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37년 김운철 동이면
상상할 수 없던 시간, 여든 살의 고개를 넘고 다시 미수가 가까워 온다. 지난날을 굳이 되새김질해서 흔적을 남기는 것을 원치 않았는데 사진과 비닐이 접착제처럼 붙어버린 빛바랜 앨범에서 결혼 사진을 꺼내보노라니 이게 웬일인가 눈물이 주르룩 흘러내린다. 알 수 없는 감정의 정체. 그 시절이 그립다는 건지? 나이든 내가 싫다는 건지? 80의 중반이 되어도 감정은 사그라들지 않는다. 어쩌면 지나온 세월 속에서 남모르는 우여곡절을 겪어내느라 속울음 삼키던 그 시절이 울컥하게 만들지 않았을까 유추해볼 뿐이다.
다가오지 않을 것 같은 그 나이를 맞이하려니 숨이 가쁘다. 이제 에너지가 소실되어 거동도 불편하고 휴대폰이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이 문명의 이기에서 한참이나 벗어난 나를 발견한다. 사회의 구성원에서 제외된 그 불편한 심기를 이미 지나왔다. 조용히 하루하루를 보내는 일상에 젖어들어 덤으로 주어진 시간 앞에서 그저 침잠한 하루하루를 보낸다.
■ 미수(米壽)를 앞둔 촌로의 유년시절
1937년 출생한 나의 환경이 뭐 그리 좋았을까마는 타고나기를 팔자가 좋은 사람들은 입성이나 끼니를 해결하는 일이 수월했지만, 그 시대를 살았던 수많은 민초들의 삶은 각혈하듯이 살아내지 않으면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웠다.
결핍투성이였던 유년의 모습을 떠올리자니 폭염을 지나는 개 혓바닥처럼 축 늘어진 고무신 밑창이며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입었던 광목 저고리가 우리 삶을 대변하기도 했다. 나라도 일본에 빼앗긴 상태. 이름마저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으로 불리지 못했던 참혹한 시절에 힘없는 개인의 삶은 그리움으로 남기에는 너무 처연하다.
보리죽으로 공복을 채우고 홍두깨를 밀어 빚어낸 칼국수는 밥상 위에서 양반 노릇을 톡톡히 했다. 지금도 누군가 나에게 뭐 드실래요? 물어보면 칼국수가 생각난다고 할 만큼 나는 칼국수에 길들여졌다. 돌아가신 어머니를 만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가 칼국수를 먹는 날이다.
멸치 서너 마리 던져놓고 호박 오종종 썰어서 끓여주시던 칼국수, 특별한 양념 없이도 어머니의 칼국수는 매번 질리지도 않는 별미 중의 별미였다. 비밀의 열쇠는 손맛이라는 말로 대신할 수 있겠지만 음식이 평생의 기억으로 자리한다는 것이 오묘한 이치처럼 다가온다.
그 입맛을 잊을 수가 없어서 때때로 칼국수로 식사를 대신하기도 한다. 이제 치아도 저작 구실을 제대로 못해 후루룩 넘기는 칼국수가 그만이다.
아침마다 어머니 사진을 보며 ”어머니 잘 주무셨어요?“ 라고 인사를 드린다. 사진 속의 어머니는 아리따운 새댁이요, 인사하는 나는 거동도 제대로 못하는 할아버지가 되었다. 작은 몸으로 광주리에 옷감을 넣어서 이동네 저동네 팔러다니시던 어머니의 뒷 모습은 이 나이가 되어도 잊히지 않는다. 얄궂다. 인간에게 망각이라는 오묘한 의식이 있지만 어째 그 고생하던 어머니의 뒷모습은 아예 박제가 되어 버렸다.
유년의 기억에 자리잡은 나의 모습은 궁핍한 집안의 셋째 아들로 매일이 살얼음판 같았지만 어머니의 잰걸음을 멀찍이 따르며 책임감이 고취되는 시간이었다. 본시 청산면이 고향이라 아버님은 명치리 월명광산에서 광부로 일하셨다. 농사거리가 없어서 광산을 차선책으로 택했지만 일제강점기 굴지의 흑연광산이라 벌이가 나쁘지 않았다. 큰 형님도 광산에 잠시 다니다가 객지로 나가셨다. 할아버지 할머니부터 작은 아버지, 고모, 우리 형제 7남매까지 살림을 맡은 어머니의 고충은 말로 다 할 수가 없었다. 초등학교를 겨우 졸업한 나는 상급학교 진학은 꿈도 못꾸고 생활전선에 나섰다. 유년시절부터 시골 생활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이 강렬해서 나는 무작정 서울행 기차에 몸을 싣고 서울로 올라갔다. 전쟁 직후라 세상은 혼돈의 시대를 지나고 있었지만 그래도 산 사람은 산다고 나도 서울에서 하루하루 몸을 의지하면서 미군 구두를 닦아주는 슈샤인보이로 10대의 후반을 달리고 있었다. 폼나게 살고 싶어서 가진 것은 없어도 머리에 포마드를 바르고 명동거리를 배회하기도 했다. 운이 좋았는지 거품이 잔뜩 들었지만 사람들은 나를 촌사람 취급하지 않아 서울에서도 나는 제법 무시당하지 않고 살 수 있었다.
■ 혹독했던 청춘의 날들을 살아내는 방법
학교 공부는 못했지만 슈샤인보이를 하면서 꼬부랑 말 한자라도 더 배우려고 온갖 손짓 발짓 해가면서 한마디라도 던져보려고 무진장 애를썼다.
조선일보 신문을 한 글자도 놓치지 않고 읽어냈고 최욱이나 김동리 소설도 누렁 갱지에 실린 글자들을 꼼꼼이 찾아 읽었다. 배우지 못한 애석함을 활자를 통해서 채우고 싶은 나의 간절한 욕구가 서울에서도 기죽지 않고 살 수 있는 방편이 되었다. 꼭 서울 아가씨와 결혼하겠다는 열망도 사그라들지 않았다. 잔뜩 멋을 부리고 주말이면 명동거리에 나갔다.
동년배들과 원효로에서 셋방살이를 하면서 청계천 공장에 다녔다. 돈도 모으고 멋도 부리면서 폼잡는 청년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셋방살이하던 주인집의 둘째딸을 눈여겨 보고 있었는데 어느날 동네 입구에서 물방울 무늬 원피스를 입고 걸어오는 그녀와 마주쳤다. 나는 기회는 이때다 싶어 구판장에서 아이스케키 하나를 사서 그녀에게 건넸다. 평소에 도도한 척 하더니 그날은 순순이 내가 건넨 아이스케키를 먹고 고맙다는 미소까지 덤으로 주었다. 그날 이후로 우리는 인사를 나누고 차차 정이 들기 시작했다. 집주인도 내가 비록 가진 것은 없지만 직장생활 잘하고 반듯한 청년이라고 생각하셨는지 우리 교제를 반대하지 않으셨다.
신문이나 책을 통해서 주워들은 지식들이 나의 초라함을 포장해주고 있었다. 아내의 마음을 얻고 우리는 고향집에 인사하러 내려갔더니 서울 아가씨 되바라졌다고 다들 반대를 하셨다. 아내가 머리를 고대기로 한껏 부풀리고 내 마음을 사로 잡았던 물방울 무늬 원피스를 입고 동네에 나타났으니 1957년의 시골마을은 술렁댈 수밖에 없었다. 일가 친척들까지 다 모여서 아내를 구경하듯이 샅샅이 훑어보았다. 어른들은 뭐가 그리 마음에 안 드셨을까? 세련된 입성이 오히려 평가절하되는 시절이었다. 어이없었지만 서울에 계셨던 큰 형님 모시고 처가 식구들 모인자리에서 우리는 조촐한 결혼식을 했다. 하지만 나는 사모관대에 연지곤지 찍고 결혼하고 싶은 생각이 없어서 나는 양복, 아내는 하얀 면사포를 쓰고 신식 결혼식을 올렸다.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을 거라는 결심을 하고 호래자식처럼 본가 어른들의 부재 속에 결혼식을 올렸는데 나는 결국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야 했다. 우리가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의 시계가 있다. 되돌릴 수 없고 그저 태엽 감기듯이 우리는 이동하지 않으면 올가미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그래서 산다는 건 적당히 운명에 순응할 때 오히려 삶이 주는 고통에서 숨을 쉴 수가 있다. 안간힘을 쓸수록 인생이 더 고달퍼지는 일들을 우리는 수없이 보아왔다.
■ 다시 고향으로, 포부 대신 어머니 곁에 남다
아버님 돌아가시고 큰형님도 서울에서 정착했는데 어머님이 편찮으셨다. 젊은 날부터 대식솔 건사하고 살림에 보태시느라 매일 광주리 이고 이동네 저동네 다니던 그 혹독한 시간이 몸으로 아우성을 치기 시작했다. 어릴 때부터 유난히 어머니에 대한 정이 많던 나는 서울생활을 과감히 포기하고 아내와 5남매를 데리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사정이 있어 누님 계신 동이면으로 이사를 하고 아내는 어머니를 6년간 모시면서 서울 아가씨 버릇없다는 오해를 불식시켰다. 어머니의 병수발을 하면서 대소변을 다 받아내는 지경까지 이르렀지만 아내는 얼굴 한 번 찡그리지 않았다. 그저 어머니를 진정으로 가엾게 여기는 마음을 읽을 수 있어서 나는 아내에게 고맙고 미안한 마음밖에 갖지 못했다.
옥천에서 먹고 살 거리를 찾아야 해서 동아건설의 경부고속도로 건설 현장에서 일을 하면서 가정을 꾸려나갔다. 10여 년 고속도로건설현장에서 일하고 다시 국제기계에서 오랫동안 일을 했다. 옥천의 향토기업인 국제종합기계는 북한에 농기계 보급사업을 펼치기도 했다. 충북도와 북한의 첫 농업교류사업에 농기계 지원을 맡아 견인차 역할을 했다. 북한의 낙후된 농업근대화와 통일 후 농업기계 미래시장 확보 차원에서 농기계 대북사업을 추진했었다. 국내 민간단체를 통해 지난 2005년 금강산 삼일포 농장에 트랙터 14대, 경운기 70대 총 84대(5억원)를 첫 공급했다. 하지만 이제는 북한과 소통하던 모든 통로들이 다 폭파되고 연락이 단절되었다니 답답한 노릇이다. 휴전이 되고 70년이 훨씬 지났는데도 우리는 계속 답보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으니 오래전 우리가 정성들였던 모든 과정이 물거품이 될까 우려도 많다. 돌이켜보니 내가 지나온 길이 우리의 역사가 거쳐온 길과 크게 다르지 않다. 결국 나는 무명인이지만 나같은 무명인들이 모여서 역사는 이어오고 있다.
■ 인생 경작의 8할은 아내 덕분
미수가 가까운 우리 나이에 배불리 먹었던 기억이 있을 리 만무하다. 허기진 배를 움켜잡는 날들이 빛바랜 기억 속에 고스란히 담겼다. 하루 두 끼만 먹어도 호사를 누리던 시절이다. 셋방살이하던 집주인의 딸로 만난 아내, 배우자를 만나는 운명은 다분히 우리 의지의 경계를 넘어서는 대서사다. 주인집 딸로 만나 천생연분이 되는 운명은 참으로 신비하고 운명 앞에 숙연해질 수밖에 없다.
세 들어살던 집주인인 아내의 가족들은 저녁나절이면 평상에 둘러앉아 칼국수를 끓여 겸상을 했다. 인생의 과도기를 지나던 청년에게 도란도란 칼국수를 끓여 먹던 주인집의 저녁 정취는 그리움을 불러왔다. 처음 본 아내는 귀여운 소녀였는데 큰 애기로 성장하면서 맵씨가 좋고 잔잔한 품성이 마음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인생은 매 순간 선택하고 결단해야 한다. 가진 것 없었지만 서울에서 큰 포부가 있었고 배운 거 없었지만 매일 신문을 한 글자도 놓치지 않고 읽고 소설책도 종이에 구멍날 만큼 읽어댔다. 환경을 극복하려는 내 노력이 가상했던지 나는 아내에게 용기 내어 사랑을 고백했고 아내는 내 마음을 받아주었다. 당시의 내 눈빛이 뭔가 해낼 줄 알았다고 속았다고 웃으면서 이야기한 아내가 고맙지만 지금은 내 곁을 떠난 지 오래다.
내 인생의 전부 같았던 아내도 10년 전에 폐암으로 먼저 세상을 등졌다. 서울 여자가 시골에 내려와서 시어머니 모시면서 고생만 하다가 5남매 잘 키워놓고 이제 호강 좀 하려나 기대했건만 그새를 못 참고 먼저 가버렸다. 나도 젊은 시절부터 멋쟁이 소리 듣던 사람이라 건강했는데 아내가 먼저 떠나고 한해가 다르게 기력이 떨어지고 있다. 이제 거동도 어려워서 5남매가 수시로 나를 찾거나 매년 12월부터 다음 해 2월까지는 청주 딸네 집에서 기거를 한다. 한겨울 추운 날씨에 혼자서 움직이다 덜커덕 넘어지기라도 하면 큰일이라 아이들이 주선해서 해마다 막내 딸 집에서 겨울을 보낸다. 막내한테 짐이 안되려고 애는 쓰지만 이제 힘없는 노인이 되고 말았다. 내 기억으로 1990년대 후반에 동이면의 중학교도 폐교되었는데 우리가 자취를 감추어가듯 우리를 둘러싼 환경들도 흔적이 사라지고 있다. 이제 오래 사는 것이 마냥 축복으로만 바라봐지지 않은 세상을 만났으니 미수가 다가오는 이 나이가 염려도 같이 동반하고 있다. 양 어깨의 짐은 내려놓았지만 남은 날들에 대한 예의가 우리를 다시 조심스럽게 한다.
※ 이 기사는 옥천신문(http://www.okinews.com)과 제휴한 기사입니다.
편집 : 하성환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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