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은 벼슬아치 갑(甲)ㆍ을(乙) 두 사람이 당대에 명망(名望)이 있었다. 임금의 총애를 받던 애첩이 그들과 친교를 맺어 자기 당파로 만들고자 몰래 사람을 시켜 두 사람에게 접근하였다. 이에 갑은 단호한 말로 거절하였고 을은 부드러운 말로 사양하였다. 이 소문을 전해들은 사람들은 갑을 좋게 여기고 을을 나쁘게 생각하였다. 그런데 훗날 갑은 그 애첩과 몰래 결탁해서 악행을 저질렀고, 을은 끝내 자신을 더럽히지 않았다. 그제야 사람들이 비로소 갑의 행태를 알게 되었다.
조선 영조(英祖)~정조(正祖) 때의 학자 이긍익(李肯翊, 1736~1806) 선생께서 편집한 야사(野史)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 실려 있는 이야기입니다. 이 책에는 조선 태조(太祖)부터 숙종(肅宗) 때까지, 공식적인 역사 기록에 실리지는 않았지만 중요하다고 여길 만한 사건들이 정리되어 있는데, 위의 이야기는 <폐주 광해군 고사본말(廢主光海君故事本末)> 편에 나오는 것으로, 광해군이 폭정을 펼치던 어지러운 시대의 한 단면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람들, 특히 정치인들이 하는 짓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군요. 겉으로는 누구보다 정의롭고 엄격한 척 하면서 뒤로는 온갖 협잡과 권모술수를 부리는 그 음습한 세계.
이보다 훨씬 전에, 통일신라의 문인 최치원(崔致遠) 선생께서는 <고의(古意)>라는 제목의 오언고시를 지으셨습니다. 이 시는 《동문선(東文選)》 4권에 실려 있는데, 모두 여덟 구절로 되어 있습니다. 앞의 네 구절을 먼저 봅니다.
여우가 예쁜 여인으로 변할 수도 있고 / 狐能化美女(호능화미녀)
살쾡이도 글 짓는 선비로 변할 수 있네 / 狸亦作書生(리역작서생)
그 누가 알 것인가, 이상한 동물들이 / 誰知異類物(수지이류물)
사람 모양 흉내 내 속이고 홀리는 것을 / 幻惑同人形(환혹동인형)
‘狐’는 여우 ‘호’, ‘狸’는 살쾡이 ‘리’, ‘幻’은 변할 ‘환’, ‘惑’은 미혹할 ‘혹’입니다. 여우가 미녀로 둔갑하는 이야기는 전설의 고향의 단골 주제입니다. 그때 구미호(九尾狐)로 분장했던 여배우는 너무 예뻐서 여우인 줄 뻔히 알면서도 열심히 응원했던 기억이 납니다. 글 짓는 선비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살쾡이였다는 이야기는 익숙하지 않은 설정입니다. 그렇지만 당당한 척 등장해서 책임지지도 못할 거짓말을 천연덕스럽게 내뱉는 인간들을 보고 있노라면, 살쾡이라는 표현도 아까울 지경입니다.
어쨌든 이 시가 진짜 여우, 살쾡이를 말하는 것은 당연히 아니겠지요. 저 위의 이야기에 나오는 갑과 을처럼(정확히는 갑처럼),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내용이 되겠습니다. 통일신라에서 육두품 출신으로 태어나 당나라에서 이방인으로 살면서 숱한 수모와 시련을 겪었을 최치원 선생에게 이 세상은 인간으로 둔갑한 짐승이 판치는 세상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세태는 오늘날이라고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사람의 탈을 쓴 짐승들 때문에 착한 사람들만 피해를 보고 피눈물을 흘립니다. 나머지 구절을 마저 봅니다.
몸 변신하는 건 오히려 어렵지 않으나 / 變化尙非艱(변화상비간)
마음 간직하는 게 참으로 유독 어렵네 / 操心良獨難(조심량독난)
참인지 거짓인지 분별하고자 한다면 / 欲辨眞與僞(욕변진여위)
바라노니 마음의 거울을 닦고 보시게 / 願磨心鏡看(원마심경간)
‘艱’은 어려울 ‘간’, ‘操’는 잡을 ‘조’, ‘僞’는 거짓 ‘위’, ‘磨’는 갈 ‘마’입니다. 앞의 두 구절은 ‘세상의 대다수가 비록 그렇게 살지라도 나만큼은 여우나 살쾡이가 되어서는 안 된다. 절대로 그렇게 되지 않도록 마음을 항상 다잡아야 한다.’는 다짐입니다. 뒤의 두 구절은 ‘이토록 짐승이 판치는 세상에서 우리는 여우나 살쾡이를 어떻게 찾아낼 것인가?’에 대한 해결책입니다. 그 방법은 ‘내 마음의 거울을 잘 닦아서 항상 맑은 상태로 만들어 놓고 늘 비쳐보는 수밖에 없다.’입니다. 말씀은 쉬운데 실천은 너무 어렵습니다. 그게 유일한 방법이라면 그렇게 하는 수밖에 없겠지만.
평화롭던 꽃동산에 몇 차례 수상한 조짐이 보이더니 어느 날 광풍이 몰아쳤습니다. 그러자 평소 정체를 감추고 있던 짐승들이 이 기회를 틈타 일제히 가면을 벗어던지고 본색을 드러냈습니다. ‘짐승 같은 놈’ ‘짐승보다 더한 놈’ ‘짐승만도 못한 놈’ 짐승 3종 세트가 모두 뛰쳐나오더니, 폭동을 일으키라고 부추기고, 거짓과 궤변, 억지와 막말로 참과 거짓을 뒤바꿔 세상을 어지럽히려 들었습니다. 꽃동산의 착한 백성들은 짐승이 판치는 세상으로 되돌아가지 않기 위해 손을 맞잡았습니다. 눈을 부릅뜨고 있는 힘을 다해 짐승들을 하나하나 잡아들인 뒤, 그것들을 원래 있던 소굴로 몰아넣고는 입구를 단단히 봉인해버렸습니다. 이 뒤로 짐승들이 기어 나와 세상을 뒤흔드는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편집 : 조경구 객원편집위원, 하성환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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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문선(東文選)》은 삼국시대부터 조선 전기까지 지어진 우수 작품을 모은 선집이며, 이미 번역되어 한국고전종합DB에 올라 있는 우리의 귀한 문화유산입니다. 귀한 내 것을 내 것인 줄 모르고 쓰지 않으면 남의 것이 됩니다. 이 코너는 《동문선》에 실린 작품을 소개하는 자리입니다. 잊을 뻔했던 내 것을 되찾는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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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돼지)이 사람으로 환생했다는 사례가 중국에 있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