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언제나 타지에 있다』의 고예나 작가를 만나다
우리는 늘 차별 하면서도 차별 한다고 여기지 않고, 늘 차별 받으면서도 차별 받는다고 여기지 못하는 착한 차별주의자들일 수 있다!
지난 13일 여수 소라면 가사리에 있는 솔샘교회(목사 정병진)에서는 다문화 가정에서 자란 고예나 작가를 초청하여 자신이 몸소 겪어야 했던 차별의 얘기를 들었다. 고예나 작가의 어머니는 필리핀에서 태어나 통일교를 통해 한국인 남성과 결혼하여 이주한 여성이다. 어머니는 일면식도 없는 외국인을 따라 낯선 타국으로 건너와서 슬픔과 고통이 사무쳐도 하소연할 수도, 하소연할 곳도 없는 삶을 살아야 했다. 작가는 가장 가까이서 자신이 보고 겪은 어머니, 그리고 어머니와 같은 처지에 처한 많은 어머니들의 삶을 『우리는 언제나 타지에 있다』에서 3인칭 관찰자 시점의 소설처럼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다. 가난했다는 이유로,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여성이라는 이유로, 언어 소통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문화가 다르다는 이유로 무시되고 차별받는 모습을 말이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한국 농촌 여성들이 겪는 노동의 고통을 그대로 감수하고 있다. 그래서 고예나 작가는 “농촌인 우리 마을은 다국적 이모들의 노동으로 유지되고 있음에도 그들은 무시되고 차별받는 현실”에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엄마가 한국에 오기로 결심했을 때 이런 생활을 기대했을까?”라는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어머니 얘기를 하면서 자신과 그리고 자신의 처지와 비슷한 아이들의 얘기도 자연스럽게 흘러 나온다. 그 차별은 자녀들에게까지 이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작가는 정체성을 고민하던 시기에 늘 비교되고 차별받으면서 성장해야 했다고 회고하였다. 작가는 다른 아이들과 비교되면서 정체성을 숨기고 싶었다고도 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타지에 있다”라고 느껴졌다는 것이다.
그랬을 것이다. 여느 아이들이라도 농촌이라서, 가난해서, 정보가 부족해서, 문화적으로 소외되고 교육격차가 발생하는 것이 현실이다. 게다가 다문화 가정에서 자란 그들에게는 또 다른 차별까지 가중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학업 중단 비율도 그들은 다른 가정의 아이들보다 높다고 하였다.
얼마전에 김지혜의 『선량한 차별주의자』를 읽은 적이 있다. 작가는 당돌한 질문을 던진다. “‘당신도 누군가를 차별하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갑질하는 자들에 대한 얘기야 이미 공론화되었으니 모를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일상화되어 있으면서도 잘 인식하지 못하는 ‘착한 사람들의 차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시겠습니까?’” 그러면서 작가는 이주민을 향해 “한국인이 다 되었네요.”라거나, 장애인을 향해 “희망을 가지세요.”라는 말이 칭찬이나 격려가 아니라 모욕적인 표현이라고 하였다. 모욕하려는 의도는 없었겠지만, 그 말에는 ‘당신은 아무리 한국에 오래 살아도 한국인이 될 수 없어.’, ‘당신은 현재의 삶에 희망이 없어.’라는 전제를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러하니 모욕당한 사람은 있는데 모욕한 사람은 없게 된다.
우리 나라에서의 차별은 곳곳에서 일상화되어 있다. 지역 차별, 신분 차별, 빈부 차별, 학벌 차별, 성차별 등등. 그런데 이주민 여성이라면 그 온갖 차별의 조건을 다 겪게 될 것이다. 때로는 노골적인 차별을 겪었을 것이고, 때로는 김지혜 작가의 지적처럼 의도하지 않은 선량한 차별도 겪었을 것이다. 우리가 공식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다문화 가정’이라는 말 속에도 사실은 ‘우리와 다른’의 차별적 요소가 내포되어 사용되고 있는지 모르겠다. 다문화를 문화 상대성의 관점에서 동등한 기준의 다양한 문화로 이해한다면 좋겠지만, 만일 빈부 국가에 따른 우열이나 국력의 강약에 따른 우열을 개입시킨다면 그것 또한 차별이 작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고예나 작가는 전국에서 다문화 가구 비율이 가장 높은 전남의 이주여성과 자녀들이 겪는 상처는 작지 않았을 것이라며, 이러한 차별을 극복하기 위한 대책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작가는 그 방안의 하나로 다문화 연대가 필요하지 않겠느냐고 하였다.
상생의 조건으로서 그것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들의 문화가 차별받는 문화로 소멸되어 가는 것보다는 연대를 통해 다양성을 살릴 수 있다면 이주 문화도 빛을 발할 수 있을 것이고, 우리 문화도 함께 성장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과거의 역사에서도 그것은 증명되었다. 외국 문화와 섞이며 문화의 변화와 성장은 가능했었던 것이다. 그럴 때 고예나 작가가 꿈꾸는 한국인으로서 정체성 100과 필리핀의 정체성 10이 더해져 110의 효과를 발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110의 문화를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교육격차와 정보부족으로 인해 더 커질 수밖에 없는 그들의 환경을 행정적으로 채워주는 정책도 절실하겠다.
고예나 작가는 『우리는 언제나 타지에 있다』는 나를 위해 쓴 글이라며, 재구성은 독자의 몫이라고 하였다. 차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작가의 말처럼 공존하는 우리 모두의 몫이 맞다.
편집 : 이현종 객원편집위원, 하성환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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