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정우열 주주통신원

지금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에서는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박물관이 수집한 아시아 문화재를 전시하는 '동양을 수집하다' 특별전 (2014. 10. 28 ~ 2015. 01. 11)이 열리고 있다.

19세기 말 서구 강국들이 아시아로 진출하면서 이 지역의 문화재는 그들의 이국취미를 충족시켜주는 볼거리가 되었다. 고고학 조사와 더불어 도굴이 만연했고, 골동품 시장의 번영 속에서 일부는 '미술품' 이라는 새로운 범주로 편입되어 감상과 연구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근대 국가의 형성과 더불어 설립된 박물관은 그러한 움직임의 중심에 있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그와 같은 시대의 흐름에 주체가 될 수 없었다. 일본은 스스로를 '동양 유일의 문명국'으로 생각했고, '낙후된' 동양을 근대화의 세계로 인도할 적임자라 자부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시선으로 아시아 각국의 역사를 해석하고 그것을 박물관에 담았다.

일제는 1915년 12월에 우리나라에 조선총독부박물관을 개관하고 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소개한다는 명목아래 우리나라에서 발굴된 유물 및 문화재 뿐 아니라 중국, 중앙아시아, 일본 등 동아시아 각지의 문화재를 수집하여 전시했다. 대한제국은 1909년 창경궁에 '재실박물관'을 개관 하였는데, 1910년 국권을 상실함에 따라 '이왕가박물관'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1908년부터 개관을 준비한 이왕가 박물관은 고미술품을 비롯해 중국과 일본의 문화재도 함께 구입했다.

1933년 덕수궁을 공원으로 개방하면서 석조전을 전시관으로 개조한 이왕가의 사무를 관장했던 이왕직은 여기에 미술품을 전시했다. 1938년에는 덕수궁 신관(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미술관)으로 이왕가 박물관의 소장품을 이전하고 기존의 석조전 전시와 통합하여 '이왕가 미술관'을 설립하였다.

1945년 광복 후 대한민국 정부는 조선총독부박물관의 시설 및 소장품을 접수하여 '국립박물관'이라 명칭을 바꾸고 이왕가 박물관의 소장품 및 덕수궁 이왕가 미술관의 미술품 등을 여기에 보관했다.

따라서 국립중앙박물관의 이번 특별전은 이처럼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박물관이 수장한 소장품과 이왕가 박물관 및 미술관에 수장되었던 수장품을 전시하여 당시 일제가 어떻게 어떤 목적으로 동아시아 문화재를 수집하였나하는 과정과 역사적 상황을 조명해 보는 자리다.

역사탐방 모임인 경동14 '동우회'는 11월 탐방지를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정하고 지난 26일 이 특별전을 관람했다. 오후 2시30분, 우리는 전시관 앞으로 모였다. 해설사의 안내에 따라 우선 입구 양면의 벽화 설명을 들었다. 벽에는 고운 색채의 그림이 벽 양쪽으로 그려져 있다. 북쪽 벽에는 '선녀와 나무꾼', 남쪽 벽에는 '어부와 나무꾼'의 그림이 그려저 있었다. 선녀와 나무꾼은 우리나라 전설에 나오는 이야기고 어부와 나무꾼은 일본 전설에 나오는 이야기다. 어딘지 모티브가 같다는 느낌이 온다. 이 그림은 원래 조선총독부 건물의 중앙홀 천정에 걸었던 그림이다.

조선과 일본에 공동으로 존재하는 우의설화 '선녀와 나무꾼'을 소재로 북벽에는 금강산을 배경으로 한 조선의 이야기를, 남벽에는 미호를 배경으로 한 일본의 이야기를 걸었다고 한다. 와다 산조(1883-1967)의 그림이라 한다. 와다 산조는 색에 대한 연구를 한 색채학의 권위자로 1956년에 의상디자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허나 해설사는 왜 이그림이 그려져 총독부 중앙홀에 걸었으며 왜 지금 이 전시실 입구에 설치했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다.

사실 이 그림은 조선인과 일본인의 동질성을 강조하여 신민통치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그려진 그림이다. 구 조선총독부 건물은 광복 이후 미군청 청사, 국립중앙박물관 등으로 사용하다가 광복 50주년을 맞이하여 철거되었다. 당시 국립중앙박물관은 이 벽화를 '민족수난사의 교훈'으로 삼고자 해체하여 보관했다가 이번 전시회에 내놓은 것이다.

그런데 해설사는 이러한 주최측의 의도를 관람객들에게 피력하지 못하고 다만 그림에 대한 개설과 저자에 대한 설명만 하고 있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전시실로 들어가니 전시실은 크게 4개의 섹션으로 나누어 전시되었다.

제1섹션은 '동아시아의 고대'란 주제로 조선총독부박물관 소장품인 중국 한대(기원전 202-기원후 206년) 유물과 평안남도에서 출토된 낙랑유물, 그리고 일본 토기와 한반도 남부에서 출토된 가야토기가 함께 전시되어 양쪽 유물을 비교하여 관람하게 하였다. 이 전시실은 현재 학계에서 쟁점이 되고 있는 '한사군의 위치는 어디였는가?', '임나일본부는 실제로 있었는가?'하는 주제와 관련돼 매우 예민한 전시실이다.

1918년 3월 도교제국대학 건축학과 조교수이자 조선총독부박물관 협의원 세키노 다다시(1867-1935)는 베이징의 유리창에서 조선총독부박물관에 보낼 골동품을 살펴보고 있었다. 그는 유독 한대 문화재에 주목했다. 왜일까? 그것은 그가 1910년부터 1914년 까지 수년간 걸쳐 발굴한 대동강강변의 유물들이 한대의 유물과 같다는 것을 방증함으로서 '한사군 한반도설'을 뒷받침하려는 의도에서였다.

오늘 여기 전시된 한대 유물들은 당시 세키노가 유리창에서 구입한 것이며 낙랑유물이라는 것 역시 당시 대동강 주변에서 발굴한 유물이다. 이로써 한국고대사에서 세키노 한사군 한반도설은 지금까지 굳게 자리를 잡고 있다. 이번 전시회도 어떻게 보면 세키노의 이 한사군 한반도설을 재확인하는 자리 같아 마음이 무거웠다. 마치 박근혜 정부의 역사관을 보는 듯 했다.

이에 대해 민족사학자들은 이 세키노의 한사군 한반도설을 한반도 침략을 위한 조작된 식민사학이라 강하게 비판하며 역사투쟁을 불사하고 있다. 또한 일본에서 발굴된 유물과 가야 유물이 같다하여 임나일본부를 주장하는 일본 사학자들에 대해서도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불신하고 식민사관을 구축하려는 파렴치한 망동이라고 비판한다. 그런데 이러한 예리한 문제를 담고 있는 사료를 전시하면서 왜, 전문 학예사도 아닌 일반 해설사(봉사자)로 하여금 해설케 하는지 주최측의 의도를 알 수 없다.

이 전시실의 이 두 주제는 일제가 '타율적 조선사'를 만드는데 근간이 되어 조선을 식민지로 하는데 크게 이바지했다. 우리에게는 부끄러운 수난사의 현장이다. 이 전시장을 보면서 이 뼈아픈 수난사를 통감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국립박물관이 왜, 이런 전시회를 여는지 알 수가 없다.

발걸음을 제2섹션으로 옮겼다. 이 전시실은 조선총독부박물관 경복궁 수정전에 수장되었던 수장품을 전시했다. 이 전시품들은 1916년 5월 일본의 광산재벌 구히라 후시노스케(1869-1965)가 기증한 중앙아시아의 문화재다. 그것은 원래 교토 니시혼간사의 주지 오타니 고즈이(1876-1948)가 탐험대를 파견하여 수집한 것들이다.

조선총독부박물관은 1916년 9월 이 기증품을 경복궁 수정전에서 전시하고 일반에게 공개하였으며 책자 및 사진엽서 등을 통해 시대적으로 선전했다. 이는 조선총독부의 문화적 치적을 대내외적으로 과시하는 작업이기도 하였다. 기증자 구하라는 야마구치현 출신으로 당시 총독이었던 데라우치 마사타케(1852-1919)와 고향이 같은 사람이다. 구하라 광산은 일본에서의 성공을 바탕으로 1915년에는 평안남도 진남포에 제련소를 건설하는 등 조선까지 사업을 확장했다. 그의 기증 이면에는 조선 내에서 사업상 편의를 제공받고자 했던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전시실에서는 8-9세기 경 투루판 무르투크의 '여인'상과 아스타니 고분에서 출토된 '말을 탄 여인'이 눈길을 끈다. 여인은 금방이라도 웃음을 터뜨릴듯한 인자한 상이다. 어딘지 우리의 여인을 보는듯해 낯설지 않다. 말을 탄 여인을 통해 유목민의 기상을 엿볼 수 있었다.

제3 전시실은 '불교조각'실로 이왕가 박물관 창경궁 명전전에 소장되어 있던 수장품을 전시한 공간이다. 1916년 이왕가박물관은 오카다 아사타로에게서 중국의 불비상을 구입했다. 이 불비상은 석굴암 모형 등과 함께 창경궁 명전전에서 전시되었다.

1870년대 일본에서 '미술'이라는 신조어가 등장하고 일본마술사가 정립되면서 아시아를 대표하는 사상인 불교를 시각적으로 형상화한 불상이 동양을 대표하는 '조각'으로 새롭게 주목을 받았다. 일본은 자신들의 역사에 비추어 불교미술을 문화 발전의 척도로 생각했다. 그리고 이 기준으로 조선시대를 문화의 침체기로 바라보았다.

이와 같은 정치적, 문화적 배경 아래 불상은 박물관의 주요한 수집품으로 자리 잡았다. 이 전시실에는 9개의 불비상과 반가유상, 보살상 등이 전시 되었다. 이 불상들은 주로 북제시대의 것으로 19세기 철도를 개설하는 과정에서 출토된 유물들이다. 특히 북제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반가사유상'과 '불비상'이 돋보인다. 우리는 이 비를 뒤로하고 다음 전시실로 옮겼다.

이 전시실은 마지막 전시실로 이왕가미술관 덕수궁 석조전 소장품인 일본근대미술품을 전시했다. 고종이 승하한 뒤 오랫동안 주인 없는 궁궐이었던 덕수궁은 1937년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덕수궁 내 대표적인 건물인 석조전은 미술관으로 새롭게 단장되어 당시 일본미술을 대표하는 거장들의 작품을 전시하였다.

석조전에 전시된 일본미술은 일본의 관전 즉 국가에서 주관한 미술전람회의 심사위원이나 수상작가의 작품이 중심이 되었다. 그들은 당시 일본미술을 대표하는 작가들이었으며, 조선미술전람회에도 심사위원 및 초청작가로 참여했기 때문에 조선의 미술계에서도 상당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 덕수궁의 일본미술 전시는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고, 조선에 일본미술의 영향을 확산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전시실에서는 후지다 쓰구하루(1886-1968)의 '고양이', 히나고 지쓰조(1892-1945)의 '정찰', 쓰다시노부의 '북해도약'이 눈길을 끌었다. 덕수궁 석조전 앞 분수대의 물개조각이 바로 쓰시다노부의 작품이다.

그뒤 만주사변(1931)과 중일전쟁(1937-1945)의 발발로 이른바 전시체제로 들어감에 따라 일본과 조선의 미술은 군국주의를 고무하는 역할을 수행해야 했고, 이왕가 미술관에서도 이러한 주제를 담은 작품을 구입하여 전시하였다. 라쿠 호쿠의 '낙북의 가을', 니시아마 스이쇼의 '쾌청한 가을 날', 미쓰바이시 게이게쓰의 '대동아 전쟁 동원' 등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마지막 제4섹션을 나와 용화수 아래에서 사유하고 있는 북제시대의 '반가사유상' 앞에 섰다. 깊은 사색에 빠져 있는 관음보살의 상이 평화롭고 행복하다.

나는 전시실을 나오면서 왠지 마음이 씁쓸했다. 그건 언젠가 유럽을 관광하면서 파리의 루브르박물관이나 런던의 대영박물관에 들렸을 때 고대 프랑스나 고대 영국의 유물 보다 대부분 아랍이나 이집트, 그리고 아시아의 유물을 보았던 기억을 떠 올렸기 때문이다. 아시아에서는 유일하게 일본이 제국주의 고고학에 앞장선 나라다. 일본은 조선총독부박물관을 통하여 우리의 역사를 왜곡하는 보루로 삼았다. 따라서 오늘 전시는 당시 일제의 만행을 역사적으로 살피는 자리였다.

국토가 몸이라면 역사는 혼이다. 국토를 잃고도 역사를 잃지 않은 민족은 언젠가 다시 국토를 회복 할 수 있다. 허나 국토를 가지고 있으면서 역사를 잃은 민족은 머지않아 국토를 잃는다. 국립박물관의 존재 이유는 바로 국민들에게 민족혼인 고고학적 유물이나 자료를 통해 우리의 역사를 일깨워주는 데 있다. 그럼에도 오늘 이 전시회를 보면서 아쉬움이 남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정우열  jwy-hanso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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