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은 꽃 중의 왕이 어떤 꽃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장미? 국화? 백합? 매화? 왕비 간택할 때 지혜로운 어느 후보가 꼽았다는 목화? 하기야 법으로 정할 일도 아닌데 각자 자기 취향에 맞게 택하면 그만이겠지요. 게다가 손바닥에 ‘왕(王)’ 자 쓰고 나타난 자에게 제대로 뜨거운 맛을 본 입장에서 새삼 왕을 뽑는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옛이야기에서 꽃의 왕은 모란입니다. 이는 《삼국사기(三國史記)》 설총(薛聰) 열전(列傳)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설총은 원효대사(元曉大師)와 요석공주(瑤石公主)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 문장에 뛰어났으며 이두(吏讀)를 집대성한 유학자입니다. 이 설총에게 신문왕(神文王)이 ‘심심한데 재미있는 이야기나 하나 해 달라.’고 하자, 설총이 했다는 이야기가 〈풍왕서(諷王書)〉라는 제목으로 《동문선(東文選)》 52권에 실려 있습니다. ‘왕을 풍자하는 글’이란 뜻입니다. 재미있는 이야기나 하나 듣자는데 풍자를 했다니 무신경한 건가요 도발하는 건가요?
신은 이런 얘기를 들었습니다. 옛날에 화왕(花王)이 처음 이곳에 왔을 때, 향기로운 동산에 심어놓고 푸른 장막으로 둘러 보호했더니, 늦은 봄이 되어 화려하게 피었는데 온갖 꽃들을 압도하며 홀로 빼어났습니다. 그러자 가깝고 먼 곳에서 곱디고운 정령과 젊디젊은 꽃들이 모두 달려와 화왕을 뵈려고 하면서 오직 제때 이르지 못할까 두려워하였습니다.
늦봄에 피어나는 화려하고 빼어난 꽃, 화왕은 바로 모란(牧丹)이었습니다. 커다란 꽃송이를 자랑하는, 화투 치는 사람들에게는 육목단으로 알려진 바로 그 꽃입니다. 이 꽃의 왕에게 온갖 꽃들이 인사를 드리러 옵니다. 그런데,
문득 아리따운 여인이 발그레한 얼굴에 하얀 이빨, 예쁜 화장과 옷차림으로 사뿐사뿐 다가와 어여쁘게 앞으로 나와서 아뢰었습니다. “저는 눈처럼 하얀 모래사장을 밟고 거울처럼 맑은 바다를 바라보면서, 봄비에 목욕하며 때를 씻고, 맑은 바람을 쐬며 유유자적 지내니 저의 이름은 장미(薔薇)라 하옵니다. 대왕의 아름다운 덕망을 들었기에 향기로운 장막 안에서 잠자리를 모시고자 하는데 대왕께서는 저를 받아주시겠습니까.”
스스로 장미라고 하였지만 식생으로 볼 때 해당화(海棠花)로 보아야 한다는 의견도 많습니다. 그런데 해당화도 어차피 장미과에 속하는 꽃이니 크게 문제 될 건 아니겠습니다. 화려한 모란 왕에게 아리따운 장미여인이 잠자리를 모시겠다고 스스로 찾아왔습니다. ‘아니, 이런 미인이?’ 솔깃할 수밖에 없는 화왕, 19금 드라마가 탄생하려는 순간입니다.
또 어떤 한 사내가 베옷에 가죽 띠를 두르고 흰 머리에 지팡이를 짚고 절룩거리는 걸음으로 비틀비틀 걸어오더니 아뢰었습니다. “저의 이름은 백두옹(白頭翁)이라 하옵니다. 대왕께서는 좌우에서 공급하는 것이 넉넉하여 기름진 곡식과 고기로 위장을 채우고, 차(茶)와 술로 정신을 맑게 하시지만, 그래도 상자 속에 깊이 간직할 것이 있으니, 비록 좋은 약으로 기운을 북돋울지라도 약석(藥石)으로 독성을 제거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옛말에, ‘비록 좋은 실[絲]과 삼[麻]이 있다 할지라도, 골풀[菅]이나 새끼줄[蒯]도 버리지 말라. 모든 군자는 부족할 때를 대비하지 않음이 없다.’ 하였습니다.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대왕께서도 그렇게 하실 뜻이 있으신지요,”
백두옹은 할미꽃이지만 이야기 흐름상 사나이로 보아야 합니다. 꼭 이렇게 분위기 깨는 조연이 등장하나 봅니다. 아리따운 장미 여인과 눈치 없이 끼어드는 할미꽃 사나이, 기분이 확 상한 모란 임금, 하지만 할미꽃 사나이의 이야기도 그냥 넘길 일은 아닙니다. ‘좋은 것만 먹는다고 좋은 게 아닙니다. 약석도 필요하고 부족할 때를 대비해서 갈대나 새끼줄도 필요한 법입니다. 제가 바로 그런 역할을 하겠습니다. 저를 좌우에 두시지요.’ 이것 참 고민스러운 순간입니다. 어찌 하오리까.
어떤 자가 아뢰기를, “두 사람이 왔는데 누구를 취하고 누구를 버릴까요?” 하니 화왕은, “사내의 말 또한 도리에 맞기는 하지만 아름다운 여인이란 얻기가 어려우니 장차 어찌하면 좋을까.” 하였습니다. [或曰, “二者之來, 何取何捨?” 花王曰, “丈夫之言, 亦有道理, 而佳人難得, 將如之何?”]
어떤 자의 말이 바로 화왕의 마음이자 곧 우리 모두의 마음일 듯합니다. 욕망의 유혹과 올바른 도리 사이에서 갈등하고 고민하다가, 때로는 잘못된 선택을 하고, 그 선택으로 뒤늦게 땅을 치고 후회를 하는.
사내가 아뢰었습니다. “저는 대왕께서 총명하고 의리를 아시는 분이라고 생각해서 왔는데 이제 보니 아니었군요. 임금이 된 분들은 대부분 간사하고 아첨하는 자를 가까이하고, 곧고 올바른 자를 멀리하더군요. 그래서 맹가(孟軻, 맹자)는 불우하게 일생을 마쳤고, 풍당(馮唐)은 말단 벼슬에 묻힌 채 머리가 희어졌습니다. 예로부터 이러했거늘 제가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러자 화왕은 “내가 잘못했다. 내가 잘못했다.” 하고 사과하였습니다.
여기까지가 설총이 한 이야기입니다. 사나이의 실망 앞에 화왕은 바로 사과를 하였답니다. 누구를 선택할까 고민했다는 이유로 사과를 하다니, 진정한 사과가 참으로 드문 오늘날엔 너무도 낯선 모습입니다. 재미있는 얘기나 들을까 했던 신문왕은 이 이야기를 듣고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찌릿’ 설총을 노려봤을까요? ‘이게 술맛 떨어지게.’ 격노했을까요? ‘재미있군.’ 끄덕였을까요? 신문왕은 “그대의 우언(寓言)이 참으로 깊은 뜻이 있으니 글로 써서 임금을 경계하는 말로 삼게 하라.”라고 하셨답니다. 진실이라 믿고 싶지만 잘 믿어지지는 않는, 놀라운 이야기였습니다.
편집 : 조경구 객원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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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문선(東文選)》은 삼국시대부터 조선 전기까지 지어진 우수 작품을 모은 선집이며, 이미 번역되어 한국고전종합DB에 올라 있는 우리의 귀한 문화유산입니다. 귀한 내 것을 내 것인 줄 모르고 쓰지 않으면 남의 것이 됩니다. 이 코너는 《동문선》에 실린 작품을 소개하는 자리입니다. 잊을 뻔했던 내 것을 되찾는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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