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시험의 연속입니다. 학교 시절의 중간고사, 기말고사, 대학입시에서부터 졸업 후의 입사 시험, 자격증 시험, 이직을 위한 시험, 승진 시험 등등. 가요 경연 프로그램도 올라가고 떨어지고 하니 따지고 보면 시험입니다. 방송 프로그램도 시청률에 따라 폐지되거나 살아남으니 그것도 시험. 운동선수가 프로 구단에 뽑히고 안 뽑히는 것도 시험. 선거도 당락이 있으니 그것도 시험. 그러고 보면 인생에 시험 아닌 것이 없습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해 달라는 기도가 무색할 지경입니다.

과거의 가장 큰 시험은 과거시험이었을 겁니다. 급제한 사람이 있으면 당연히 떨어진 사람이 있는 법. 실은 떨어진 사람이 훨씬 더 많은 게 시험입니다. 떨어진 사람에게 너는 최선을 다했다.’라고 위로하지만, 실제 최선을 다했는지도 모를 일이고, 그런 말이 하나도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건 우리도 다 압니다. 고려시대 문인 이규보(李奎報) 선생도 시험에 떨어진 선배를 위로하는 글을 썼습니다. <최 선배가 과거에 낙방하여 서쪽으로 가는 것을 보내며[送崔先輩下第西遊序]>라는 글로 동문선(東文選)83권에 실려 있습니다.

선비가 유사(有司)에게 뽑히기를 구하는 것은 농사짓는 일에 비유할 수 있다. 이를테면 농사꾼이  하늘의 은택이 반드시 제때에 내리지 않을 것이다, 지력(地力)이 반드시 좋지 않을 것이다.’라고 먼저 의심하여, 호미며 쟁기 같은 농기구를 수리하지도 않고, 밭도 갈지 않으며 씨앗도 심지 않고서 말하기를, “이것은 천지의 탓이지 내 탓이 아니다.”라고 한다면 옳겠는가.

시작부터 비유가 재미있습니다. 유사는 사무를 맡아보는 담당자이니 시험관을 말합니다. 시험 보겠다고 접수는 해 놓고 미리부터 에이, 안 될 거야. 내가 모르는 것만 나올 걸. 때가 안 맞아.” 이런저런 핑계를 앞세우며 공부도 안 하고 필기도구도 제대로 챙기지 않은 채 시험장에 도착합니다. 끝나고 나서는 시험장 조명이 흐려서. 비행기 소리가 시끄러워서.” 라고 핑계를 대거나 감독관이 이상해, 문제가 틀렸어.”라며 남을 탓합니다.당연히 결과는 낙방입니다.

사진 출처 : 필자
사진 출처 : 필자

요컨대 반드시 농기구를 잘 갈아 놓고, 일단 밭을 갈고 나면 또 계속해서 김을 매는 등 때에 맞추어 부지런히 일을 해 놓은 다음에, 하늘의 때와 땅의 이로움이 내게 응답해 주지 않는다면 이것은 하늘과 땅의 허물이지 밭가는 사람의 죄는 아니라 할 수 있다. [要必磨礪其器用(요필마려기기용), 旣耕之(기경지), 又繼以耘耨(우계이운누), 汲汲欲及時(급급욕급시), 然後天時地利之不相答(연후천시지리지불상답), 則是天地之咎也(즉시천지지구야), 非耕者之罪也(비경자지죄야).]

는 갈 ’, ‘는 숫돌 니 합치면 갈고닦는다.’라는 뜻입니다. ‘는 김맬 과 김맬 ’, ‘은 물 길을 이고 는 허물 입니다. 농사로 비유했지만 내용은 과거시험입니다. ‘나 뽑아주세요.’ 하기 전에 먼저 준비부터 제대로 해 두라는 말씀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합격 여부는 그다음 문제이니 흔한 말로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하라는 지극히 당연한 말씀. 다 아는 얘기면서도 괜히 가슴 한쪽이 뜨끔합니다. ‘아니, 내가 진인사하지 않은 걸 어떻게 알았지?’ 그나저나 떨어진 사람에게 이런 말이 무슨 위로가 될까요?

지금 그대는 묘령(妙齡)의 나이 때부터 서포(書圃)에서 살면서 설경(舌耕)의 도구를 갈고 닦아서 유사에게 시험해 주기를 구하였는데 유사가 그대를 취하지 않았으니, 이는 유사의 부끄러움이지 그대의 부끄러움이 아니다.

서포(書圃)는 글의 밭, 설경(舌耕)은 입으로 밭갈이하는 일. 농사로 비유를 열었으니 농사로 비유를 이어갑니다. 선배는 어린 나이부터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할 만큼 노력했는데 떨어졌으니 이건 분명 시험관이 잘못한 거요.” 회사가 잘못했네. 학교가 잘못했네. 이렇게 편들어주는 얘길 들으면 그래도 떨어진 사람 기분은 좀 풀리겠군요.

그대는 물러가서 다시금 더욱더 그 도구와 쓰임을 예리하게 갈고 닦은 뒤 눈 밝은 유사를 기다렸다가 기예를 겨룬다면, 아침에 씨 뿌리고 저녁에 수확하여 수천 개의 창고에 쌓아두게 될 것이니, 어찌 풍년이 들지 않을 것을 걱정하겠는가. 그대는 힘쓸지어다.

마지막 마무리가 마음에 쏙 듭니다. 그래도 모르니 열심히 실력을 갈고 닦으시오. 다음 시험에야 설마 눈 밝은 시험관이 있지 않겠소? 지금은 비록 실망스럽더라도 어차피 급제는 할 것이고, 장래에 어마어마한 부귀영화가 보장되어 있는데 어찌 힘쓰지 않을 수 있겠소? 최 선배가 서쪽으로 가는 이유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시험에 떨어진 사람 위로하고 격려하는 글로는 엄지 척입니다. 나머지는 줄여도 될 듯합니다.
 

※ 《동문선(東文選)은 삼국시대부터 조선 전기까지 지어진 우수 작품을 모은 선집이며, 이미 번역되어 한국고전종합DB에 올라 있는 우리의 귀한 문화유산입니다. 귀한 내 것을 내 것인 줄 모르고 쓰지 않으면 남의 것이 됩니다. 이 코너는 동문선에 실린 작품을 소개하는 자리입니다. 잊을 뻔했던 내 것을 되찾는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편집자 주] 조경구(趙慶九) : 국문학을 전공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에서 한문전적 정리 번역 등의 일을 했으며, 한문 고전의 대중화에 관심을 갖고 <한문에게 말걸기, 다락원, 2005.>, <1등 했는데 왜 훌륭한 사람이 아니에요, 풀빛, 2015.>, <아하, 자연에서 찾은 비밀, 한국고전번역원, 2016.>, <우리가 만난 신비한 소녀, 정인출판사, 2018.> 등의 책을 썼다.


편집 : 양성숙 편집위원

조경구 서포터즈 벗  op9ch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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