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 시인이란 슬픈 천명(天命)인 줄 알면서도 / 한 줄 시를 적어 볼까 //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 보내 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 대학 노-트를 끼고 /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 //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를 / 하나, , 죄다 잃어버리고 // 나는 무얼 바라 / 나는 다만, 홀로 침전(沈澱)하는 것일까? //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 부끄러운 일이다. // 육첩방은 남의 나라 /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 나는 나에게 적은 손을 내밀어 /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윤동주(尹東柱) 시인의 <쉽게 씌어진 시>입니다. 고난에 처한 조국의 운명을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던 시인의 고뇌가 절절히 느껴집니다. 이 엄혹한 시대에 내가 시를 쓰고 있어야 하나?” 그런데 시는 저절로 술술 나옵니다. 몹시 당황스럽습니다. 그래서 천명(天命)입니다. 고뇌 속에서 탄생한 시. 그런데도 어쩌면 이토록 시리고 아프면서도 아름다운 걸까요.

사진 출처 : 필자
사진 출처 : 필자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가는 시기를 살아내셨던 김극기(金克己) 선생은 <고원역(高原驛)>이라는 제목의 칠언율시를 지으셨습니다. 이 시는 동문선(東文選)13권에 실려 있습니다. ‘()’이라는 지명이 들어간 걸 보면 여행 도중이신 모양입니다.

한 평생 백 년 중에 어느새 오십 / 百歲浮生逼五旬(백세부생핍오순)
기구한 세상길에 잘나간 적 없어라 / 奇區世路少通津(기구세로소통진)
삼 년을
국도 떠나 무슨 일 이뤘나 / 三年去國成何事(삼년거국성하사)
만 리 집으로 돌아가는
몸뚱아리/ 萬里歸家只此身(만리귀가지차신)
숲속
새는 정 있어 나그네 향해 울고 / 林鳥有情啼向客(임조유정제향객)
들꽃은 말없이 웃으며 나를 붙드
는데 / 野花無語笑留人(야화무어소류인)
가는 곳마다 시마는 달려들어 괴롭히니 / 詩魔觸處來相惱(시마촉처래상뇌)
곤궁한 시름 아니어도 이미
괴롭구나 / 不待窮愁已苦辛(불대궁수이고신)

*닥칠 핍 *마귀 마 *닿을 촉 *괴로워할 뇌 *매울 신

통진(通津)’나루를 통한다는 뜻이니, 요직에 진출하거나 잘나가는 것을 비유합니다. 오십을 바라보도록 이렇다하게 성취해 놓은 일도 없이 빈손으로 집으로 돌아가는 중입니다. 초라한 처지라 쓸쓸하고 민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봄이었을까요? 풀숲 저편에서는 연신 새가 울고 들판엔 들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습니다. 이 아름다운 풍경 앞에서는 시가 저절로, 쉽게 씌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쓰지 않으려 해도 내 손을 이끌어 쓰게 만드는 존재가 바로 시의 마귀, 시마(詩魔)’입니다. 원래 시인은 곤궁해야 좋은 시가 나온다는데 그것 아니더라도 시를 쓸 이유가 이미 충분합니다. 같은 시인의 작품을 하나 더 봅니다. <촌가(村家)>라는 칠언율시로 역시 동문선13권에 실려 있습니다.

푸른 산 끊어진 곳에 인가 두세 채 / 靑山斷處兩三家(청산단처양삼가)
언덕을 안고 돌아 길가에 비스듬하네 / 抱壠縈回一徑斜(포롱영회일경사)
마른 연못 개구리는 비 온다 개굴개굴 / 讖雨癈池蛙閣閣(참우폐지와각각)
높은 나무의 까치는 바람 분다 깍깍깍 / 相風高樹鵲査査(상풍고수작사사)
버들 늘어진 그윽한 거리 잡초에 덮이고 / 境幽柳巷埋荒草(경유류항매황초)
인적 고요한 싸리문은 지는 꽃에 덮였네 / 人寂柴門掩落花(인적시문엄락화)
속세 밖에서 노닐며 그저 유유자적하니 / 塵外勝遊聊自適(진외승유료자적)
분주히 화려함 찾아다니는 이 우습구나 / 笑他奔走覓紛華(소타분주멱분화)

*안을 포 *언덕 롱 *얽힐 영 *지름길 경 *예언할 참 *폐할 폐
*개구리 와 *까치 작 *가릴 엄 *힘입을 료 *찾을 멱 *어지러울 분

사진 출처 : 필자
사진 출처 : 필자

여기서의 촌가(村家)’는 지나가다 마주친 남의 집일 수도 있지만 고향에 돌아간 시인 자신의 집일 수도 있습니다. 산자락에 비스듬히 서 있는 낡은 집. 마른 연못에서는 개구리가 개굴거리고(개구리 울음소리를 각각(閣閣)’이라는 의성어로 나타냈습니다. 신선하면서도 재미있는 표현입니다.) 높은 나무 위에서는 까치가 깍깍거리는데(까치 울음소리를 역시 사사(査査)’라는 의성어로 나타냈습니다.) 우거진 풀과 떨어진 꽃잎은 절로 정겹습니다. 그래, 이런 데서 유유자적 살면 되지 뭐 하러 세상의 부귀영화를 탐낸단 말인가?” 고향집 풍경 앞에서 갑자기 큰 깨달음을 얻으셨나 봅니다. 시를 읽다 보니 우리도 여기 이 시인처럼 무한경쟁의 세상을 벗어나 새소리, 개구리소리나 듣고 들꽃도 바라보면서 여유 있게 살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혹 우리도 운명처럼 시()를 쓰며 살게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편집 : 조경구 객원편집위원. 조형식 편집위원

※ 《동문선(東文選)은 삼국시대부터 조선 전기까지 지어진 우수 작품을 모은 선집이며, 이미 번역되어 한국고전종합DB에 올라 있는 우리의 귀한 문화유산입니다. 귀한 내 것을 내 것인 줄 모르고 쓰지 않으면 남의 것이 됩니다. 이 코너는 동문선에 실린 작품을 소개하는 자리입니다. 잊을 뻔했던 내 것을 되찾는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조경구 객원편집위원  op9ch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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