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전기적 스케치

김기진의 아호‘팔봉八峰’, 이것은 그의 고향 청주군 남이면 팔봉리의 팔봉산에서 취한 이름입니다.(‘내 아호의 유래 ’팔봉‘, <김팔봉문학전집>2, 회고와 기록, 문학과지성사, 1988.)

그는 일제 당시 군수 김흥규의 둘째 아들(첫째 아들은 유명한 조각가이자 공산주의자 김복진입니다.)로 아버지의 전근으로 이리저리 옮겨 다니느라 크게 유복한 환경에서 컷다 할 수는 없지만 경제적인 고초를 겪지는 않았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그래 당시 사립명문 중의 하나인 배재중학의 학생으로 서울유학이 가능했던 것도 그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그곳에서 그는 평생의 친구 박영희를 만났습니다.

여기, 박영희 또한 당시 서울 중산층의 아들로 무난한 경제생활을 유지하는 가정 속에서 성장했던 동배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도회의 아들로 팔봉이 아무래도 순진하고 감상적인 시골소년다운 인물이라먼, 회월은 관념적이고 지적인 도회의 성격을 지닌 인물이었습니다.

아무튼 둘은 그 알지 모할 의기로 투합 4년 동안 연인처럼 죽고못사는 관계가 되어서는 얼마후 팔봉이 일본에 유학하고 곧이어 회월 또한 유학하는 동안 주거니 받거니 하먼서 서구의 문물을 접한 일본의 신사상을 접하게 됩니다.

이때는 객관적으로 3.1혁명 이후의 절망적 시기입니다. 한편 조선의 3.1혁명의 열망을 꺾은 이때는 제국주의 일본에게 있어서는 자신감이 넘치던 시기로 - 무론 그것은 쌀과 금을 비롯 조선의 골수를 수탈한 결과로 - 그러니 1920년대는 일본의 호황기로 저 러시아 혁명의 사회주의 사조를 비롯 선진 유럽의 다양한 사조도 넉넉하게 받아들였던 백화제방의 문화개방 시대로 이른바‘대정大正 데모크러시’시기였습니다.

그러나 근대라는 자본주의사회는 노동자의 피를 빨게 되어 있는 산업사회라 빠르게 산업화되어가는 일본사회 또한 이런 자본주의의 그악한 산업사회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사회주의의 사상을 기조로 하는 변혁 사상에 빠르게 전염이 되던 시기로, 맑은 피를 지닌 순수한 조선 청년으로, 그러나 식민지의 청년으로 그 또한 의기를 지닌 조선의 지식 청년으로 팔봉도 이런 사회분위기에 쉽게 감염이 되었다 할 것입니다.

팔봉이 정칙 영어학교에 적을 두고 머물먼서 크게 영향을 받은 서구와 일본의 사상은 프랑스 바르뷔스가 주장하는 바의 클라르테 운동이었습니다. 클라르테는‘빛’이라는 뜻으로 사회주의 문학이론의 일종입니다.

문예의 사회성을 중시하는 새로운 사조입니다. 이 사상이 당시 일본의 사회주의 거물들을 사로잡은 가운데 팔봉 또한 여기에 감염이 되어서는 조선에 최초의 사회주의 문예운동을 일으키기 위한 씨앗을 뿌리것다는 각오로 귀국하게 됩니다.

 

조선에 있어서 어떠한 문학이 필요하냐 할 것 같으면(일본도 그렇고 중국도 그러할 터이지만) 프롤레트 컬트의 문학이 꼭 필요한 것이다.”

김팔봉, ‘클라르테 운동의 세계화’, 1923. 9. <개벽>39

 

모든 운동의 귀결은 결국은 프롤레타리아의 손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모든 운동의 모든 결론이.”

-김팔봉, ‘프로므나드 상티망탈’, 1923. 7 <개벽> 37

 

자, 여기 나의 눈깔을 자극하는 것은‘컬트’라는 말이고, 또한 나의 관심을 촉발하는 것은 ‘모든’이란 말의 반복적 언사입니다. 단어는 신중한 선택이기도 하고, 무의식이 표출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컬트’는 일시적이고 열렬한 숭배를 의미하고, 그것은 관념적인‘ 모든’에 그 숭배의 초점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암시입니다. ‘컬트’에 그의 운명이 예고되어 있고, ‘모든’에 그의 오버 액션이 암시되어 있지 않는가 말입니다.

어찌되었든 그는 조선에 돌아와서는 프롤레타리아 문예운동의 선구가 되었습니다. 조선에 최초의 프로문예운동의 씨앗을 뿌린 자는 분명 팔봉 김기진입니다. 그러나 갈수록 그는 왜 그토록 숭배하던 프롤레타리아 운동과 점점 멀어지게 되고, 그는 왜 갈수록 모든 프롤레타리아의 손을 떠나 자신의 이익에 더욱 눈이 먼 자가 되었는지...자, 우리는 역사의 신성한 제단에 바친 그의 고백록이 전하는 진실 앞에 마주서게 됩니다.

 

나는 본래 일본서 돌아올 때 처음부터 결심하기를 문학 운동만 하지, 정치 운동은 안 하겠다는 결심이었으니까, 이성태(*인용자 - 여기, 이성태는 당시 유명한 공산당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또한 조선공산당 기관지 <조선지광>을 펴낸 자입니다.) 가 그렇게 자주 찾아왔었지만 나는 그로부터 한번도 공산당이나, 공산청년동맹에 가입하지 않겠느냐는 의논을 받아본 일이 없었다.”

-김팔봉, ‘나의 회고록’, 1964.7~1966.1 <세대>

 

자, 여기서 우리는 참으로 소중한 진실을 보게 됩니다. 그러니까 팔봉은 문학 운동과 정치 운동은 별개라는 사고를 지닌 존재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그가 조선에 돌아오먼서 마음으로 결심한 저 내면의 진실한 얼굴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니까‘처음부터 결심’하였다는 이것이 중요한 것은 그의 무의식의 구조 심층에 깊이 가라앉은 인간 김팔봉의 진실한 거울이기 때문입니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은 때로 이렇게 소중한 진리를 깨우칩니다.

김팔봉 스스로 드러낸 몇몇 진실한 메모들은 그를 이해하는 데 매우 소중한 일차 자료입니다. 그러나 이런 일차 자료가 이차 분석으로 이어지지 않으먼 다만 자료의 무덤에 불과합니다.

그래 나는 좆도 아닌 문예비평가로 어쩔 수 없이 미의 판관으로서의 소임을 다하지 않을 수 없는 가운데 이 글을 써야 하는 것이지만, 그런 나의 흐린 눈깔에도 눈에 들어오는 것은 확실히 일차 자료가 지닌 단서들clues이 지닌 힘입니다.

자, 그러니 한걸음 더 나아가 보것습니다.

그래 글 잘하고 말 잘하고 사교술이 뛰어난 발군의 김팔봉이 주동 아닌 주동이 되어서는 친구 박영희를 엮고 주변문인들을 엮고 엮어서는 프롤레타리아 문학을 한다고 출렁거리고 다니먼서 들떠서는 드디어 조선에도 러시아의 라프와 일본의 나프와 같은 카프(1925.8)라는 조선프로예술의 시대가 개막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 연극의 주연은 확실히 김팔봉이었습니다. 어린 임화는 이 모임에 끼지 모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시인에서, 소설가로, 기어코는 비평가로 조선 문예의 지도자로 변신해있던 시기, 당시는 일제 식민자본주의의 심화로 조선민중이 극도로 가난과 병고에 시달리던 궁핍한 시대였습니다. 그래 최서해를 비롯 자연발생적으로 조선의 궁핍한 현실을 반영한 새로운 경향 소설들이 개구리알처럼 쏟아져 나오던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프로문학을 비판적으로 보고 있던 조선의 방탕 부르주아 문사인 김동인이 ‘살인방화주먹마치시’(*‘마치’는 오늘의 망치입니다)라 힐난하던 대로 조선의 신경향예술의 수준은 매우 거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그 또한 시인에서 소설가로, 다시 비평가로 카프의 지도자로 변신한 박영희 그 자신조차 인정한 사실이었습니다.

 

신경향파의 문학은 중세기의 노동자가 그들의 생활의 불안으로서 기계를 파괴하려든 것이나 같다. 노동자가 기계를 파괴한다고 물론 그들의 생활이 이전처럼 풍부하게 되는 것도 안이며 그럿타고 자본가에게 기계가 업는 것도 아니다. 다만 울분한 끝에 감정적으로 한 행동에 불과하다.”

-박영희, ‘신경향파문학과무산파의 문학, <박영희전집>, 영남대학교출판부

 

이것은 자연 안팎으로 예술 논쟁을 일으킬만한 문예적 환경이었다 할 것입니다. 이런 가운데 선편을 쥔 쪽은 역시 발빠른 김팔봉이었습니다. 그는 참 빠른 인간입니다. 그래 현단계의 신경향파 소설들이 지닌 이야기를 하는 기운데 그는 절친 박영희가 쓴 소설을 문제삼으먼서 말했습니다.

“소설이란 한 개의 건축이다. 기둥도 없이, 서까래도 없이, 붉은 지붕만 업히어놓은 건축이 있는가?”(‘문예월평-산문적 월평’, 1926. 12. <조선지광>)며 일갈을 퍼부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조선 문예계에 나타난 최초의 미학 논쟁(이른바‘내용-형식’논쟁)으로 이는 분명 역사적인 의의를 지닌 것이라 할 것입니다.

여기, 소설을 이야기하먼서 이를 한 개의 건축에 비유한 것은 솔직히 말해서 매우 탁월한 표현 기법이라 할 것입니다. 비유는 쉽게 설명하는 방법인데, 그것도‘건축’에 비유함으로써 마르크스 문예론의 관점을 쉬우먼서도 은근하게 암시했기에 더욱 함유한 바가 적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김팔봉이‘붉은 지붕’보다는‘기둥과 서까래’를 중시했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나의 흐린 눈을 자극하는 매우 중요한 해결의 실마리가 아닌가 말입니다. 그러니까 팔봉은 하나의 메시지로서의 설명(내용)보다는 기술적 묘사(형식)에 심중이 가 있는 것입니다.

이를 달리 말하면 팔봉은 예술을 선전물보다는 예술을 위한 예술, 그러니까 언어를 중시하는 유미적 관점에 서 있는 것을 암시한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 앞에서 말한 나는 본래 일본서 돌아올 때 처음부터 결심하기를 문학 운동만 하지, 정치 운동은 안 하겠다는 결심대목과 일맥상통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팔봉의 비평은 갑자기 나온 게 아닙니다.

그는 분명 하나의 일관된 인생관과 예술관을 지니고 조선에 발을 내딛은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는 식민자본주의의 모순이 깊어가는 현실과 비례해서 프롤레타리아운동의 열기 또한 드높던 시기였습니다. 그래 조선공산당의 중요 간부였던 자신의 형 김복진과 이성태의 권유로 박영희와의 논전은 김팔봉의 백기로 끝나고 말았던 것입니다. 팔봉 인생 1막의 굴욕적인 패배인 셈입니다.

이러는 가운데 일제 당국은 1928년을 전후로 조공 간부들을 비롯 활동가들을 대거 검거하는 초유의 사태를 일으켰는데, 이것은 당시 끓어오르던 조선의 프롤레타리아 계급해방의 발전에 심대한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이 해야말로 한국공산주의운동은 사실상 마비되었다(스칼라피노·이정식 <한국공산주의운동사1>, 돌베개. 1986)는 말처럼, 조선의 어두운 궁핍한 시기였습니다.

바로 이런 때에 김팔봉의 감각은 역시 남달랐습니다. 그는 재빠르게 반응했습니다.

 

우리들의 문학은 사람이 보도록 알아보기 쉽게 만들어야 한다. 더구나 작금 1년 이래로 극도로 재미없는 정세에 있어서 우리들의연장으로서의 문학은 그 정도를 수그려야 한다.”

김팔봉, ‘변증적 사실주의 양식 문제에 대한 초고’1929.2.25.~3.7 <동아일보>

 

자, 이것 또한 카프 진영 내에서 미학 논쟁을 낳았던 유명한 논쟁(‘예술대중화논쟁’)으로 김팔봉의 예술적 감각은 증말이지 탁월한 것임에 틀림없어 보입니다. 자, 이것은 임화와 관련되어서만 의미가 있는 것으로 앞으로 자세히 얘기하것습니다.

여기,‘연장으로서의 문학’은 무론 프롤레타리아 문학을 말하는 것으로 계급해방을 위해서는 문학이 하나의 연장tools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런 기본 신념도 “작금 1년 이래로 극도로 재미없는 정세에 있어서”는 그 (표현의 강도에 있어서의)정도를 수그려야 한다는 것은 뭐 막마디로 프로문학의 포기를 선언한 것이나 마찬가집니다. 즉 이것은 그 개인에 있어서는 전향선언이나 다름없는 것입니다.

자, 이런 것들은 그의 전기적 스케치와 관련하여 든 두 가지 사례에 불과하지만 매우 중요한 것으로 철학적 사유와 미적 태도가 결코 분리될 수 없음을 잘 보여주는 적나라한 실상입니다. 대체 속이고 싶어도 속일 수 없는 김팔봉의 실체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후의 그가 지나간 부끄러운 행적을 말해 무엇하것습니까? 자세한 것은 <친일인명사전>(민족문제연구소)에 보입니다.

이런 인간을 승냥이 같은 일제가 가만 놔둘 리가 있을까요? 그런 그가 제발로 찾아가 그들과 수작을 벌이고서는 이광수(회장)와 친구 박영희(상무간사)를 몰아내고‘조선문인보국회’의 최고앞잡이가 된 것이 무에 그리 부끄러운 것인지...

아, 씨바! 그는 계급의 간판을 내걸고 영혼을 판 조선의 갈보 지식인입니다.

나는 그렇게 봅니다.

(2회 예고, 내용과 형식은 둘인가 하나인가?)

 

편집 : 하성환 편집위원

<참고> 늘샘 김상천은 형태소에 기초한 근대 표준 어법이 부르주아 중심의 획일적인 언어 표현 양식이자 문화다양성을 해치는 비민주적인 잔재로 규정해 민중의 현실음을 중시하는 대중서사, 대중평자시대를 역설하는 문예비평가입니다.

글 가운데 하면(->하먼), 겠(->것), 못(-> 모), 어떻게(->어티케)로 표현하오니 참고하길 바랍니다.

김상천 주주  critick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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