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들어 아침에 집어 든 한겨레 지면에서 눈에 확 들어온 기사는 ‘탐사기획 헌 옷 추적기: 수거함에 버린 옷의 행방’이다. 이제 나는 헌 옷을 수거함에 넣지 않기로 했다.
옷의 대량 생산·소비는 곧 헌 옷의 대량 생산을 의미한다. 그 끝은 헌 옷의 대량 소각·매립이다. 대규모 공기오염과 토양오염, 수질오염으로 이어지리라. 어찌 옷만 그러하겠는가. 자동차, 생수병, 각종 플라스틱과 비닐 등도 그러하리라. 그 기회비용은 어마어마하다. 우리는 파란 하늘을 잃었다.
‘창공에 빛난 별 물 위에 어리어….’ 이탈리아 민요 ‘산타루치아’(Santa Lucia)의 우리말 가사다. 시골 고향 가는 길에 보이는 하늘은 대낮인데도 희뿌옇다. 밤이라고 달라질 리 만무하다. 이제 ‘창공에 빛난 별’은 ‘회공(灰空)에 희뿌연 별’로 바뀌었다.
‘하늘은 파랗게 구름은 하얗게 실바람도 불어와 부풀은 내 마음….’ 1972년에 나온 가요 ‘아름다운 강산’(작사·작곡 신중현)의 첫 부분이다. 50여년 전만 해도 ‘하늘은 파랗게’라고 읊을 만했던 시절인가 보다. 우리나라에서 ‘자가용 붐’이 불기 한참 전이었으니 그럴 법하다. 이제 ‘하늘은 희뿌옇게’라고 해야 오늘날 하늘의 빛깔과 어울리겠다.
그저 희뿌옇다면 다행일 텐데, 그렇지 않다. 공기 중에서 삭은 플라스틱이나 비닐이 미세 입자로 바뀌어 하늘을 뒤덮는다. 이른바 미세 먼지다. 태아에게 영양을 공급하는 태반에서 미세 플라스틱이 발견됐다는 연구도 나왔다. 지난해 2월 언론 보도다. 한마디로 충격이다.
아침 일찍 출근하는 차량 행렬로 도로는 몸살이 날 지경이다. 대형 아파트 단지의 드넓은 주차장은 차량이 늘면서 어느새 비좁은 공간으로 바뀌었다. 저렇게 많은 차량이 뿜어내는 배기가스는 얼마나 많을까. 저 차들은 어디서 폐기될까. 자동차도 대량 생산·소비되니 종국에는 대량 폐기물로 변하리라.
적어도 하루에 한번 집의 거실 바닥과 방바닥을 쓴다. 내가 사는 공간은 성냥갑 같은지라 마당이 없는데도 초등학생 시절에 물 뿌리고 마당을 쓸던 기분을 떠올린다. 그때는 마당이나 방바닥을 쓸다가 나온 잡동사니를 마당 한쪽에 똬리를 튼 두엄에 버렸다. 버린다기보다는 두엄에 넣어 발효 과정을 거쳐 퇴비로 만드는 일이었다. 심지어 똥도 거름의 원재료였다. 농경 문화가 밴 시골의 일상생활은 재순환체계가 작동하는 삶이었다. 폐기물은 거의 없었다. 지금은 어떠한가. 도시는 물론이고 시골도 일상생활은 쓰레기나 폐기물을 대량으로 생산하고 배출하는 활동이다.
대량 생산물이 시장에서 팔리려면 대중(mass)이 사줘야 한다. 대중이 대량 소비(mass consumption)를 해야 한다. 만일 대량 소비가 뒤따르지 않는다면 공장에는 재고가 계속 쌓일 거다. 이에 대한 파국적 해결 과정이 공황이다. 1929년 ‘대공황’이 그 예다.
‘소비는 미덕이다.’ 대량 생산 시대에 필요한 언설이다. 소비의 상대 개념인 저축은 미덕으로 여기기가 어렵다. 어떤 나라의 모든 경제주체가 일정 기간 소비를 줄이고 저축을 늘리면, 생산물에 대한 총지출이 줄어들어 국민총생산과 국민소득은 줄어든다. 이른바 ‘절약의 역설’이다.
경제 현상을 설명하는 위와 같은 논리에 함몰되어 암묵적으로 소비가 미덕인 줄로 여기는 경제 활동을 지속하는 한, 장차 우리는 회공에 희뿌연 별조차도 보기 힘들겠다는 두려운 생각이 밀려온다. 한겨레에서 ‘헌 옷 추적기’를 확대·심화하길 기대한다. ‘헌 옷 추적기’에서 ‘옷’ 대신에 들어갈 만한 것들은 비닐, 플라스틱, 책, 자동차, 집, 아파트, 마을, 학교 등이다. 옛 시골처럼 재순환체계가 작동하는 삶에 대한 보도도 기대한다.
대한민국 107년 1월 26일
*이 글은 <한겨레>(2025.01.26.)에 실린 칼럼입니다.
원문 보기: 헌 옷과 대량생산의 폐해 [열린편집위원의 눈]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179831.html
*관련기사: [인터렉티브] 한국 수거함에 넣은 옷, 인도·타이에서 쓰레기로
https://www.hani.co.kr/arti/society/environment/1176468.html
편집 : 형광석 편집위원
한겨레신문 주주 되기
한겨레:온 필진 되기
한겨레:온에 기사 올리는 요령


트럼프는 미국이 파리 협정에서 탈퇴할 것이라고 떠벌리고, 전기 자동차와 풍력 발전에 반대하면서 화석 연료를 부각하는데, ‘한국의 트럼프’는 어린이집 유아들도 아는 ‘아나바다’ 뜻도 모르는 위인입니다.
뭘 기대할까요? 자본은 탐욕을 부추기고 탐욕은 과소비를 조장하고 천박한 자본은 다시 과잉생산을 자행하는데 정치적 모리배가 그 뒷배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극단적 이기주의자끼리 의기투합한 악의 고리를 끊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는 땅의 일부분이며, 땅은 우리의 일부분이다.”라는 시애틀 추장의 편지를 되새기면서, 우리가 먹고 입고 소비하는 삶 자체가 자연 친화적일 수 없음을 기억합시다. 어떤 면에서 '나' 자신이 ‘분진’을 유발하는 ‘오염원’임을 잊지 맙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