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남편과 시청 앞에서 약속이 있었다. 이왕 나가는 김에 약속 시간보다 1시간 일찍 나가서 덕수궁 가을을 걷기로 했다. 덕수궁과 어우러진 단풍이 얼마나 멋진지 잘 알기 때문이다. 날이 짧아져 어둑어둑했어도 고궁과 함께 어우러진 만추는 비추는 조명과 함께 은은한 빛이 났다.
한참 이리저리 걷고 있는데 노랫소리가 났다. 덕수궁 돌담길에서 거리 공연을 막 시작한 것 같았다. 목소리도 좋고 선곡도 좋아 구경 가기로 했다. 예전에 그 돌담길에서 만난 거리 공연에 즐거운 추억을 가지고 있어서 신이 나서 갔다.
한 거리 공연자가 노래를 하고 있었다. 얼굴은 긴 머리에 가려 볼 수 없었지만 나이가 제법 있는 듯했다. 처음 곡은 잔잔한 곡으로 시작했다가 두 번째는 약간 비트가 있는 잘 모르는 곡으로 넘어갔다. 우리는 공연자 앞 도로 건너편 의자에 앉아서 노래를 들었다. 대부분 관객은 우리같이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벤치에 앉아서 혹은 서서 노래를 들었다. 또 많은 다른 사람들은 노래를 부르건 말건 자신이 가던 길을 갔다.
세 번째 곡인 검정치마의 <기다린 만큼, 더>를 막 시작했는데 어떤 두 남자가 공연자 옆으로 다가왔다. 약 3m 이내로 공연자에게 바짝 붙어 서서 노래를 들었다. 그런데 좀 이상했다. 어떤 관객도 저렇게 가까이 붙어서 노래를 듣지 않는다. 가수가 불편함을 느낄 거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노래를 감상하러 온 관객이 아닌 것 같은 두 분은 두 손을 양 바지 주머니에 넣고 당장 따지듯이 뭔가 할 말이 있어 보였다. 공연자를 배려하지 않는 굉장히 무례한 행동이다.
세 번째 노래가 끝나가자, 정지했던 그분들이 양손을 주머니에서 빼고 공연자 앞으로 갔다. 나는 몸이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그분들이 공연자를 어떻게 하지 않나 싶어 재빨리 길을 건너 나도 공연자 앞으로 갔다. 남편은 놀라서 나를 쫓아 와서 내 옆에 섰다. 그들은 손뼉을 크게 치며 오는 나를 슬쩍 보았다.
그들은 거리 공연자가 노래하는 정면 건물을 가리키며 "지금 저기 2층(?)에서 회의를 하고 있는데 노래 때문에 회의를 진행할 수가 없다. 조용한 노래로 불러주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공연자는 건물을 힐끗 보더니 알았다고 했다. 그들은 자리를 떴다.
공연자는 좀 뜸을 들인 후 다시 노래를 시작했다. 김현식의 <내 사랑 내 곁에>를 더 이상 잔잔할 수 없을 정도로 잔잔하게 불렀다. 평정심을 잃은 것 같지 않았다. 사실 그 시간이면 근처 사무실 업무가 종료되었기에 거리 공연을 시작한 것일 텐데... 한마디 항의도 하지 않고 순순히 요구 사항에 따라주는 공연자가 대단하게 보였다. '아니 이 시간에 회의하면 건물 뒤쪽에서 하든지 해야지 왜 앞에서 하면서 노래를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난리야"라고 생각한 나만 괜히 흥분했던 것 같다.
그다음 노래는 김광석의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였다. 우리는 약속 시간에 맞춰야 해서 김광석 노래를 듣고 자리를 떴다. 외로운 공연자가 마음 편히 거리 공연을 할 수 있기를 기도하면서...
집으로 오면서 가만히 나의 행동을 되돌아봤다. 왜 나는 총알같이 튀어 나갔을까? 나는 그들 두 사람을 형사로 생각했다. 뭔가를 강제하기 위해 나온 사복경찰로 보았다. 그래서 공연자에게 그들이 부당한 요구를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 튀어 나갔을 거다. 그럴 때 공연자의 입장에 서서 따질 준비를 하고 참견쟁이 같이 나간 거다. 얌전히 잘 살고 있는 내가 갑자기 젊었을 때의 '욱' 기질이 다시 발동한 것이다. 그 이유는 확실하다.
11월 9일 집회에서 보인 경찰의 과잉 공권력 집행 때문이다. 한동안 경찰을 따뜻한 마음으로 보았다. 고생한다고 생각했다. 작년 천주교 시국미사 때 사람들을 좁은 영역에 가둬놓고 꼼짝 못 하게 할 때만 해도 일선 경찰이 무슨 죈가…. 시켜서 하는 건데…. 이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11월 9일 집회에서 경찰은 예전 시민을 향해 무소불위의 공권력을 휘두르던 경찰로 돌아간 듯했다.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권한을 맘대로 휘둘러도 된다고 생각하는 경찰로 바뀐 듯했다. 국민의 지팡이가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정권의 지팡이로 다시 퇴행하는 그들에 대한 분노와 안타까움이 나를 민감하게 만들지 않았나 싶다.
남편이 그런다. "이제 그러지 마. 당신 나이도 생각해야지…. " 맞다. 아직도 그놈의 '욱' 기질을 버리지 못하니 나이를 어디로 먹은 걸까? 이젠 무릎이 안 좋아 쪼그리고 앉을 수도 없어서 집회도 안 나가는데…. 순간적인 '욱' 행동으로 구치소에서 밤을 새울 수는 없지. 나도 이젠 할머니인데...
편집 : 김미경 객원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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