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흐의 '가지 잘린 버드나무'
고흐의 그림이 나를 매료시켰던 이유
자!
우선 여기 그림 한 점을 좀 보것습니다. 이 그림은 최근 발견되어 화제를 모았던 네덜란드 화가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1863~1890)의 초기 수채화 ‘가지 잘린 버드나무’입니다. 나는 신문을 통해 처음 이 작품을 보고 당시 큰 충격에 빠졌습니다. 유추해 보건대, 이 그림은 분명 지독한 가난과 처절한 고독에 시달리며 살아야 했던 그의 불우했던 젊은 날을 모티프로 한 것이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 이 작품을 보고 내가 무어라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예술적 감흥을 - 이것을 우리는 ‘미적 충격’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 느꼈는데 나는 이 미적 충격의 성격을 띤 예술적 감흥을 무어라고 분석할 예술적 소양과 미적 안목이 너무나 부족하였습니다. 그림에 대해서는 문외한인데다 초등학교 시절 물감 준비도 제대로 하지 모해 동료들이 보는 앞에서 두 손을 들고 벌 받고 떨던 두려운 감정의 더께가 나를 항상 짓누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그림은 나에게 언제나 짐이고 콤플렉스였던 것입니다.
그러던 내가 어느 때인가부터 이상하게도 시를 좋아하게 되고 문학, 예술에 대한 익애溺愛의 정서에 깊이 젖어 치유하기 어려운 단계에 이르고부터는 신기하게도 그림이 가까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시와 그림은 하나詩畵一致라는 말이 있거니와, 하나의 묘사적 이미지로서 시와 그림이라는 정물적 기호의 세계 형식이 갖는 공통된 무엇이 나를 움직이게 했는지도 모르것습니다.
아무튼 나는 그러먼서 이 작품에도 크게 매료되어서는 도대체 이 작품이 쉽게 잊혀 지지 않는 ‘그녀’처럼 나를 붙들고 놓지 않는 근거가 무엇인지 너무 궁금하였습니다. 그녀가 아름답다먼 그것이 나를 매료시키고 잊지 모하게 하는 근거가 되는 것처럼, 이 그림이 나를 매료시키고 미적 충격에 빠뜨렸다먼 여기에도 분명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그 무엇이 있는 것입니다. 즉 미는 일단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가 아름다운 것처럼 이 작품이 그렇게도 아름답다먼, 아름다움을 아름답게 하는 근본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 이것을 우리는 미에 대한 체계적이고 정합적인 지식을 담고 있는 ‘미학aesthetics’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 미학은 무엇보다 미를, 아름다움을 그 대상으로 하는 학문입니다. 그것은 과연 근대미학의 창시자인 바움가르텐의 말대로, 미학은 감성적 인식에 관한 학문인 것입니다.
그러나 좆도 아닌 나의 경험으로 보건대, 그 미의 대상이 지시하는 범주가 단순하게 아름답다는 감성적, 미적 파토스만으로 규정되는 것은 아나라는 생각입니다. 어느 사회교육기관에서 겪은 일입니다. 주말에 일반 대중들을 상대로 ‘창의적 글쓰기’라는 이름을 걸고 수업을 했는데, 그날은 기형도 시 ‘엄마 걱정’을 설명한 다음 감상을 써서 발표하게 했습니다.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유년의 윗목
수강생 중에는 실업자, 직장인, 초등학교 여교사도 있었습니다. 몇 차례의 발표가 이어지고 잠시 긴장이 흐르는 가운데, 드디어 그 여자가 발표할 차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자신이 쓴 글을 발표하는 도중에 멈칫멈칫 조금씩 흔들리더니 갑자기 흐흐흐 큭, 하고 흐느끼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참 난감한 순간이기도 했고 놀라운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당신의 어머니는 이미 고인이 되었고, 자신을 낳아 지금에 이르기까지 어머니가 끼친 희생적인 사랑을 다시 접하는 순간, 그만 자신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주체하기 힘든 감정에 내맡기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자, 여기서 우리는 과연 아름다움이라는 게 반드시 사전적인 범주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때론 이렇게 슬픔도 아름다움이 될 수 있다는 거 - 비극적인 장면에 말로 다하기 어려운 비장한 맛이 있듯이, 가령, 슬픈 일 때문에 울고 나먼 이상하게도 기분이 상쾌해지고 후련해지먼서 어디선가 모르게 용기도 생기는데 이것은 일종의 ‘감정의 정화’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종류의 비극미가 갖는 아름다움을 배설의 쾌감에 비유하여 ‘카타르시스katharsis'라고 했습니다 - 따라서 우리는 아름다움이라는 ‘미적aesthetic’ 범주를 너무 좁직하게만 볼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아름다움의 미학이 있다먼 슬픔의 미학이 있는 것이고, 심지어는 추의 미학(카를 로젠 크란츠)이 있는 것입니다.
여기, 빈센트 반 고흐의 ‘가지 잘린 버드나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인생이 불우했다는 것은 포부나 재능은 있어도 도무지 좋은 때를 만나지 모했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였을까요. 그림 속에는 먹구름이 짙게 깔린 하늘 아래 연못 주변 오솔길을 누군가 희미하게 걸어오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틀림없이 자신을 대상화시킨 미적 분신일 것입니다. 그런데 보다시피 캔버스를 압도하고 있는 것은 모가지가 잘려나간 버드나무의 형상입니다.
저 멀리 역사를 빠져나와 쓸쓸한 귀향길에 마주친 이 가지 잘린 몽동발이 나무 - 이것을 우리는 흔히 하나의 미적 대상물로 ‘오브제objet’라고 합니다 - 에서 그는 분명 그 어떤 예술적 충동을, 참을 수 없는 강렬한 화의畵意를 느꼈음을 봅니다. 당시 나는 움베르토 에코의 <기호학 이론>(문학과지성사)에 푹 빠져 있었는데 - 그는 기호는 '가짜fake'라고 한 유명한 기호학자이자 베스트셀러 <장미의 이름>을 쓴 세계적인 소설가이기도 합니다 - 이상하게도 이건 가짜가 아니고 진짜처럼 느껴졌습니다.
자, 그렇다먼 여기 블루 톤의 색조를 지닌, 우울한 분위기를 발산하는 세기적인 화가의 작품에서 글쓴이를 비롯 많은 사람들 - 뉴욕타임즈(2019.6.28. ‘The perennial appeal of Vincent van Gogh’)를 보더라도 그는 끊임없는 매력을 발산하는 세기적인 화가임을 알 수 있습니다. - 이 그 천재성을 확인하고 감탄사를 연발하는 이치는 대체 무엇일까요? 이것을 제대로 밝혀내야만 우리는 비로소 아름다움의 본질이 무엇인지, 미학의 신전 기둥을 하나 세울 수 있는 것입니다.
기호는 대치이지 말도, 사물도 아니다
여기,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의 도가니탕 맛을 느끼게 하고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예술적 카타르시스는 '그림'과 '시'를 매체로 한 것입니다. 그림과 시, 이것은 모두 '기호sign'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미국의 기호학자 퍼스Peirce의 말대로, 기호의 본질은 ‘대치substitution'에 있는 것입니다. 즉 기호는 사물 그 자체가 아닙니다.
그리하여 자신의 감정을 다른 무엇으로 바꾸어 표현하는 거, 대치는 인간만이 지닌 고유의 예술적 표현 능력입니다. 동물 또는 어린 아이와 달리, 성숙한 인간은 시나 그림이라는 기호로 자신의 정서를 대신 표현할 수 있습니다. 가령, 어린 아이는 배고프면 울고 말지만 성숙한 인간은 '기호'라는 간접적인 도구를 써서 자신의 의사를 전달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감정을 완곡하게 돌려 다르게 말 할 수 있다는 거, 즉 고흐가 ‘가지 잘린 버드나무’에 가난과 고독에 시달리며 보내야 했던 자신의 불우했던 시절을 그려 넣고, 기형도 역시 ‘엄마 걱정’에서 시장에 돈 벌러 가신 엄마를 늦은 밤까지 혼자 기다리며 고독하게 보내야만 했던 무서운scary 유년시절을 ‘윗목’이라는 차가운 현실 이미지에로 대치시킴으로써 자신의 감정을 다른 대상에 담아냈던 것처럼, 인간은 이렇게 자신을 ‘타자화otherization’시키고, 이 타자화된otherized 자신을 ‘물끄러미’ 들여다 봄으로써 감정을 맑고 투명하게 유지, 고양시킬 수 있는 미적 존재입니다.
나는 얼마 전에 기념비적 성취를 이룬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 - ‘기행충parasite’은 깐느 영화제 황금종려상과 영어가 아닌 언어로 만들어진 영화로서 세계 최초로 아카데미 작품상 등을 휩쓸며 공전의 찬사를 받은 바 있는 한국의 민주화 세대 영화인이 이룬 명화입니다 - 을 보았는데 거기, 상하 - 빈부격차가 엄존하는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지층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그러진 삶을 그는 곱등이, 또는 바퀴벌레와 같은 기생충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즉 곱등이, 바퀴벌레가 숙주인 인간에 빌붙어 살고 있듯이, 반지하에서 살아가는 가지지 모한 자들the have-nots 또한 숙주라고 볼 수 있는 가진자들the haves에 빌붙어 살고 있는 이 시대의 개슬픈 우화fable를 상징적인 영상기법으로 뛰어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볼 때, 이 영화는 하나의 문제작으로, 왜냐하먼 거기 기생충으로 환유되고 있는, 생존의 위기에 극한으로 내몰린 사회적 약자들의 위험하고 불안한 삶을 고발 - ‘고발’이라고 했지만 사실 고발이라기보다는 ‘풍자’에 더 가깝습니다. 지층 사람들의 삶을 기생충에 비유하며 우화적으로 접근하고 있는데다 풍자 특유의 명랑한 웃음이 영화 전편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 한다고 볼 수 있는, 가진 것이 없어 노동을 하고 있지만 이마저도 박탈되고, 그리하여 살기 위해서는 그야말로 기생충처럼 가진 자들(숙주)의 먹이를 노리며 빌붙어 살아갈 수밖에는 없는 브리크bleak한 자본주의 사회의 실상을 리얼하게(또는 ‘봉테일하게’) 터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의 상징으로 인간의 몸속에 기생하며 사는 회충이나 촌충처럼, 꼭 그처럼 상류층 가정의 지하밀실에서 기생하고 있는 등장인물들이 끊임없이 모스Morse 부호를 긴급 타전하는 형식을 통해 자본주의의 위기를 넘어 종언end을 예고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이 작품이 한국을 넘어 세계인의 공감을 얻고 있는 것은 이 순간 최고의 새 점鳥占은 조국을 위해, 즉 그 누군가를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저 '돼지 같은like pigs' 지하현실에서 벗어나는 것이라는, 즉 나의 생존이 긴박한 현실적인 문제라는 '앙띠 까삐딸리즘anti-capitalism' 메시지가 전지구적인 공통 이슈라는 사실을 진실하고 설득력 있게 미적(은유)인 접근법으로 잘 보여줬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기호-매개적인 존재다
그림과 시, 영화는 이렇게 현실이 ‘색채’와 ‘언어’, ‘영상’이라는 기호로 대체된 ‘간접적인indirect' 미적 형성물입니다. 그러니 ‘가지 잘린 버드나무’에 실제 가지 잘린 버드나무가 있을 리 만무하고, ‘엄마 걱정’에도 엄마는 역시 등장하지 않으며, 하나의 영상 예술로서 ‘기생충’에도 실제 배우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렇게만 보먼 예술은 현실세계가 아니고, 따라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이 되고 말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지폐가 현물은 아니지만 현물을 대체한 기호로 현실적으로 유용하게 기능하고 있는 것처럼, 그림과 시, 영화 또한 다른 기호를 실어나르는 현대적인 매체들 가령, 드라마, 만화, TV, 인터넷, 스마트 폰 등과 더불어 현실을 대체하는 도구로 매우 훌륭하게 기능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기호는 일종의 ‘막대기a stick’ 같은 것입니다. 인간은 이처럼 <기호 막대>라는 도구를 통해 세상과 연결되어 있는 <기호 - 매개적 존재>입니다.
언어기호의 매개적 측면은 좋은 점이 있습니다. 가령, 백석 시인은 사랑하는 여인에게 '자야子夜'(김영한의 <내 사랑 백석>, 문학동네)라는 멋스런 아호를 부여했습니다. 그리하여 애인은 자연인에서 ‘자야’로 다시 탄생하였습니다. 플로베르는 <감정 교육>에서 남자주인공 프레데릭을 통해 고귀한 아르누 부인을 ‘마리’라고 부르먼서, 그 안에 흐릿한 향불 연기와 장미가 드문드문 담긴 것 같다고 말하며 무척 좋아했습니다. 도스또예프스끼를 좋아하는 나도 사랑하는 애인에게 '리자Liza'라는 멋스런 아호를 부여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애인이 좀 더 맑고 투명하고, 더 아름답게 다가왔습니다.
대상을 소유의 대상으로 본 것이 아니라 미적으로 ‘시화poetizing’시켰기 때문입니다. 여기, 미학의 본질이 헤겔적인 용어로 '즉자적卽自的'인 것이 아니라 '대자적對自的'이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세상사가 그렇듯이 사랑도 덤비는 게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나와 너 사이에 무언가 '텅 빈 공터'같이 빈 곳이 있을 때 거기 비로소 참으로 아름다운 애정의 꽃이 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직설적인 표현보다는 “oo 씨!” 또는 “마리!” 라고 다정하게 이름을 부르는 게 사랑의 고백에는 더욱 효과적일 수 있습니다. 고흐의 말대로, 삶은 텅 빈 캔버스 같은 것처럼, 꼭 그처럼 여백과 암시와 여운이 중요하지 않은가 하는 말입니다.
아내를 통해 보것습니다. 아내는 ‘용돈’ 하먼 얼굴을 찡그리다가도 오늘 시내에서 중요한 약속이 있다며 ‘품위유지비’ 하먼 엷은 미소를 보이며 돈을 내줍니다. 신기한 일입니다. ‘차비’하먼 시무룩하다가도 ‘거마비’ 하먼 또 아무 말 없이 돈을 내줍니다. 참 이상한 일이지 않습니까? 대체 용돈과 품위유지비, 차비와 거마비는 같은 언어인데 아내에게 왜 이렇게 다르게 다가왔을까요?
다른 사례들을 몇 가지 더 들어 보것습니다. 먼저, 관우關羽의 경우를 보것습니다.
계속 이어집니다...
편집 : 하성환 편집위원
<참고> 늘샘 김상천은 형태소에 기초한 근대 표준 어법이 부르주아 중심의 획일적인 언어 표현 양식이자 문화다양성을 해치는 비민주적인 잔재로 규정해 현실음을 중시하는 대중서사, 대중평자시대를 역설하는 문예비평가입니다.
글 가운데 하면(->하먼), 겠(->것), 못(-> 모), 어떻게(->어티케)로 표현하오니 참고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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