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오니 땔나무가 있을 리 만무하다. 동지 설상(雪上) 삼척 냉돌에 변변치도 못한 이부자리를 깔고 누웠으니, 사뭇 뼈가 저려 올라오고, 다리 팔 마디에서 오도독 소리가 나도록 온몸이 곧아 오는 판에 사지를 웅크릴 대로 웅크리고, 안간힘을 꽁꽁 쓰면서 이를 악물다 못해 이를 박박 갈면서 하는 말이 요놈, 요 괘씸한 추위란 놈 같으니, 네가 지금은 이렇게 기승을 부리지마는, 어디 내년 봄에 두고 보자.” 하고 벼르더란 이야기가 전하지마는, 이것이 옛날 남산골 딸깍발이의 성격을 단적으로 가장 잘 표현한 이야기다. 사실로 졌지마는, 마음으로 안 졌다는 앙큼한 자존심, 꼬장꼬장한 고지식, 양반은 얼어죽어도 겻불을 안 쬔다는 지조, 이 몇 가지가 그들의 생활 신조였다.

국어학자며 문학가이셨던 일석(一石) 이희승(李熙昇, 1896~1989) 선생의 수필 <딸깍발이>의 일부입니다. 전체적인 주제는 자기본위의 약아빠진 현대인들에게 딸깍발이의 정신, 그 의기와 강직을 배우자는 당부를 전하는 글이지만, 주제와 상관없이 이런 장면은 특별히 재미있습니다. 이처럼 졌지만 안 졌다고 외치는 앙큼한 자존심의 글, 고려시대 문인 이규보(李奎報) 선생이 쓰신 <계양자오당기(桂陽自娛堂記)>를 봅니다. 이 글은 동문선(東文選)67권에 실려 있습니다.

정우(貞祐) 7년 초여름에 나는 좌사간 지제고(左司諫知制誥) 자리에서 쫓겨나 계양(桂陽)의 수령으로 귀양살이를 왔다. 고을 사람들이 깊은 산기슭의 갈대숲 사이에 있는, 깨진 달팽이 껍질 같이 생긴 다 쓰러져가는 집을 태수가 거처할 곳이라고 하였다. 그 만들어진 모습을 살펴보니 들보와 용마루를 얼기설기 걸쳐놓은 것으로 억지로 집이라고 부를 뿐이지, 위로는 머리를 쳐들 수도 없고, 아래로는 다리를 쭉 뻗을 수도 없었다. 한여름에 여기에 있으면 마치 깊은 시루 속에 들어앉은 듯 김에 쪄지고 열에 들볶일 것 같았다. 아내와 아이들이며 종놈들은 모두 눈살을 찌푸리며 들어가 살려고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나는 홀로 기뻐하면서 깨끗이 청소하고 그곳에 거처하면서 집의 이름을 자오당(自娛堂)’이라고 써 붙였다.

자오당터, 사진 출처 : 인천투데이, [계양산 탐방] 자오당터와 징매이고개
자오당터, 사진 출처 : 인천투데이, [계양산 탐방] 자오당터와 징매이고개

내직에서 외직으로 쫓겨났으니 귀양살이가 맞습니다. 거기다 관사(官舍)라는 건 다 쓰러져가는 오두막. 같이 살 식구들이 모두 아니요를 외칠 때 혼자만 를 외칩니다. 게다가 자오당(自娛堂)’ 스스로 즐기는 집이란 이름까지 붙입니다. 나를 여기로 몰아내 주어서 즐겁다? 어째 한방 먹이는 것 같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누군가가 시비를 겁니다.

어떤 손님이 그렇게 이름 붙인 이유를 따지며 물었다. “지금의 태수는 옛날의 방백(邦伯)이니 손님들이 와서 뵙기를 청하는 일이 날마다 끊이지 않습니다. 이 집에 오르는 사람들이라면 모두 관원 중에서도 준수한 인물이거나, 선비나 승려 중에 으뜸인 뛰어난 자로, 태수와 그 즐거움을 함께 누리지 않을 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태수께서 갑자기 자기만 즐긴다는 자오로 당의 이름을 지으셨으니, 그것은 앞서 말한 빈객(賓客)들을 사람 취급도 하지 않겠다는 말씀입니까. 어찌하여 사람들에게 태수의 도량이 넓지 않음을 보이시는 것입니까.”

오호라. 다른 사람에게 선생의 꽁한 속마음을 들킨 셈인가요. 여러 사람이 즐길 곳을 왜 혼자 즐기는 곳으로 삼느냐는 힐난. 선생은 빙그레 웃으며 이렇게 대답합니다.

손님께서는 어찌하여 이런 말씀을 하십니까. 바야흐로 제가 문하성의 낭관으로 있을 때에는 나가면 누런 옷을 입은 시종이 길 비켜라.’ 외치고, 들어오면 맛좋은 음식이 앞에 가득하였습니다. 이러한 시절을 만나서, 부귀한 집에서 고량진미만 먹고 자란 사람들에게는 이것도 비록 부족한 듯했겠지만, 저에게는 너무도 분에 넘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시인(詩人)의 운명이 기구한 것이야 예전부터 그런 것이라지만, 저도 갑자기 하루아침에 유사(有司)에게 잘못 무고(誣告)를 당하여 이 외지고 황폐하며 낮고 습기 많은 곳에 떨어지게 되었으니, 이는 아마도 하늘이 시킨 것이지 사람이 그렇게 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집이 크고 거대하며 거처하는 곳이 화려해서, 깎이고 손상된 자신에 대해 아파하지 않게 된다면, 이는 하늘이 저를 대해 주는 뜻이 아니며, 단지 재앙만 더 부를 뿐입니다.[若屋宇宏傑, 居處華靡, 不痛自貶損, 則非天所以處我之意, 而祗益招禍耳.]

*집 우 *클 굉 *뛰어날 걸 *쏠릴 미 *낮출 폄 *다만 지 *부를 초

사진 출처 : 필자
사진 출처 : 필자

어려운 한자가 다소 많지만 그래도 웃을 수 있어야 일류입니다. 이어지는 글이 더 있지만 미소 띤 얼굴 유지하실 수 있도록 원문은 여기서 줄입니다. 선생께서 말씀하고 싶은 핵심은 이것이었습니다. 내가 이곳으로 쫓겨난 건 하늘의 뜻이다. 그러니 주어진 처지를 겸허히 받아들이고 스스로 반성하며 사는 것이 하늘의 뜻에 맞게 사는 일이다.” 웃을 수 없는 상황에 처했을 때 억지로라도 웃으면서 그 책임을 자신에게로 돌리는 것은 용기이고 자존심입니다. 거기에 약간의 오기와 여유와 겸손도 양념처럼 얹어야겠죠. 맘대로 안 되니 실패했다고 승질내고 남 탓하고 사고치고 결과에 불복하고 어린애처럼 드러누워 징징댈 게 아니라, 철저히 반성하고 노력해서 다시 일어날 실력과 힘을 기르는 것, 지금은 비록 졌지만 나는 끝내 이기리라 웃으며 외칠 수 있는 건강한 마음이 필요하겠습니다.

 

편집 : 조경구 객원편집위원.  조형식 편집위원

※ 《동문선(東文選)은 삼국시대부터 조선 전기까지 지어진 우수 작품을 모은 선집이며, 이미 번역되어 한국고전종합DB에 올라 있는 우리의 귀한 문화유산입니다. 귀한 내 것을 내 것인 줄 모르고 쓰지 않으면 남의 것이 됩니다. 이 코너는 동문선에 실린 작품을 소개하는 자리입니다. 잊을 뻔했던 내 것을 되찾는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조경구 객원편집위원  op9ch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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