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하얼빈]은 일본 제국주의 수괴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는 내용을 시대 배경으로 한다. 통감부 초대 통감 이후에도 조선을 지배하려는 야욕을 매우 사실적으로 드러낸 영화다. 러시아가 만주 하얼빈을 지배하듯이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로 삼으려는 저의를 노골화한 작품이다. 그런 점에서 안중근의 이토 처단은 동양 평화를 실천한 의로운 행위이다. 법정에서 토로한 이토를 처단한 열다섯 가지 이유 가운데 열두 번째 이유, 바로 동양의 평화를 깨뜨린 죄를 단죄한 행위다.
그렇지만 일본 극우세력이 편찬한 검정교과서에는 안중근을 정치 건달로, 이토를 존경하는 인물로 기술하고 있다. 일본이 제국주의로 치닫던 시기, 제국 헌법을 기초하는 등 내각 총리대신을 네 번이나 역임하면서 일본의 근대화를 설계한 인물이 이토 히로부미이기 때문이다.
영화 [하얼빈]을 보면서 가슴에 박힌 대사가 있다. 일제 밀정으로 변절한 옛 동지 조우진(김상현 역)에 대해 박정민(우덕순 역)이 준열히 꾸짖는 장면이 단연 압권이다.
밀정으로 변절한 자가 이렇게 변명한다.
“우리가 치열하게 싸운다고 독립이 되는가?” “나는 정말 살고 싶다.”
그는 독립군으로 맹활약하다 체포된 뒤 극심한 고문과 악형, 그리고 굶주림 등 극한의 고통에 내몰린다. 그때 일본군 모리 중좌는 자신이 먹던 스테이크 한 점을 찢어서 던져준다. 그러자 고깃덩이를 손으로 집어 허겁지겁 먹는다. 철저히 인간의 자존감을 짓밟는 슬픈 장면이다. 그 장면을 보는 순간 “너는 나의 개야! 조선은 제국 일본이 시키는 대로 해야 돼!”라는 이미지가 떠올랐다.
실제로 일제강점기 밀정들은 첩보를 제공한 뒤 고작 푼돈 2원~5원을 손에 쥐었다. 현재 시세로 2만~5만 원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영화 [하얼빈]에서도 안중근 부대가 일제와 교전한 뒤 잠시 머물던 골짜기 병영 위치를 밀정이 첩보를 제공한다. 일본군에게 독립군 소재지를 알려주고 푼돈을 받으며 고개 숙여 인사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결국 식량을 구하러 나갔다가 돌아온 안중근은 자신이 지휘하던 부대가 괴멸된 장면을 목격한다. 곳곳에 동지들 시신이 널브러진 참혹한 현장에서 안중근은 오열하며 극심한 충격에 휩싸인다.
일제강점기 밀정의 죄악이 얼마나 큰지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화림 회고록>(2015)엔 김구와 이화림이 합세해 밀정을 처단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10대 청소년인 밀정도 예외는 아니었다. 백범에게 죽임을 면할 순 없었다. 의열단도, 정의부 사령관 오동진 장군도 밀정은 가차없이 처단했다. 이승만이 친일 경찰을 동원해 해체한 반민특위 활동 당시에도 마찬가지다. 비록 활동한 기간은 매우 짧았지만 1949년 1월 8일부터 8월 31일까지 반민특위가 체포한 반민족행위 피의자 547명 가운데엔 친일 경찰과 밀정이 224명으로 친일 경찰이 압도적 1위(195명)이고 밀정도 아홉 번째(29명)로 많았다.((이강수. 『반민특위 연구』. 229~230쪽 참조)
박정민(우덕순 역)은 한때 동지였던 변절자 조우진(김상현 역)을 처단하려다 살고 싶다고 절규하는 그에게 이렇게 꾸짖는다.
“우리가 지금 사는 것은 우리 대신 죽어간 동지들 덕분에 지금 더 사는 것이오.”
그 대사는 그대로 내 가슴에 박혔다. 마치 노벨문학상을 받은 한강 작가가 “죽은 자가 산 자를 살린다”고 말한 대목이 떠올랐다. 그 명대사는 우리 인간의 삶이 어떻게 역사적인 삶과 연관돼 있는지를 또렷하게 보여준다.
영화 [하얼빈]은 시작부터 끝까지 국뽕과 신파적 요소를 배제한 채,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한 작품이다. 영화 첫 장면인 일본군과의 전투 장면은 참혹하기 그지없다. 살을 에는 혹한의 추위 속에서, 그리고 꽁꽁 언 두만강을 건너면서 오직 독립을 향한 강렬한 의지 하나로 버티는 장면들이 그러하다. 뒤늦게 약속 장소로 살아 돌아온 동지 현빈(안중근 역)을 밀정으로 의심하는 장면 또한 매우 사실적이다.
순간, 님웨일즈의 『아리랑』에 나오는 그 장면이 떠올랐다. 일경에 체포됐다 풀려난 항일혁명가 김산을 혁명동지가 밀정으로 강하게 의심하는 장면이 그렇다. 김산은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어했고 결국 자신을 의심하던 동지를 찾아가 책상 위에 칼을 꽂은 채 담판하며 결백을 증명한다. 그만큼 엄혹한 시절, 독립운동은 목숨을 걸어야 했다.
영화 [하얼빈]은 시작부터 끝까지 인간 안중근의 휴머니즘이 돋보인 작품이다. 포로가 된 일본군을 국제공법에 따라 살려주는 장면이나 변절한 동지를 즉결 처단하지 않고 재기할 기회를 권고하는 대사가 그러하다. 영화 중반 일본군에 체포된 항일 투사에게 일본군 모리 중좌가 권총을 쏘면서 안중근의 소재를 캐묻자, 항일 투사가 이렇게 일갈하는 장면도 울림이 컸다.
“천박한 인간인 네가 어떻게 고결한 안중근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그는 함경북도 신아산 전투(1908) 직후 일본군 포로 석방 문제로 안중근과 갈등을 빚고 안중근을 한때 밀정으로 오해했던 인물이다. 총살당하는 그 순간에도 뜨거운 동지애가 아니면 나올 수 없는 명대사다.
실제로 안중근은 1심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항소하지 않는다.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 또한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지 말고 대의를 위해 죽음을 받아들이는 게 어미에 대한 효도”라고 편지로 전한다. 그는 옥중에서 자신의 전기 ‘안응칠 전’을 쓰고 ‘동양평화론’을 집필하던 중 약속을 저버린 일제의 계략으로 사형 선고를 받고 한 달여 만에 순국한다.
영화 [하얼빈]은 극한 상황에서도 휴머니즘을 잃지 않은 안중근의 장중한 서사가 돋보이는 보기 드문 수작이다. 솔직히 1,000만 관객을 넘겼으면 하는 마음이다. MBC 여명의 눈동자(1991~1992)를 통해 학교에서 배우지 못한 ‘정신대’를, 그리고 ‘일본군 위안부’의 참상을 접했듯이, SBS 모래시계(1995)를 통해 뒤집힌 5월 광주항쟁의 진실을 조금은 접했듯이, 실미도(2003)를 통해 북파공작원(북파 간첩)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온 국민이 알았듯이, 교실 역사 수업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드라마나 영화는 전 국민을 상대로 역사의식을 고취했다. 마찬가지로 영화 [하얼빈]을 통해 건강한 역사의식을 공유했으면 하는 마음이다.
더불어 문재인 정부 시절 추진하려다 진척이 없었던 뤼순 감옥에서 순국한 안중근 의사 유해를 발굴해 국립묘지로 모셨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마침 2025년 올해는 해방된 지 80주년이고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 지 115주기 되는 해이지 않은가! 문재인 정부 시절 홍범도 장군 유해를 모셔왔듯이 오는 봄날 탄생할 4기 민주 정부에선 반드시 추진해야 하리라!
편집 : 하성환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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