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릉도원(武陵桃源)’이란 말이 있습니다. 동진(東晉)의 시인 도연명(陶淵明)의 〈도화원기(桃花源記)〉로부터 나온 말로 ‘이상향’, ‘별천지’를 비유적으로 가리킵니다. 이상향은 영어로는 유토피아(Utopia)인데, ‘유토피아’의 어원을 따져보면 ‘존재하지 않는 곳’이랍니다. 너무 완벽한 곳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인가 봅니다. 〈도화원기〉의 내용을 간단히 소개합니다.
무릉(武陵)에 살던 어부가 냇물에 복숭아꽃[桃]이 흘러내려오는 것을 보고 근원[源]을 찾아 물길을 거슬러 올라갔다. 계곡이 끝나자 산이 막혀 있는데, 작은 틈이 있어 비집고 한참 들어가니 마침내 탁 트인 곳이 나왔다. 그곳은 비옥한 토지와 마을이 있는 별천지였다. 마을 사람들이 어부를 보고는 깜짝 놀라면서 어디서 왔느냐고 묻고는 집집마다 초대해서 잘 대접하였다. 자신들을 소개하기를 ‘옛날에 진(秦)나라의 난리를 피해서 이곳에 들어왔으며, 그 후로 다시는 바깥세상과 교류하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어부는 수백 년 동안의 바깥세상 변화에 대해 얘기해 주고 며칠 동안 대접을 잘 받은 뒤 그곳을 떠났다. 나오면서 돌아갈 길을 잘 표시해 두고, 관가에 아뢴 뒤 다시 그곳을 찾아보았는데 길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 뒤로 누구도 끝내 그곳을 찾아내지 못했다.
다시는 찾아낼 수가 없었다니 존재하지 않는 곳, ‘갈 수 없는 나라’가 맞겠군요. 그 뒤로 이를 소재로 한 작품들이 많이 만들어졌는데, 고려 후기 문인 진화(陳澕) 선생의 칠언고시 〈도원가(桃源歌)〉도 그중 하나입니다. 《동문선(東文選)》 6권에 실려 있습니다.
동해의 짙푸른 안개 동남동녀 아득하고 / 丱角森森東海之蒼煙(관각삼삼동해지창연)
상산의 푸른 봉우리 자줏빛 지초 빛나니 / 紫芝曄曄南山之翠巓(자지엽엽남산지취전)
바로 그 때에 진나라 난리를 피할 곳은 / 等是當時避秦處(등시당시피진처)
도원이 가장 좋아라 신선 마을로 불렸네 / 桃源最號爲神仙(도원최호위신선)
‘丱’은 쌍상투 ‘관’, ‘紫’는 자줏빛 ‘자’, ‘芝’는 지초 ‘지’, ‘曄’은 빛날 ‘엽’, ‘翠’는 비취색 ‘취’, ‘巓’은 산꼭대기 ‘전’입니다. 진 시황(秦始皇)이 삼신산(三神山)에 가서 불로초(不老草)를 구해오라고 서불(徐市)을 보냈는데, 그는 동남동녀 5백 명을 데리고 떠난 뒤 돌아오지 않았다고 전해집니다. 남산은 상산(商山)입니다. 진(秦)나라의 난리를 피하여 네 은자가 상산 즉 종남산(終南山)에 숨어 살면서 “빛나는 자줏빛 지초(芝草)여 요기할 만하도다[燁燁紫芝 可以療飢].”라는 노래를 지어 불렀답니다. 앞부분에는 진(秦)나라 시대 혼란기를 살아가던 사람들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습니다.
시냇물 흐름 다한 곳 산자락 입구 있으니 / 溪流盡處山作口(계류진처산작구)
땅 기름지고 물 부드러워 좋은 밭 많았네 / 土膏水軟多良田(토고수연다양전)
날 저물 때 붉은 삽살개는 구름 보고 짖고 / 紅厖吠雲白日晩(홍방폐운백일만)
봄바람에 떨어진 꽃은 땅에 가득하였도다 / 落花滿地春風顚(낙화만지춘풍전)
복숭아 심고는 고향 돌아갈 생각 뚝 끊겼고 / 鄕心斗斷種桃後(향심두단종도후)
진시황이 책 불사르기 이전 얘기만 했지 / 世事只說焚書前(세사지설분서전)
풀과 나무 보면서 계절의 변화 알았고 / 坐看草樹知寒暑(좌간초수지한서)
웃으며 어린아이 길러 앞뒤 일은 잊었네 / 笑領童孩忘後先(소령동해망후선)
어부가 한 번 보고 곧 배를 돌렸지만 / 漁人一見卽回棹(어인일견즉회도)
안개 물결만 만고에 부질없이 아득하구나 / 煙波萬古空蒼然(연파만고공창연)
‘膏’는 기름질 ‘고’, ‘軟’은 연할 ‘연’, ‘厖’은 삽살개 ‘방’, ‘吠’는 짖을 ‘폐’, ‘顚’은 뒤집힐 ‘전’, ‘焚’은 불사를 ‘분’, ‘棹’는 노 ‘도’입니다. 이 부분은 난리를 피해 숨어들어온 사람들 이야기로, 도연명의 〈도화원기〉 내용이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여기까지가 이 시의 도입부, 선생이 하고 싶은 말씀은 이제부터가 시작입니다.
그대는 보지 못하였는가, 저 강남촌에서는 / 君不見江南村(군불견강남촌)
대나무 지게문에 꽃으로 울타리 삼은 것을 / 竹作戶花作藩(죽작호화작번)
맑은 물 졸졸 흐르니 차가운 달빛 어지럽고 / 淸流涓涓寒月漫(청류연연한월만)
푸른 나무 고요한데 숨은 새 지저귀는구나 / 碧樹寂寂幽禽喧(벽수적적유금훤)
한스러워라, 백성들 살림 날로 피폐한데 / 所恨居民産業日零落(소한거민산업일영락)
고을 아전놈들 쌀 걷겠다고 늘상 문 두드리니 / 縣吏索米長敲門(현리색미장고문)
밖에서 달려들어 핍박하는 일만 없다면 / 但無外事來相逼(단무외사래상핍)
산마을은 곳곳이 어디나 다 무릉도원인 것을/ 山村處處皆桃源(산촌처처개도원)
이 시는 깊은 뜻 있으니 그대여 버리지 말고 / 此詩有味君莫棄(차시유미군막기)
고을 역사에 적어 넣어 후손들에게 전하라 / 寫入郡譜傳兒孫(사입군보전아손)
‘‘藩’은 울타리 ‘번’, ‘涓’은 시내 ‘연’, ‘漫’은 어지러울 ‘만’, ‘碧’은 푸를 ‘벽’, ‘寂’은 고요할 ‘적’, ‘幽’는 그윽할 ‘유’, ‘喧’은 시끄러울 ‘훤’, ‘零’은 떨어질 ‘령’, ‘索’은 찾을 ‘색’, ‘敲’는 두드릴 ‘고’, ‘逼’은 핍박할 ‘핍’, ‘寫’는 베낄 ‘사’입니다. 자연 속에 깃들여 사는 소박한 삶. 넉넉하지는 않더라도 욕심 없으니 여유 있고 한가로운 우리네 소시민들의 삶. 부당하게 세금 뜯어내겠다고 악착같이 달려드는 아전들만 아니라면 백성들의 삶은 어디서나 무릉도원일 것이다. 주어진 의무는 다할 테니 제발 선은 넘지 말아다오. 선량한 이 백성들 건드리지 좀 말아다오. 멀쩡하게 잘 살고 있는데 느닷없이 평지풍파 일으켜 괴롭히지 말란 말이다.
시인이 느낀 아픔과 분노는 오늘날 이 시대의 아픔과 분노이기도 합니다. 나라가 국민들의 삶을 걱정해야 할 판에 거꾸로 국민이 나라를 걱정하는 시대가 되어 버렸습니다. 무능한데다 부패하기까지 한 정권이 막돼먹은 정책으로 이리저리 나라를 휘젓지만 않는다면 백성들은 스스로 알아서 자신의 능력 발휘하며 어찌어찌 잘들 살아갈 것입니다. 선생의 마지막 말씀대로 이 시를 고을 역사 기록에 넣어서 자손만대 전했더라면 이 세상이 조금은 달라졌을까요?
※ 《동문선(東文選)》은 삼국시대부터 조선 전기까지 지어진 우수 작품을 모은 선집이며, 이미 번역되어 한국고전종합DB에 올라 있는 우리의 귀한 문화유산입니다. 귀한 내 것을 내 것인 줄 모르고 쓰지 않으면 남의 것이 됩니다. 이 코너는 《동문선》에 실린 작품을 소개하는 자리입니다. 잊을 뻔했던 내 것을 되찾는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편집자 주] 조경구(趙慶九) : 국문학을 전공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에서 한문전적 정리 번역 등의 일을 했으며, 한문 고전의 대중화에 관심을 갖고 <한문에게 말걸기, 다락원, 2005.>, <1등 했는데 왜 훌륭한 사람이 아니에요, 풀빛, 2015.>, <아하, 자연에서 찾은 비밀, 한국고전번역원, 2016.>, <우리가 만난 신비한 소녀, 정인출판사, 2018.> 등의 책을 썼다.
편집 : 양성숙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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