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선(東文選)49권에는 11편의 ()’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바늘 이니 따끔한 일침으로 풀면 된다고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앞의 [동문선 읽기 019]에서는 고려 시대 문인 이규보(李奎報) 선생의 <허리에 대한 따끔한 일침[腰箴]><생각에 대한 따끔한 일침[思箴]>을 보았습니다. “무슨 소리야? 언제 그런 걸 했어?” 궁금하신 분은 [동문선 읽기 019]로 잠시 다녀오셔도 좋겠습니다.

동문선49권에는 ()’에 이어 ()’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은 새길 이니 명심(銘心)한다는 말은 가슴에 새겨둔다는 뜻입니다. 가슴뿐만 아니라 세숫대야, (), , 벼루 등에도 새겨놓고 그것을 사용할 때마다 보면서 가르침을 되새기는 글이 입니다. ‘좌우명(座右銘)’는 자리 이므로 좌우명늘 자리 옆에 갖추어 두고 가르침으로 삼는 말이나 문구가 되겠습니다. 오늘은 고려 문인 이규보 선생께서 지으신 <준명(樽銘)><자계명(自誡銘)> 두 편을 보겠습니다. 먼저 <준명>입니다.

네가 저장한 것을 옮겨 사람의 배 속에 부어 넣는다.
[移爾所蓄(이이소축), 納人之腹(납인지복).]
너는 가득차면 덜어낼 수 있으니 넘치지 않는데,
[汝盈而能損(여영이능손), 故不溢(고불일),]
사람은 가득차도 살피지 않으니 엎어지기 쉽구나.
[
人滿而不省(인만이불성), 故易仆(고이부).]

사진 출처 : 필자
사진 출처 : 필자

은 술통 ’, ‘는 너 ’, ‘은 쌓을 ’, ‘은 들일 ’, ‘은 배 ’, ‘은 찰 ’, ‘은 넘칠 ’, ‘는 엎드릴 입니다. ‘는 여기서는 바꿀 이 아니라 쉬울 입니다. <준명(樽銘)>은 그러니까 술항아리에 새긴 경계의 말씀이 되겠군요. 병에 든 술이 사람의 배 속으로 자리를 옮겨간 것에 불과한데 술병은 멀쩡하고 사람은 쓰러집니다. 절제 없이 퍼마시고 필름이 끊겨 기어이 낭패를 보는 사람들을 비판하는 글입니다. 애초부터 안 마시면 문제가 안 생길 텐데 그게 안 되니 술병에라도 경고 문구를 새겨 놓고 그거 보면서 자제하자는 갸륵한(?) 뜻이겠군요. 차라리 즐기기나 할 것이지, 술 조심하라는 경고문 새겨놓고 그 앞에서 술 마시는 사람이나, 흉한 사진 인쇄된 담뱃갑 보면서 담배 피우는 사람이나, 그 고민과 민망함이 어쩌면 비슷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어서 볼 <자계명(自誡銘)>스스로의 경계를 마음에 새김이란 뜻이겠습니다. 세상 일이 알고 보면 어느 것 하나 스스로 경계하지 않을 게 없을 텐데 여기서는 특별히 무엇을 더 마음에 새기자고 하시는 걸까요?

친하고 가깝다고 생각하여 나의 은밀한 일을 누설하지 말라.
[無曰親昵(무왈친닐), 而漏吾微(이루오미).]
총애하고 사랑하는 처첩이라지만 한 이불을 덮어도 속마음은 다른 법이다.
[寵妻嬖妾兮(총처폐첩혜), 同衾異意(동금이의).]
부리는 종놈이라 생각하여 말을 경솔하게 하지 말라.
[無謂僕御兮(무위복어혜), 輕其言(경기언).]
겉으로는 뼈대 없는 사람처럼 보이나 속으로는 꽁한 생각을 쌓아두는 법이다.
[外若無骨兮(외약무골혜), 苞蓄有地(포축유지).]
더구나 나에게 친근한 사람도 아니고 내가 부리던 사람도 아닌 자에게야.
[況吾不媟近(황오불설근), 不驅使者乎(불구사자호)?]

아하, 말조심하라는 경계, 특히 비밀을 잘 누설하거나 말을 함부로 하는 사람에 대한 경계의 말씀이었습니다. ‘은 친할 ’, ‘는 샐 ’, ‘은 총애할 ’, ‘는 사랑할 ’, ‘은 이불 ’, ‘은 종 ’, ‘은 쌀 ’, ‘은 허물없을 ’, ‘는 말 몰 입니다. 모르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종처럼 부리는 사람이나 심지어 처첩(妻妾)처럼 한 이불 덮는 사람마저도 완전히 믿어서는 안 된다. 비밀을 말해도 안 되고 막말 함부로 해도 안 된다. 그 속마음이 어떤지 누가 어떻게 알겠느냐. 괜히 나중에 크게 당한다그러고 보니 어째 선생께서도 한번 된통 당한 경험이 있으신 듯합니다.

사진 출처 : 필자
사진 출처 : 필자

, 이건 비밀인데 말이야, 너만 알고 있어.” 그래서 자신만 아는 비밀인 줄 알고 입조심하고 있었는데 모임에 나가 보니 다들 알고 있습니다. 게다가 내가 제일 늦게 알았습니다. 그런 게 비밀입니다. 영원히 감출 수도 없고 감추어지지도 않는 것. 주변을 둘러보며 귓속말로 걔네들이 사실은 친남매야.” “, 저런.” 재벌 후계자의 출생의 비밀은 문밖을 우연히 지나가던 라이벌이 듣습니다. 회장님의 수상한 비밀 통화는 운전기사가 듣습니다. 그리고 그게 언제 내 발목을 잡을지 모릅니다. “지가 뭔데 나한테 그따위 막말을 해? 회장이면 다야? 인격이 회장이 돼야지. 어디 두고 보자.” 존중 없이 함부로 대했던 사람에게 뒤통수를 맞는 법입니다.

남이 알아서는 안 되는 일이라면 비밀이 새나가지 않도록 항상 말조심을 해야 합니다. 남이 들어서 불쾌하게 느낄 수 있는 막말이라면 함부로 해서는 안 됩니다. 누구도 믿지 말고 언제나 경계해야 합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고 믿고 안심했다가 뒤통수 맞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막말도 막말이지만, 남이 알면 안 되는 일은 애초에 저지르지 말아야 하는 거 아닐까요.

편집 : 조경구 객원편집위원,  하성환 편집위원

※ 《동문선(東文選)은 삼국시대부터 조선 전기까지 지어진 우수 작품을 모은 선집이며, 이미 번역되어 한국고전종합DB에 올라 있는 우리의 귀한 문화유산입니다. 귀한 내 것을 내 것인 줄 모르고 쓰지 않으면 남의 것이 됩니다. 이 코너는 동문선에 실린 작품을 소개하는 자리입니다. 잊을 뻔했던 내 것을 되찾는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조경구 서포터즈 벗  op9ch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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