한문 고전의 대중화에 관심을 갖고 <한문에게 말걸기, 다락원, 2005.>, <1등 했는데 왜 훌륭한 사람이 아니에요, 풀빛, 2015.>, <아하, 자연에서 찾은 비밀, 한국고전번역원, 2016.>, <우리가 만난 신비한 소녀, 정인출판사, 2018.> 등의 책을 썼다.
편집 : 양성숙 편집위원
한겨레신문 주주 되기
한겨레:온 필진 되기
한겨레:온에 기사 올리는 요령
관련기사 역사와 고전의 숨결 기사더보기
- [동문선 읽기 059] 기괴함과 새로움
- [동문선 읽기 058] 나 아직 안 죽었어
- [동문선 읽기 057] 글쓰기는 어려워
- [동문선 읽기 056] 보고 싶다
- [동문선 읽기 054] 숨은 그림 찾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